501
에스터가 검은 흑발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올라갔던 머리칼이 흑단으로 만든 커튼처럼 촤라락 도로 내려왔다.
커튼 사이, 위아래로 도톰한 분홍빛의 예쁘장한 창문이 열리며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물?”
딱히 선물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 엔크리드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는 평범하지만, 에스터의 눈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이유는 모르겠지만, 고양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기분이 좋은가?
사람이 그냥 그럴 때도 있는 법이었다.
가령 자고 일어났는데 유난히 상쾌한 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엔크리드는 배낭에서 챙겨 온 걸 꺼내 늘어뜨린 상태였다.
사도를 죽이고 얻은 게 많았다.
성물도 있지만, 그 외 유물도.
직감적으로 마법적인 물품이란 걸 알았다.
개중 끈이 엮인 주머니 몇 개는 열지도 않았고.
“독 아니면 그거랑 비슷한 거다.”
히라가 말해 준 덕이었다. 그래서 그냥 서부 땅에 두고 오려 했더니 마법사에게 주면 좋아하리란 말을 듣고 챙겨 온 것들이다.
부서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부서진 것도 많았다.
금이 간 진주 목걸이, 반으로 쪼개진 반지, 피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수놓아진 손수건, 마수 이빨 등.
그중 일부는 정말 귀한 물건이었다.
에스터는 한눈에 그걸 알아봤다.
제대로 반항을 못 해서 그렇지, 서부에서 엔크리드가 만난 사도 또한 작정하고 준비했다면 몰센 백작 뺨을 후릴 마법사였다.
마법사란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너무 크니까.
거기에 엔크리드가 대뜸 덤벼서 궁지에 몰린 탓도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사는 칼잡이보다 순간적인 상황 판단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여간 그 사도가 들고 있던 물건들이다.
그는 멀쩡한 땅을 마경으로 바꾸는 데 일생을 매진한 미치광이이자 사령술사였다.
미쳤다는 건, 또는 미쳐 보인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천재성을 보고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시체를 만지작거리는 게 특기였지만, 미친 만큼 천재이기도 했기에 사도가 원하는 미친 짓거리는 실현되기 직전이었고.
운 나쁘게 혹은 누군가의 액땜으로 엔크리드와 렘을 만나 버렸지만.
에스터는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주머니 하나를 열더니 그 안으로 엔크리드가 바닥에 늘어뜨린 것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넣으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
그녀의 눈은 이미 유물의 가치 정도를 판단 중이었다.
마법사는 연구와 탐구에 매진한 이들이다.
제 주문과 연구에 도움이 될 물건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뭘 했길래 이렇게 귀한 걸 구한 거지?
부서졌으나 저주를 비롯해 어지간한 부정적 기운을 막아 내는 탈리스만부터 서부 방식으로 주술력이 깃든 부적까지.
어디서 마법사의 목이라도 썰고 강탈한 듯했다.
아니, 그게 맞을 터였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 유용했다.”
엔크리드가 덤덤히 말하는 걸 들어 보니 확실했다.
“그렇군.”
에스터는 말하고 물건을 다 챙기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녀는 바빴다.
당분간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엔크리드가 없는 사이, 그녀는 과거에 받았던 저주 중 일부가 영원히 제 주문 세계를 침식했다는 걸 발견했다.
부서진 인형을 실과 바늘로 기워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었다. 침식이 바로 그 흔적이었다.
마법사에게 주문 세계는 언제나 완전무결해야 했다. 그런데 주문자 스스로 자신이 꾸린 세계가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체스에서 나이트와 비숍을 떼고 두는 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침식된 부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질 것이다.
여기서 에스터는 두 가지 길을 두고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침식된 세계를 어떻게든 고쳐 보는 것.
오래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체스를 예로 들었듯이 칼잡이가 팔다리 하나씩은 떼고 싸우는 격이 될 것이다.
잘못해서 침식된 세계까지 당겨서 써 버리면?
그럼 자멸이다. 잘해야 곱게 죽는 거고, 잘못하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적절히 조절해서 주문을 활용하고 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는데 이건 쉬운 길이었다.
두 번째 길은 어려웠다.
