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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은 머리통이 쪼개지고 썩기 시작한 시신 앞에 쪼그려 앉아 단검으로 시신의 가슴팍을 쪼갰다.
썩은 살이 힘없이 쭉 찢어지고 살점을 헤집은 칼날이 까맣게 물들었다.
사후경직이 다 풀려서 살을 가르는 게 고되지도 않았다.
경직이 있어도 상관없었겠지만.
시신의 가슴 부근에서 벌레가 파먹은 흔적이 여실한 심장이 나왔다. 구멍 나고 갉아 먹힌 심장이다. 까만 피가 점액질이 되어 굳은 형태였다.
이것 봐라?
대장이 돌아오는 건 돌아오는 거고 전후 상황 파악은 기본이었다.
그걸 위해 렘이 시신의 가슴팍을 헤집은 거였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몰랐지만, 렘의 주술에 관한 이해와 깊이는 예전과 궤를 달리했다.
재능을 통해 깨달은 것도 있으나 불노의 광인을 죽이며 부가적으로 얻은 것들, 엔크리드를 보며 삶의 태도를 바꾼 일 등이 영향을 미친 덕분이었다.
어쨌든 주술의 흔적을 살피니 어떤 상황인지 대강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상대가 한 짓을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일반적인 신령은 아니고.’
외도다. 즉, 다른 존재의 힘을 빌려 이뤄낸 비술이란 소리였다.
몇 가지 상황이 머릿속을 흐른 뒤에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운도 좋네.’
렘도 검나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운명의 추가 저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는 것.
부가적으로 알아낸 것도 있긴 했다. 부가적인 것, 외도의 정체다.
마경성지교, 사교도는 악마를 신으로 받든다. 사제는 신의 힘을 빌리는 자들이니 사교도 또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마경의 주인에게 기도함으로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것도 신성으로 쳐야 하나?’
아우딘이 알면 불경하다고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양발을 모아서 걷어찰 소리였다.
어쨌든 사도의 가르침, 악마의 힘을 빌리는 기술, 거기에 천재적인 재능의 주술사가 합류함으로.
‘악마를 신으로 받들어 의식을 이뤄냈다?’
원리를 알았고, 일어난 일의 흐름도 보았다. 여기서 혼자 염병을 떤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제물이 더 있었을 것이다. 보내려고 한 목적지에.
‘마경은 아니군.’
렘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 멀리 가진 않았겠네.”
“죽었을 리는 없지.”
옆에서 루아가르네가 이어 말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길어 봤자 걸어서 보름쯤이나 될까?
목적지에 또 다른 제물을 뒀을 테니 마경으로 던진 건 아닐 것이다. 마경 침묵은 조용하기에 침묵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공간 이동의 비술이든 뭐든 가 보지도 않은 곳으로 사람을 날려 보낼 순 없으니 마경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침묵은 건드리면 반응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그쪽이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이만한 비술이면 제물은 다 죽었을 거고.’
최악은 모래의 강 너머.
그게 아니라면 서부 들판 어딘가에서 별을 보고 알아서 돌아오겠지.
렘의 판단은 그랬다.
그날 밤, 하늘에 달이 떴다. 두 개의 달이 서부의 땅을 비추고 별이 찬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되지 않나?”
그런 렘을 보고 루아가르네가 물었다.
시신을 살피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손을 털고 물러나선 불가에 앉아 모닥불에 바람 토끼 고기를 살살 익히는 중이었다. 조금만 실수하면 금세 타 버려서 맛이 형편없어졌다. 고기는 굽는 정도가 너무 중요했다.
렘은 불길을 보며 답했다.
“이 정도로 죽을 작자였으면 진즉에 뒈졌을 거요.”
그 말이 맞긴 했다.
루아가르네는 엔크리드가 사라진 것에 순간 당황했으나 이제는 진정이 됐다.
둔바켈도 마찬가지였다. 수인은 렘이 와서 알아서 오겠지 하는 순간, 내심 아 하고 짧은 감탄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렘도 속으로는 최악을 생각했으나, 그 대장이 이런 재수 없는 일로 죽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백 번 시도하면 백 번 실패, 아니 천 번을 시도해도 천 번 실패할 짓거리에 운이 터져서 일어난 일이었다.
