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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하겠나이다.”
한때 부족의 천재 주술사였던 남자는 그리 천명하며 제 손가락을 자르곤 제 몸에 저주를 걸었다. 오롯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준비였다.
보통 방법으로 안 되니 편법에 편법을 쓰고, 운에 기대서라도 그렇게 하리라.
남자는 결심했다.
* * *
마경 침묵을 찍고 조금 더 남쪽을 향해서 길을 돌아가자 드문드문 초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마물도 많았다.
서부에는 불가침 영역이 두 곳인데 하나는 마경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이었다.
지금 보이는 초지는 침묵이란 마경 덕에 노는 땅이 된 곳이었다. 당연히 지금 일행에게는 마물이 많다고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여전히 이들에겐 소풍이나 다름없었다.
기사처럼 싸우는 구울이 나온다 한들 팔다리 하나 잃지 않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렘의 조력과 더불어 지금의 엔크리드라면 가능했다.
그우어어.
구울이 나오면.
“이얍.”
둔바켈이 튀어 나가서 상대하고.
지나다가 어디 마물이 적당히 모인 듯하면, 아예 그쪽으로 경로를 틀어서 움직이기도 했다.
“몸이나 풀자.”
그럴 때면 엔크리드가 나서기도 했다. 렘은 물끄러미 구경만 했다.
‘많이 늘었네.’
나아가는 걸음에 주저가 없고 내려치는 검에는 용서가 없다.
달려드는 랫맨이 어디서 주워 든 작대기를 쭉 찔렀다. 엔크리드는 보지도 않고 피하며 한 손에 든 아케르로 목을 벴다.
스걱.
마물의 질긴 살점이 단숨에 잘리며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까만 피를 흩뿌리는 놈 뒤에서 다른 랫맨이 이마에 구멍이 나서 쓰러졌다.
어느새 뽑아 든 불티가 만든 광경이다.
머리에 구멍이 난 랫맨 앞으로 흐릿한 잔상이 생겼다.
고속으로 이동한 엔크리드의 몸이 그려 내는 신기루였다. 엔크리드는 이미 다른 곳으로 움직여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거침없고 호쾌한 검격이 이어졌다.
수직으로 베고 찌르고 발로 찬다. 모든 동작이 한 호흡 내에서 이뤄졌다. 싱글 템포에 세 가지 동작을 넣었다.
저것도 쉬운 건 아닌데 이제는 곧잘 했다.
처음 목이 잘린 랫맨이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여섯 마리가 더 죽었다. 그러다 땅에서 구렁이 같은 놈이 솟았다.
아까부터 발밑이 간질간질하다 싶더니 모래 구렁이가 튀어나온 거다.
큰 놈은 사막에 사구도 만들고 다니는 놈이지만, 이쪽 지대에는 그렇게 큰 놈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작긴 했으나 그래도 굵기가 어지간한 성인 남자의 허벅지만 했는데 놈의 꼬리가 땅을 뚫고 엔크리드의 발목을 감으려 했다.
엔크리드는 앞으로 뛰어 꼬리를 피했지만, 피하면서 뗀 발이 땅을 딛기도 전에 공중에서 균형을 잡곤 불티로 평평한 땅을 푹 찔렀다.
딱 모래 구렁이 놈의 머리통이 있을 자리였다.
‘약점은 어떻게 알고?’
렘은 속으로 생각했다. 모래 구렁이는 머리를 숨기고 싸우는데, 그 머리가 약점이었다. 엔크리드가 그걸 단숨에 포착해서 죽였다.
직감? 그럴 것이다.
사냥꾼의 시선으로 보자면 모래 구렁이는 제 약점을 숨기는 습성을 지녔다.
그래서 꼬리만 뽑아서 공격한 거고.
알면 쉽지만, 모르면 어렵다.
그런데 엔크리드는 알지도 못하면서 거침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음흉한 들고양이의 재주 덕이었다.
렘의 안목은 정확했다.
엔크리드는 두 눈을 감고서도 적의 위치를 알 것 같았다.
감각 기예가 전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모든 것을 알게 했다.
거인을 상대하고, 마법사를 죽이고, 다시 렘과의 대련까지.
최근에 느낀 건데, 자신은 전과 똑같이 단련하는데도 매일 달라지는 것 같았다. 성장의 정도가 선명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검이 쭉쭉 잘도 뻗네.’
굳이 설명하자면, 몸 상태가 항상 최고였다.
숨도 잘 쉬어지고 팔도 쭉쭉 잘 뻗고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레 다음 동작이 떠오르고.