‘주문 세계를 다시 만드는 것.’
인형의 찢어진 곳을 기우는 게 아니라 분해해서 다른 인형으로 만드는 거다.
보통의 마법사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에스터에게는 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걸 위해 이런저런 유물이 필요했다.
다른 마법사의 고유 주문이 깃든 것들, 마침 엔크리드가 잔뜩 구해 온 것들 말이다.
“엔키.”
에스터가 앉은 채로 그를 불렀다.
엔크리드가 돌아보니, 흑발의 미인이 마저 말했다.
“잘 돌아왔다.”
물건을 구해 온 것? 대단하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엔크리드가 돌아온 걸 반기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를 보니 두 개의 길 중 하나가 선명해졌으니까.
마치 마법의 신이 가르침을 내려주듯 확신이 들었다.
에스터 스스로는 잘 몰랐지만, 돌아온 엔크리드를 보고 있으니 알 듯했다.
그녀는 저 남자를 기다렸다.
‘고민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것.’
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는 게 문제가 되나?
저 남자는 행동으로, 제 삶으로, 그 외 모든 것으로 항상 말했다. 아니, 지금도 말하는 중이다.
자신이 옳다 믿는 길이라면 어려운 게 무슨 문제냐고.
에스터의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를 본 엔크리드가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들고 온 것들이 많이 비싼 건가?
마법사에게 주면 좋아한다던데 정말 귀한 거였나?
에스터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제 세계를 다시 구축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떠났다.
물론 엔크리드를 포함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 깊어졌다. 시나르는 선물을 받고 돌아갔고 에스터는 눈을 감았다.
엔크리드가 자리를 잡고 누우니, 옆에서 렘이 머리를 감은 채로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 새끼들 도망간 것 같수다.”
“……자라.”
렘은 두 번 더 크르릉거리곤 잠들었고.
엔크리드도 눈을 감았다. 금세 잠이 찾아왔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숙면이었다.
* * *
“너의 가장 큰 장점은 적응력일 것이다.”
새벽녘에 고립의 기법을 하던 중 루아가르네가 하는 말이었다.
비가 그쳤고 기온은 전보다 한결 낮아져, 아침은 전에 없이 상쾌하고 싱그러운 공기가 가득했다.
단련하기 좋은 아침이랄까.
뭐, 덥다고 단련을 빼먹는 놈이 아니긴 했다.
그러니까 본래 살던 도시, 즉 집에 돌아와서 편안함을 느끼기에 하는 훈련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고 잘 뛰니.’
루아가르네가 엔크리드를 보고 느낀 점 중 하나다.
서부에 가는 중에도, 가서도 같았고, 이제는 도시 오하라로 이름을 바꾼 사우전드 브릭에서도 항상 저랬다.
엔크리드는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곤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다리를 벌리고 중심을 잡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어깨 위에는 아우딘이 직접 제작한 돌로 만든 막대, 아니 기둥을 얹은 채였다.
한 손으로는 감싸지도 못할 정도로 두꺼운 돌을 고작 막대라 부를 순 없었다. 기둥이라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루아가르네는 그걸 보며 엔크리드의 강점으로 적응력과 우직함을 꼽았다.
어쨌든 지켜보는 일 자체가 즐겁고 재밌었다.
그녀는 참 많은 사람을 보았고 가르쳤음에도 지금만큼 즐거운 적은 없었다.
루아가르네는 소위 재능 있다는 놈들이 얼마나 병신인지 잘 알았다.
칼이나 몇 번 휘둘러 보곤 검술이 쉽다며 술이나 처먹는 놈들이 즐비했다.
그녀는 재능을 믿고 뻗대는 이들에게 엔크리드를 보여 주고 싶었다.
‘봐라.’
내일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는 똑같이 움직일 것이다.
언제나 같은 태도와 마음가짐이 돋보이지 않나?
돌기둥을 어깨에 얹고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의 눈은 괴로움에 침식되지 않았다.
별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는 항시 갈구하고 갈망한다는 걸.
루아가르네는 전술 이야기를 꺼냈다. 몸에 지닌 걸 넘어서, 제대로 싸우는 법을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전술이란 싸우는 법이다.