고작 이런 일에 죽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껏 죽을 고비만 몇 번을 넘기며 살아남은 인간이다.
그런데 만약 죽었다면?
잡념이다. 렘은 금세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 냈다.
‘기껏 주술까지 찾아왔는데 이럴 거요?’
렘은 마음 편히 기다리기로 했다. 발을 동동 구른다고 뭐가 달라지나?
“다들 자기 할 일이나 하쇼. 뭐 찾는다고 보이겠수? 그리고 사막만 아니면 알아서 오겠지.”
“만약 모래의 강 너머라면?”
“그래도 알아서 올 거요.”
족장은 물었었고 렘은 주저 없이 답했다.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고 답해야겠지만.
엔크리드는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근거 없는 믿음이었으나, 누군가는 이걸 신뢰라 말할 것이다.
그는 기사가 될 것이고 자신이 말한 대로 뭐든 지킬 것이며.
‘내 내림무기 맛도 봐야지.’
그럴 것이다. 렘이 시신을 살핀 뒤로 사흘이 지났다. 엔크리드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흔적도 없었다.
* * *
명상, 생각, 궁리.
그런 것들을 하다 보니 금세 해가 지긴 했다.
중간에 기울기 시작한 해를 보며 방향을 가늠하는 것도 가능해서 그러려고 했는데, 그게 통 되질 않았다.
이쪽 하늘은 어떻게 되먹은 걸까?
밝은 해가 떨어지는데 방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을도 없었다. 서서히 빛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파란 초저녁이 되었고, 금세 밤이 됐다.
새카만 밤, 불빛이 없는 사막이다.
열기가 사라진 땅에 찾아온 다음 손님은 추위였다.
밤이 되었다 싶더니 급격하게 기온이 뚝 떨어졌다.
왜 갑자기 추워지냐?
이러다 얼어 죽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길부터 찾고 봐야 할 판이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뜬 별들이 눈앞을 새하얗게 수놓았다.
별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건 또 뭔데?
서부인은 이곳을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이라 불렀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이곳은 방향을 잡을 어떤 이정표가 존재하지 않는 땅이었다.
“이건 뭐 하늘막이 별이라고 불러야 하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엔크리드가 혼잣말을 지껄였다.
햇볕을 막는 구름을 햇살막이 구름이라 부르고 모래 폭풍을 막아주는 협곡을 모래막이 협곡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하늘막이 미리내? 뭐 그렇게 불러야 맞지 않나?
서부 말로, 하늘에 뜬 별의 강을 미리내라 부른다고 들었다.
이 말은 지바가 해 줬다.
가끔 서부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별로 이뤄진 강이 생기곤 한다고.
그걸 미리내라 부른다고 했다.
낮에는 사람을 구운 고기로 만들 듯한 미친 열기, 밤에는 그와 상반되게 얼려 죽일 듯한 냉기가 몰려왔다.
여기서 얼어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 무섭게 가슴팍 안에서 은은한 열기가 솟았다.
순식간에 추위를 잊게 하는 열기다.
엔크리드는 품에 손을 넣어 열기의 근원지를 잡아 꺼냈다.
빛이 사라진 모래로 이뤄진 바다 위, 단검이 은은하게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짧은 금발의 준기사가 준 선물이었다.
“온기를 품은 단검이다.”
라고 히라가 대강 말해 줬었다.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전신에 얇은 막 같은 걸 형성해 주었고, 그 덕에 추위가 한결 가셨다.
엔크리드는 온기를 얻었다. 선물이 제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럼 다음은?
방향을 잡아야 했다.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까?
엔크리드는 품에 지닌 것들을 헤아려 봤다.
아케르, 글라디우스, 불티, 주력 무기다.
여기에 가슴에 매둔 던지는 단검집에 쓰로잉 나이프 여섯 자루, 발목에 숨겨 둔 단검 하나, 거미 껍질로 만든 흉갑, 견갑, 완갑, 정강이 보호대 등도 있었다.
‘럭키 피쉬라고 했던가?’
아무 생각 없이 챙겨 둔 보존식.
