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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마냥 얻어터지기만 하면 렘 새끼가 아니었다.
진짜 자신의 주술을 찾으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자신과 어울려 줄 순 있는 거였다.
자, 보슈, 재밌겠지?
렘이 도끼로 한 말에 엔크리드도 답을 줘야 했다.
아케르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엔크리드는 거인, 마법사와 싸운 뒤로 미친 듯이 지난 경험을 복기했다. 버릇이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다.
모든 싸움이 뭔가 조금씩 부족했다. 전부 성에 차지 않았다.
‘아쉽다.’
거인은 힘만 셌다. 마법사는 칼잡이가 아니었다.
일말의 즐거움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긴 했다. 그 와중에 얻은 깨달음이 짜릿함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이전의 것에서 이어져 온 것.
그러니 맞수와 검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거인의 힘은 위협적이지만, 기술 자체는 형편없었다.
힘이 세면 유리하다 한들 그게 전부일 순 없는 법이니까.
힘보다는 타이밍과 정확성이 더 중요했다. 힘을 전달하기 위한 올바른 자세에서 나오는 칼질과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질은 차이가 컸다.
정확한 자세로 상대를 궁지로 모는 법.
정검식이다. 튜터라는 마검에서 배운 정검식에 루아가르네가 경험을 더하고 엔크리드가 시간과 노력을 더 했다.
렘을 궁지로 모는 검이다.
정수리 치기, 감아치기, 사선베기, 상단 수평베기, 중검식 회전베기.
모든 동작을 통해 하나의 말을 전했다.
한 손으로 찌를 거라고.
그게 이 수싸움의 마지막이며 가장 중요한 공격이 되리라고.
렘은 대비했다. 당연했다. 보여 주는데 왜 당하나.
엔크리드는 바른 자세로 상대를 몰아세우는 사이에 속임수를 섞었다.
기만하는 검이다.
환검식이다. 엔크리드는 수싸움을 위해 쓴 모든 동작으로 하나의 기만을 완성했다.
한 손 찌르기를 보여 줄 것처럼 하다가 대뜸 거리를 좁힌 거다. 한순간 땅을 박차고 바짝 붙으니, 거리를 좁히는 걸 본 렘이 도끼를 쥔 주먹을 휘둘렀다.
엔크리드는 하프 소드 파이팅을 위해 리캇소 부근을 왼손에 쥐곤 칼날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대로 두면 주먹으로 칼날을 치는 짓이 될 터였다.
각도를 틀어서 주먹질로 칼날을 부수는 거? 렘은 그렇게도 할 수 있었지만, 상대는 엔크리드고 그 손에 들린 칼은 마법검이었다.
렘은 주먹으로 칼날을 치는 대신 손목을 꺾어서 도끼날을 내밀어 칼날에 댔다.
칼날과 도끼날이 엉키며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걸 반복했다.
티디디디딩.
두 개의 쇠붙이가 만나서 즐거움에 불똥이란 환희를 내질렀다.
그 짧은 순간 엔크리드는 리캇소를 놓고 손가락을 세워 렘의 눈을 찔렀다.
발라프식 무투술, 장님 만들기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손짓이며 조금 전보다 반박자 빠른 속도의 손짓이었다.
그럼에도 렘은 뒤로 고개를 젖혀 피했다.
틱 하고 손가락 끝이 턱 끝을 스치자 핏방울이 튀었고, 회색 수염도 몇 올 튀어 올랐다.
엔크리드의 손가락에 피부 일부가 찢긴 탓이다.
렘은 그대로 발을 올려 치고, 엔크리드는 그걸 무릎으로 받아 냈다.
빡!
둘은 공수를 교환하곤 멀어졌고, 멀어지기 무섭게 엔크리드가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렘의 뒤에서 그걸 보던 아율은 두 줄기 파란빛의 유성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엔크리드의 눈이 그런 착시를 보이게 했다.
온 힘을 다한 중검식 내려베기다. 기사의 일격이기도 했다.
모든 게 이 한 수를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본래 둘의 대련은 십 중 팔의 힘으로 하는 거였다.
십 중 십을 다 쓰면 둘 다 위험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열중한 탓에, 자기도 모르게 십의 힘을 다 썼다. 한순간 둘 다 진지해져 버려 전력을 다했다.
쇄도하는 칼날을 본 렘은 도끼를 올려 쳤다.
힘에 힘으로 맞서는 듯했다. 두 개의 무기가 부딪치기 직전 도끼를 올려 치던 렘의 손목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중검식 내려베기로 내려친 검격을 도끼날로 받아 내며 옆으로 흘렸다.