감각에 의지해서 싸워야 하는 예도 있으나 그게 아니라면, 생각하고 대비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건 당연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네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면 좋다. 왜일까?”
루아가르네가가 질문을 던졌다.
“무작정 싸움터에 달려드는 게 아닌, 목적을 위해 계산하기 위해서.”
답이 빠르다. 평소에 궁리하고 고민했기에 그랬다. 이 얼마나 훌륭한 자세인가.
“반만 맞다. 나머지 반은 검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다.”
흔히 칼날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재밌는 놈은 살인마일 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재능 있는 무술가들이 살인마가 되곤 했다.
이렇게 찌르니까 사람이 픽 쓰러져 죽네? 그럼 목을 베면? 다음에는 다리를 잘라 볼까?
실력이 늘다 보면 재미가 붙기 마련이었다.
루아가르네가 보기에 엔크리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이 더 그 순간처럼 보였다.
사람마다 실력이 붙는 시기는 다를 테니까.
그래서 지금을 엔크리드의 전성기로 보는 거였고.
내심 검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던진 걱정의 말이었다.
“알았다.”
엔크리드는 순순히 답했다.
꿈이 있고 뜻이 있기에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안다. 자신도 알고, 답한 엔크리드도 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루아가르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예쁜 놈.’
이러니 누가 이 남자를 싫어할까.
루아가르네는 새삼 막사의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유를 알 듯했다.
하나같이 단련하는 일에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자극으로 나아감에 주저가 없다.
어떤 병영도, 어떤 기사단도 이렇게 되지 않는다.
경쟁하고 서로를 할퀴며 끌어내리다가 망가지는 이들도 있고.
재능만 믿다가 싸움터에서 죽어 버리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선 그럴 수 없었다.
병사 중에는 엔크리드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아는 병사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 해도, 대단한 실력에 장군이란 지위를 가졌음에도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걸 어제 쥐어 터진 신병이 보았다.
마르코란 이름이지만, 루아가르네도 엔크리드도 아직 이름을 모르는 신병.
장군의 병영 앞을 지키는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들어와서 보게 된 거였다.
마르코의 동공이 심히 떨렸다.
‘어제 돌아왔잖아?’
저렇게 하면 오히려 몸에 피로가 쌓이니까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지 않나?
맞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게 최선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지금의 방식이 너무 몸에 익어서 쉬는 게 오히려 독이었다.
그는 움직여야 피로가 가셨다.
그게 바로 고립의 기법이 가진 효과이기도 했고.
그리 마르코가 자기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는데.
“형제님, 더 깊게 앉으셔야죠.”
자기도 모르게 장군이란 작자를 빤히 보는 사이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르코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곳엔 목을 뒤로 완전히 꺾어야 얼굴이 보일 거인이 서 있었다.
아니, 거인이 아니다.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 거지?
아우딘은 웃으며 병사를 지나쳤고, 돌기둥을 어깨에 짊어진 장군이 아는 척을 해 왔다.
“아우딘.”
“타격법의 성취가 있으셨습니까?”
“한번 때려 봐라.”
기둥을 내려 두며 하는 말이다. 그 몸짓에서 반가움이 느껴졌다.
아우딘의 뒤로는 진짜 거인 혼혈인 테레사도 있었다. 그녀도 병사 마르코의 옆을 스쳐 갔다.
둘 다 뭐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코는 다시 엔크리드를 보았고.
꽝!
거기서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우딘이란 인간이 주먹으로 장군의 옆구리를 후렸다. 그렇게 보였다. 사전 합의도 없고 뭐도 없었다.
그냥 때렸다.
뭐 하는 건데? 갑자기 왜 때리는데?
“오호.”
대뜸 때려 놓곤 감탄하고.
“어때?”
맞았음에도 미소를 보인다.
다 미친 새끼들인가?
아니면 미쳐야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건가?
어제 훈련 교관 로포드가 노력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했던가?
지랄하네, 진짜.
마르코는 자신의 재능이 별 볼 일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능이 없으면 여기서 끝? 관두고 예전처럼 자기보다 약한 놈이나 때리고 다녀야 하는 건가?