지바의 어미가 채워 준 팔찌.
도시 오아라의 장인이 만들어 준 각궁.
온기와 빛을 뿜는 단검.
던지면 돌아오는 단검.
마지막 단검은 가운데에 긴 혈조가 파인 검이다. 재액災厄의 단검이라고 했던가?
흔히 말하는 액막이 물건으로 날도 세우지 않은 거였다.
저주는 사공이 다 냠냠 잘 지지고 볶고 드시니, 큰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다.
당장 방향을 잡을 때 도움이 될 만한 물건 따윈 없었다.
날붙이와 보존식이 지금 가진 전부였다.
엔크리드는 선택해야 했다.
움직일 것인가, 말 것인가?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멈춰서 변하는 게 없다면 움직이는 게 엔크리드란 인간이니까.
타박타박.
엔크리드는 걷기 시작했다.
별빛이, 쏟아지듯 가득한 별이 시야를 트이게 했다. 보이는 건 모래뿐이었으나 부지런히 걸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걸었다.
단검의 온기 덕에 추위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건 참 다행인 일이었다.
저녁 내내 걸으며 내의를 찢곤 그걸 대강 머리에 둘렀다.
이대로 해가 뜨면 두피부터 얼굴까지 다 익을 듯했다. 안 그래도 벌써 얼굴이 목뒤가 화끈거렸다.
다시 해가 떴다.
‘낮에 걷는 건 무리다.’
단검 덕에 추위는 견딜 만하니 밤에 걷는 게 맞다.
느리고 길게 호흡하며 밤에만 걷자.
그렇게 정하고 그렇게 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있을 법도 했다. 대뜸 온 힘을 다해서 뛰는 거다. 대퇴부 근육으로 윌을 터트려서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속도로 질주한다면?
단숨에 사막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하면?
윌을 터트린 돌진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열 번? 스무 번? 몸이 견뎌 준다는 전제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여길 벗어날 수 있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최대한 길고 오래, 체력을 보존하며 걷는 거다.
힘을 비축하는 게 맞다.
엔크리드는 잡념이 끼어듦에 주변을 둘러봤다.
보통 사람이 사흘간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엔크리드는 기초 체력도 좋았고 인내심도 대단했다.
절대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았고 냅다 뛰지도 않았다.
최대한 체력과 몸에 남은 수분을 보존하기 위해 차분히 걸었다.
그렇게 열흘을 무작정 걸었을 때, 작은 변화가 있었다.
모래가 쌓인 둔덕 같은 게 보였는데 그게 묘한 위화감을 줬다.
그 앞에서 멈춰서니 슉 하고 날카롭고 뾰족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엔크리드는 아케르를 뽑아서 날아온 것을 옆으로 밀 듯이 쳤다.
땅!
꼬리였다. 정확히는 전갈을 닮은 마물이었다.
푸왁- 하고 모래 안에서 마물이 솟구쳤다.
마물이든 마수든 뭐가 나오는 게 도리어 반가울 판이었다.
엔크리드는 순간 무수한 공격선을 보았다.
달려들어서 검을 내려쳐도 좋고, 피하며 불티로 찌르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체력 소모가 있다.
엔크리드는 생각과 함께 왼손을 털었다. 어느새 그 손에 들린 단검이 핑 하고 날아가 전갈의 머리 부근을 꿰뚫었다.
퍽!
단단한 외피가 깨지며 안에 있던 검은 덩어리 같은 것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사막에 살며 진화해서 저런 건가?
검은 덩어리가 놈의 혈액이었다.
피가 액체가 아니라 고체가 된 거였다.
어차피 마물의 피는 마실 수도 없었겠지만.
저걸 보니 더 갈증이 났다.
‘목이 마르군.’
피부도 퍼석퍼석해진 감이 있었다.
엔크리드가 손을 뻗자 날아간 단검이 천천히 날아와 돌아왔다.
팽팽한 실에 매단 느낌이 손끝에서 느껴졌는데, 이걸 조금 더 당기자 단검이 더 빨리 날아왔다.
탁 하고 날아든 단검을 잡으니 드는 생각이다.
이 정도면 진즉에 안 쓴 게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무기라는 그런 생각.