랫맨이 손톱을 들어 찌르려 하면 그걸 막거나, 베거나, 피해서 찌르거나, 아예 다가오기도 전에 쪼개거나, 그것도 아니면 걷어차는 것까지 수십 개의 공격선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그중 하나를 택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럼 예측한 결과가 나왔다.
모래 구렁이도 그랬다. 꼬리가 나오자마자 놈의 몸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대강 느낌이 와서 시험 삼아 찔렀는데 불티로 찌른 구멍에서 검은 피가 솟았다.
그렇게 일단의 마물을 죽인 뒤 돌아왔지만 엔크리드의 몸에는 점점이 튄 검은 피 몇 방울이 전부였다.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누가 보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하러 다녀온 줄 알 것이다.
몸에 튄 건 뭔데?
어? 몰라? 뭐가 튀었어?
이런 대화가 오가도 무방할 만큼 멀쩡하게 돌아왔다.
조금 전 랫맨을 포함해 마물을 열 마리를 넘게 죽였는데도.
“지랄 났네.”
렘은 괜히 웃음이 나와 말했다.
돌아가면 맏이 주술사의 입에 약초를 욱여넣어서라도 빨리 주술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둔바켈의 시선은 좀 이상했다. 엔크리드를 보며 답지 않게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루아가르네는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즐기니, 한계를 잊는 것이다.”
그녀는 뭔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어쨌든 일행은 계속 움직였다.
싸울 때 빼고는 주로 이야기를 했다. 막 주올이 요리에 심취할 때면 아율이 옆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가끔 대륙에서 온 사냥꾼 무리가 서부에서도 북쪽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살기도 한다. 사막 근처 황무지 쪽이지.”
“들어가면 못 나온다며?”
사막 근처에서 사는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외곽에만 머물지.”
“욕심이 화를 부르우. 사막으로 기어들어 가면 백골 병사가 돼서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상당히 먼 거리요.”
옆에서 렘이 거들었다.
주올도 아는 얘기인지 커다란 솥에 보리와 귀리, 얇게 저민 염장 고기에 기름을 넣어 볶으며 말했다.
“사냥꾼은 보석 꼬리 도마뱀과 보석 귀 여우 때문에 오는 거다. 놈들이 가끔 사막 외곽까지 나올 때가 있는데 그걸 기다렸다가 잡으려고.”
처음 듣는 동물이었다. 서부에는 특이한 동물이 많이 살았는데 주올이 말한 것도 그런 거였다.
이야기를 듣자면 몸에 보석이 달린 동물이란다.
도마뱀은 꼬리에, 여우는 귓바퀴에.
애초에 모래를 먹고 사는 놈들이기에 사막에서 산다고도 했다.
물에 닿으면 죽는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공수병이 있다고도 하고.
상당히 사납지만, 사냥하려다 실패해도 수통에서 물 한 번만 뿌리면 도망가는 놈들이었다.
시도해서 잡으면 보석 몇 알 얻는 거고, 실패한다고 해서 목숨이 위험할 경우는 거의 없단다.
그럼 필요한 건?
“선을 지키는 거요, 선. 괜히 안으로 더 들어가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리는 거지.”
“운이 따라 줘야 한다. 기다린다고 다 놈들을 만나는 건 아니니까.”
“운은 무슨, 습성을 이해하는 게 먼저다.”
렘, 주올, 아율 순으로 하는 말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대략 느낌은 알 듯했다.
영리하고 준비된 사냥꾼이 인내심을 갖춰야 잡을 수 있다는 거다.
거기에 운이라는 요소가 개입한다는 거고.
그럼 서부까지 보석 꼬리 도마뱀이나 보석 귀 여우를 잡으러 오는 놈 중 뛰어난 사냥꾼이 얼마나 될까?
범죄자, 도망자, 탈영병, 도박 빚에 쫓기는 놈.
하여간 다양한 인간 군상이 사냥하겠다고 덤비는 꼴이란다.
그러니 자연히 멍청한 놈이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주올이 말하길, 일전에는 여우를 잡으러 왔던 용병단이 통째로 돌아 버렸는지 서부까지 내려와선 부족을 습격한 적도 있었단다.
치이이이익.
주올이 솥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적당히 익은 염장 고기와 곡물 알갱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튀었다가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 동작에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주변에 훅 퍼졌다.
엔크리드는 훌륭한 청자답게 주올의 동작 사이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냄새 죽여주는군.”
“기대해도 좋다. 서부의 명물, 보리 볶음이지. 어떻게 되긴. 반쯤 죽이니까 도망치더군, 나머지는 어디 마물의 먹이나 됐겠지.”