그러긴 싫었다. 그렇기에 마르코는 한발 더 나아갔다. 자기도 몰랐던 용기가 치솟았다.
“왜 때리는 겁니까?”
마르코가 물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떠나라 하지 않았고, 지켜보는 것을 놔뒀다.
그러니까 무언의 허락이잖아?
그게 아니라도 물었을 것이다.
마르코는 간절해졌다. 알고 싶었다. 왜 맞지? 왜 때려? 왜 웃는데? 그냥 미쳐서?
“저게 훈련이다.”
마르코는 한 번 더 화들짝 놀랐다.
너무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이 새끼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어느새 바로 옆에 선 적갈색 머리칼의 보기 드문 미남이 보였다.
차갑고 딱딱한 얼음 조각이 연상되는 표정이었다.
그는 마르코를 보지도 않고 나아갔다.
“변한 게 있군요.”
그의 이름은 작센이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거라면 언제든.”
장군이란 작자가 그대로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프록이 그 손에 검을 쥐여 줬다.
날이 바짝 선 진검이었다. 아케르란 이름의 왕가에서 하사한 검이라는 거야 모르겠으나 명검이라는 건 마르코도 한눈에 알아봤다.
떠돌이 칼잡이에게 훌륭한 무기는 실력과 직결되는 법이다. 날붙이 보는 안목이 좋을 수밖에 없다.
장군이 검을 들고 자세를 잡자마자다.
적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갑자기.
마르코는 눈을 깜빡였다.
뭐지?
분명 보고 있는데 사라졌다. 연기처럼 훅 하고.
그리고.
팍.
그가 있던 자리를 발로 걷어찬 회색 머리칼의 짐승이 보였다. 정확히는 동작이 다 보이진 않았고 발을 뻗은 자세와 움푹 팬 땅, 튀어 오른 흙 따위를 보며 자연히 머릿속에서 그려 낸 그림일 뿐이지만.
짐승이 만면에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희열이 절절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왔구나! 들고양이!”
“저거 안 두고 왔습니까?”
어느새 장군의 옆에 나타난 적갈색 머리칼 남자다.
그는 양손에 단검을 쥔 채였다.
도끼와 두 자루 단검.
짐승과 유령이 서로를 바라봤다.
회색 머리칼은 미소를.
적갈색 머리칼은 무표정이었다.
조용한 시선 교환이지만, 마르코는 태풍의 중심에 선 기분이었다.
“적당히 해라.”
그 사이에서 엔크리드가 말했고, 그걸 신호로 둘이 교차했다.
땅, 쨍!
그런 소리가 들렸다.
마르코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공방이 오간 거였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제 까불면 가죽 벗겨지고 뒈지는 거야.”
회색 머리칼, 렘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선 자리는 조금 전까지 적갈색 머리칼이 서 있던 곳이었다.
작센은 제 단검의 칼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칼날이 반만 남았다. 일격에 칼날이 깨졌다.
무기도 무기지만, 실력의 궤가 달라졌다.
깨진 칼날이 바닥에 푹 꽂힌 채였다.
“몇 대 맞더니 각성했나?”
적갈색 머리칼이 물었다.
“시발, 맞다. 몇 대 막고 각성했다.”
회색 머리칼이 아까보다 진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쇠붙이를 교차한 뒤에는 말싸움이다.
둘은 서로의 속을 긁는 소리를 몇 마디 더 뱉었고, 엔크리드가 적절히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내 차례다.”
말리는 것치고는 이상한 말이긴 했지만.
마르코는 그날 많은 걸 보았고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있던 곳은 우물.’
그 우물을 벗어나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굴러야겠지.
마르코란 남자가 몸을 돌리는 걸 루아가르네가 지켜봤다.
그의 심리를 전부 알지는 못해도, 걸음과 태도에서 어떤 결심을 했다는 건 알 듯했다.
‘이렇게 또 하나.’
엔크리드가 부린 마법이다. 그를 보면 안주할 수 없다. 나아가야 할 것만 같다. 그렇게 제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한계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력으로 진심으로 단련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걸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자극이다.
엔크리드는 모두의 자극제였다. 그 자신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