엔크리드는 단검을 던지느라 흐트러진 장비를 추슬렀다. 활을 등 뒤에 달아 뒀는데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나 거추장스럽긴 했다.
아침에 훈련하면서 활은 왜 챙겼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활쏘기 연습도 안 할 거면서 이건 왜 챙겼을까?
마물 하나, 그게 다였다. 이후에도 계속 걸었다.
잠은 조금씩 끊어서 잤다. 낮에는 모래 둔덕 같은 걸 찾아서 쉬기도 했다.
마물을 죽인 김에 껍질을 벗기고, 활대를 장대 삼아 가림막 비슷한 걸 만들어서 썼다.
이렇게 들고 다녀 보니 활을 챙긴 게 후회되지 않았다.
각궁은 더위에도 추위에도 멀쩡했다.
‘불티나 글라디우스로 대신해도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장비를 버리진 않았다.
대충 열 하고 이틀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오줌을 싸니 색이 까맸다. 냄새도 고약했다. 암소변이었다. 탈수 증상 중 하나였다.
피부가 퍼석퍼석해진 걸 넘어서서 손가락으로 눌러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갑옷이 무겁게 느껴졌으나 이걸 버리면 낮의 열기를 견디는 게 더 어려운 일이 될 터였다.
목이 말랐다. 갈증이 심장까지 조이는 것 같았다.
입술이 갈라지고 껍질이 벗겨졌다. 피부 껍질도 대패로 나무껍질을 벗기듯 한 줄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더위와 추위의 가혹함을 견뎌 낸 몸이 통증으로 괴롭다며 호소했다.
‘탈피하는 뱀 같네.’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걷다가 멈췄다. 머리가 핑 돌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으라. 고독이란 무엇인가 괴로움에 치를 떨어라, 그게 네가 택한 오늘이구나.”
사공이 저 멀리서 말했다. 출렁이는 강물도 나룻배도 램프도 없이 그의 말만 들려왔다.
엔크리드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듣고만 있다가 눈을 떴다.
그러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기증과 두통, 괴로움,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길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니까.
사막에서 영원히 이렇게 헤매다가 죽고 또 죽어야 할지도 몰랐다.
사공이 노란 바였다. 엔크리드도 다 알았으나 그냥 걸었다.
준기사가 됐든 기사가 됐든, 사람은 사람이었다.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다.
그 와중에도 엔크리드는 허기를 채우려 하지 않았다.
보존식은 기본적으로 소금에 절인 생선이다. 짠 걸 먹으면 갈증이 더 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참았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사막을 헤매다 보면 신기루란 걸 보기도 한다는데, 엔크리드는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다.
타고난 인내심이 그의 눈에 환상이 끼어드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런 거였다.
그리 걷고 또 걸었다. 한계라고 느껴지는 순간을 몇 번을 넘어섰을까?
‘뜨겁다.’
마물 껍질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제 머리를 헤집고 쪼개는 듯한 순간,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오늘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걷다가 죽었다. 쓰러지지도 않고 끝내 버티며 걷다가 선 채로 죽은 거였다.
인내심, 단련된 육체, 끝내 꺾이지 않은 의지가 이뤄낸 조화였다.
정작 엔크리드는 죽음을 확실히 인지하지 못했다.
‘똑같은 오늘인가?’
매일 모래만 보다 보니 이게 오늘이 반복된 건지, 그냥 아픈 채로 하루가 지나간 건지 헷갈렸다.
걷다가 탈진으로 죽은 건 맞긴 했으나 체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후 사공이 몇 번 더 나타났다.
낄낄 웃기도 하고 안쓰럽게 말하기도 했다.
“포기하거라. 그럼 편해지니.”
그러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야, 내가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겠거든, 혹시 윌 남으면 좀 더 넣어 봐.”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혼미한 정신 속, 엔크리드는 직감에 따라 걸었다.
‘오늘은 이쪽으로.’
뛰어난 길잡이조차 들어서지 않는 땅이란 무슨 의미인가? 길을 찾는 게 의미가 없단 거였다.
사막만 다니는 길잡이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얘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모래 폭풍에 휩쓸려 죽기도 하고.