가끔, 정말 아주 가끔 멀쩡한 놈들이 진득하게 기다려 보석을 얻고 돌아간다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또 그렇게 해서 얻은 보석이 무슨 인생을 바꿀 만한 거금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크라이스가 들으면 당장 사냥꾼 일개 중대를 조직해서 들어오려나?’
그러진 않을 것 같았다. 크라이스는 운에 뭘 맡기는 걸 싫어하니까.
만약 그럼에도 보석 동물을 잡으려 한다면, 먼저 습성을 파악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은 후에 운이라는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채로 움직이겠지.
엔크리드 자신이라면?
안 잡는다. 크로나는 다른 방식으로 벌면 되니까.
그냥 심심풀이 이야기였다.
치이익.
솥에서 김이 솟았다. 서부 명물 보리 볶음이 다 됐다.
야생 보리와 귀리에 이런저런 마른 채소까지 들어간 요리다. 잘게 자른 염장 고기로 간을 맞췄는데, 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입 가득 퍼서 입에 넣으니 치아 사이로 보리가 퉁퉁 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걸 잡아채 씹자 고소함이 입안에 한껏 퍼졌고, 허브향과 짭짤함이 기막힌 조화를 이뤘다.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엄지를 들었다.
“극찬이로다.”
주올은 만면에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일행은 적당히 마물을 정리하며 다시금 부족으로 돌아왔다.
“다녀왔는가.”
족장이 가장 먼저 일행을 반겼다.
그렇게 돌아온 뒤 도로 평소의 생활을 시작하자, 이틀 뒤에 렘이 찾아와 말했다.
“다녀오겠수다. 사고 치지 말고 있으쇼.”
“살다 살다 너한테 그런 소리를 다 듣게 되네.”
“돌아오면 재밌을 거요.”
렘이 웃으며 말하고 돌아섰다.
주술이란 무엇인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라그나가 먼저 기사란 영역에 닿았지만, 렘도 그와 비슷한 실력이 되리라는 거다.
“잘못하면 죽는다던데?”
재능이 높을수록 죽을 확률이 높다. 주술이란 그런 거라고 들었다.
아율이 해 준 말이었다. 렘의 등에 대고 물으니, 렘이 고개만 돌려 되물었다.
“내가 죽을 것 같수?”
“아니.”
답은 곧바로 나왔다.
그 대답에 렘은 낄낄 웃으며 떠났다. 엔크리드도 피식 웃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러니까, 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고 간간이 대련하는 일이었다.
“안 지겹습니까?”
옆에서 쌍둥이 중 하나가 물었다.
둘 중 하나는 기절한 채다.
둘이서 하나의 문장을 번갈아 가며 말하기에 둘 중 하나가 기절하면 말도 반절만 하는 건가 궁금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쌍둥이의 물음에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뭐가?”
“훈련 말입니다.”
“이게 왜 지겨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쌍둥이는 입을 다물었다.
엔크리드는 쌍둥이의 질문을 한 귀로 흘리며 기대감을 만끽했다.
라그나에게서 뭔가를 배웠듯 렘에게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엔크리드의 심장을 뛰게 했다.
중간에 아율이 와서 렘이 나오려면 보름쯤 걸릴 거라고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사이에 도망간 점쟁이 부족이 잡혔으며, 젊은 주술사 하나가 제 부족에서 불쌍한 앉은뱅이 하나를 구했다.
식인종이 먹이로 데리고 다니던 사내라고 했다.
그는 얼굴에 곰보가 가득했고 왼손은 엄지를 빼고 다 잘린 채였으며 말도 어눌했다.
그렇다고 주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나 병자를 돌보는 정성은 대단했다.
본인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거로 보였다.
그렇게 아직 보라마인의 저주에 걸린 이들을 돌봄으로 엔크리드와 같은 막사를 쓰게 된 앉은뱅이는 항상 땅을 기어다녔기에 기묘한 소리로 기척을 드러내곤 했다.
스으윽, 스으으윽, 스으으으윽.
두 팔로 땅을 짚고 바닥을 기는 소리였다.
렘이 성지로 떠난 뒤 닷새째였다. 엔크리드는 새벽녘에 일어나 고립의 기법을 하던 중이었다. 다른 날보다 눈이 먼저 떠진 날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루아가르네도 둔바켈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혼자였다.
엔크리드는 몸을 움직이며 어떤 생각에 잠긴 채였다.
‘저주가 무용하다면 주술은 안 통하는 몸이 된 건가?’
그럼 주술사를 상대할 때 방심해도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주는 통하지 않는다. 그건 인지했다. 그게 엔크리드에게 약간의 틈을 만들었다.
“당신은 저주가 통하지 않더라고.”