탈진으로 죽는 날이 반복되고.
그러다 눈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강을 보았다. 모래의 강이었다.
‘이게 모래의 강이었구나.’
엔크리드는 말할 기운도 없어 입을 다물고 그냥 속으로 되뇌었다.
사막은 사막이었고,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은 길게 이어진 커다란 모래 늪을 말하는 거였다.
들어가면 죽는 곳이었다.
엔크리드는 거기서 늪을 건널 만한 방법이 없나 찾다가 탈진해 죽었다.
그렇게 죽은 뒤에는 방향을 바꿨다.
이정표를 둘 수 없으니 전갈 껍데기로 만든 가림막의 그림자를 보고 대강 방향을 추측해 걸었다.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을 본 다음에는 절벽을 보았다.
몸이 멀쩡해도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 땅이었다.
거기서 다른 길을 찾다가 탈진, 이번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쌕쌕 숨을 몰아쉬다가 죽었다. 목 안이 갈라져 피가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축축함이 느껴져 그게 더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죽음의 신호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헤매고 또 헤맸다.
얼마나 죽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오늘을 헤맸는지 몰랐다.
그냥 살아 있어도 괴로웠고 죽을 때도 괴로웠다.
갈증이 정신을 좀먹을 법도 했다.
두통과 현기증이 항상 있어서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공은 일부러 나타나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고립된 채로 죽어갔다.
그런데도 매일 걷는 걸 멈추진 않았다.
엔크리드는 걷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의지를 일으켰다.
근육의 힘만으로는 걷기 힘들기에 윌을 움직였다.
‘다리야, 걷자.’
몸뚱이야 견디자.
윌이 전신을 휘돌며 발가락에 힘을 더해 주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또 조금 버티는 법을 터득한 뒤다.
걷고 또 걸은 어느 날,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딸깍거리는 해골 마물이었다.
그 옆으로 귀가 큰 여우도 보였다. 그 귓바퀴 위로 빛나는 돌이 붙은 여우였다. 보석 귀 여우였다.
딸그락!
해골이 발을 떼는 게 보였다.
엔크리드의 입술은 말라비틀어졌고, 누가 본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볼이 패였으며 눈 밑은 새카맸다.
그럼에도 검을 쥐었다. 마물을 본 순간 일어난 자동 반사였다.
휘두를 힘은 있는가? 모른다.
사공은 그 모든 걸 지켜봤다.
지켜보며 생각했다.
모든 오늘이 위기일까? 괴로움의 연속인가? 그건 사람마다 다른 법이었다.
사공도 그걸 알았다.
누군가의 응원이 없고 지켜 줄 사람이 없으니, 고립이고 고독이라 포기할 거로 생각했던가?
그건 아니었다.
저주의 주체인 엔크리드란 인간은 응원을 위해 걷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걸었지.
사공의 눈이 보랏빛을 뿜었다.
엔크리드는 세지 못했으나 사공은 오늘이 서른 번째임을 알았다.
고작 서른 번이었다.
꺾이지 않기에 고립도 고독도 그저 넘어가면 그만일 뿐이었다.
정신이 무너지지 않기에 고작 서른 번의 오늘이면 충분했다.
그 의지가 운을 불러왔다.
“운이 좋구나.”
사공의 말이 희미하게 엔크리드 귓가에 남았다.
운이란 건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 법이었다.
가령 지바의 어미가 준 팔찌는 사막의 흡혈 곤충을 막아 주었고.
과거에 맺었던 인연은 화살이 되어 지금의 엔크리드를 구해 주었다.
핑. 퍽!
날아온 화살이 해골의 머리를 부쉈다.
운이 머리를 틀어 방향이 바뀌었다.
“대장?”
그리고, 엔크리드는 들려온 목소리가 조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다시 눈앞이 핑 돌았다. 억지로 일으키던 윌도 뚝뚝 끊겼다.
동시에 전신의 힘이 쭉 빠지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없이 반복한 오늘로 알게 된 기점이다.
정신을 잃는 과정이었다.
억지로 버티고 버티던 실이 끊어지는 순간이었으며, 대장이란 소리가 환청이라면 다시 오늘이 반복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