앉은뱅이가 말했다.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엔크리드는 저 친구의 말투가 변했음을 알았다. 어눌함이 없었다.
엔크리드의 허리춤에는 아케르가 있고 몸에는 갑옷도 둘렀다. 무장을 제대로 한 상태였다. 무장을 한 이유?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훈련이야 맨몸으로 해도 되지만, 오늘은 이렇게 했을 뿐이었다.
아침에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편안함은 타협이고, 꾸준한 훈련과 반복이 결국 내일로 나아갈 힘이라고.
그건 무장을 점검하는 일도 포함이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하물며 그냥 들고 다니기엔 뭐해서 선물 받은, 아직 제대로 써보지 못한 활도 허리띠에 차고 있었다.
그게 상대에게는 불운이었다.
무장하지 않았어도 문제인데, 갑옷까지 갖춰 입은 채니까.
엔크리드는 공격선 수십 개를 보았고 상대의 몸이 불편한 게 진짜라는 것도 알았다.
거기에 상대는 제 검의 범위 안에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숨 한 번 내쉴 시간도 필요 없이 벨 수 있는 간격이었다.
“저주가 안 먹히다니, 천적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눈을 마주 보니 누군지 알 듯도 했다. 스치듯 지나쳤으나 사도를 죽인 뒤에 마지막 단검을 휘두른 놈의 인상이 무척 강했다.
그자였다.
점쟁이 부족의 누구라고 했었는데?
아, 렘 이후 최고의 재능을 지닌 놈이라고 했던가?
검나래가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 했었고, 히라는 점쟁이 부족의 가장 큰 불운이라고 표현했다.
천재 주술사, 어쩌면 렘보다 뛰어났을지도 모를, 젊다기엔 더 어린 서부인이다.
제대로 감지 못해 기름진 머리칼과 눈곱이 낀 눈, 앞니 하나도 어디 놓고 온 듯했다.
자신이 던진 단검 때문에 다리도 잃은 건가?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할 거 아예 잘라 버린 건가?
그렇게 보였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웃었다. 희열 대신 어떤 광기가 엿보였다. 증오로 점철된 그런 광기다. 눈깔에 누가 끓는 물을 넣어 둔 것 같았다. 부글부글, 증오로 만들어진 수증기가 그의 눈에 피어올랐다.
말투도 그러했다. 단장斷腸,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그런 괴로움을 담아서다.
“저주가 통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나?”
괴로움을 감추는 끅끅하는 가짜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이어 말했다.
“이건 내 미래, 영혼 모든 것을 던져 만든 비술이다.”
왜 지금 보더 가드에 있을 때 요정 암살자에게 당한 게 생각날까?
방심한 것도 아닌데 틈을 비집고 들어온 그 단검, 그와 비슷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바치니.”
놈이 입을 열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실처럼 생긴 게 나와선 몸에 닿았다. 위협도 살기도 없기에 무시해도 무방했지만,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검을 내쳤다.
자신한 대로 숨 한 번 내쉴 시간 내로 뻗어 나간 검이 상대의 머리를 쪼갰다.
쩍.
손을 뻗은 놈이 그 자세 그대로 머리통이 수직으로 열렸다. 피, 뇌수, 잘린 두개골 따위가 흘러내리는 게 보인다 싶더니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그럼에도 눈을 감지 않고 버티자, 주변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이,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붕 하고 부유감이 들었다. 얻어맞고 날아갈 때 외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부유감의 끝에 눈앞에서 빛이 산란하듯 터져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느껴지는 건 뜨거운 열기였다.
도시 오아라의 햇살, 서부의 안온한 햇볕과도 다른 살을 익힐 듯한 그런 뜨거운 볕이다.
눈을 뜨면 세상이 노랬다. 하늘은 높고 주변에는 모래뿐이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바짝 마른 채로 자신을 중심으로 세 방향에 무릎 꿇고 앉은 시신 세 구뿐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죽은 뒤다.
엔크리드의 강점은 상황 파악이 빠르다는 거였다.
상황을 곱씹어보자,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로 인해 또 배운 게 있다는 것.
어느 순간에도 방심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몸에 철판 갑옷을 둘러도 뾰족한 단검에 뚫리는 법이라 했다.
자신의 상황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모래 외에 보이는 게 없었다. 굴곡진 모래, 둔덕 같은 모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래, 생각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이라고 했던가?
적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저주가 아닌 비술, 천재 주술사가 삶을 포기하고 동료의 목숨까지 바쳐서 이뤄낸 짓이었다.
저주가 통하지 않으니, 자신을 사막으로 보낸 거였다. 상황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