유검식이었다. 흐르는 검이다.
그대로 둘은 멈췄다.
아케르를 비스듬히 내린 엔크리드와 도끼를 명치쯤에서 든 렘이다.
더 싸우면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살벌한 대련이다. 아니, 이걸 대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올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가 푸하 하고 내뱉었다.
그렇게 살벌하게 싸웠음에도 둘 다 웃었다.
“크흐, 어떻수?”
렘이 물었다.
“이건 진심인데.”
무표정하던 엔크리드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존나 재밌다.”
렘은 낄낄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대장 새끼는 진짜 즐거우면 표정이 변하는데 그걸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저리 웃을 수 있다는 건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다는 거였다.
“둘 다 미쳤군.”
지켜보던 주올이 말했다.
“애 떨어질 뻔했다.”
아율도 감탄했다.
“그 말은 좀 무서운데.”
렘이 중간에 답하고 둔바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런 놈들이니까.
루아가르네는 또 전율했다. 요즘 자신은 엔크리드에게 놀라기 위해 지켜보나 싶을 정도였다.
‘무섭게 늘었다.’
렘이 작정하고 준비해서 싸우니 엔크리드의 현재 실력이 더 잘 보였다.
‘그리고 더 늘 것이다.’
엔크리드가 한계에 봉착한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거로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제 재능 판독의 감각이 고장 난 게 아니라면 그게 분명했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 루아가르네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웃고 있는 엔크리드를 보고 있자니 자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웃음.’
미소, 즐거움, 희열.
엔크리드는 제 꿈을 좇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겼다. 그러니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저 웃음, 미소를 보는 순간 불현듯 머릿속을 파고든 깨달음이다.
“오늘처럼 또 싸우면 내 자식이 사라질지 모르겠으니, 이다음은 주술을 찾은 뒤에 합시다. 그리고 도끼도 바꿔야 하고.”
렘이 제 도끼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정하고 싸웠더니 렘의 도끼에는 실금이 가득했다. 툭 치면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이렇게 싸웠다간 둘 중 하나는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답하고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를 챙겼다. 다시 여행이었다.
중간에 마물도 나오고 특이한 형태의 지형도 구경했다.
“여긴 검은 유성이 떨어진 자리요.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지평선이 붙은 대지라고 하지.”
렘이나 주올, 아율이 나서서 설명해 주곤 하는 여행길이다.
마물이 상대가 되질 않으니 그리메의 사냥길은 유람이 되었다.
엔크리드와 렘을 포함해서 비대칭 전력이니 너무 당연한 얘기이긴 했다.
지평선이 붙은 대지는 초지가 거의 없는 마른 땅이었다. 중간중간 커다란 나무나 바위, 구릉이 보였으나 대체로 그냥 넓은 땅이었다.
하도 넓어서 눈만 좋으면 저 멀리 움직이는 점 같은 게 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황량해 보이나 또 햇살과 바람과 어우러지면 평온한 그런 땅이었다.
계속 가다 보니 이전에 싸웠던 곳에 도달했는데.
“모래막이 협곡이란 곳인데, 말 그대로 여길 지나며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강으로 가게 된다 이런 거요. 모래의 강이 사막이라는 건 알지?”
사막은 모래만 있는 땅이라고 들었다. 가 보진 않았다.
“그곳은 프록이 가장 피해야 할 땅이란다.”
루아가르네는 진즉부터 건조함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데도 잘 참긴 했다.
싸울 때 보니 상대가 외치는 심장 소리에도 잘 싸우는 걸 보면, 루아가르네가 프록 중에선 인내심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호심갑에 상처를 입으면 발작하듯 미쳐 날뛰는 프록도 있는데 루아가르네는 사교도를 상대할 때가 아니면 대체로 냉정하긴 했다.
주올이 사막을 구경하는 건 어렵다고 했다.
“들어가면 다들 길을 잃어서 죽어.”
아율이 덧붙여 말했다. 엔크리드도 굳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여기저기 며칠 전에 있었던 전투의 흔적이 보일 법도 했으나 그런 건 싹 없어진 채였다.
거인의 시체도 어디다 버린 것 같았다.
협곡은 안으로 깊었다. 시신을 싹 치운 입구를 지나 들어가니 한쪽 벽에 굴이 잔뜩 보였다.
고개를 위로 꺾어서 봐야 할 정도로 높은 절벽에 동굴 입구로 보이는 구멍이 가득했다.
“성지다.”
주올의 말이었다.
이곳이 서부의 성지였다. 주술의 상징이자 묘지도 대신하는 그런 곳.
그래서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냐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답할 듯했다.
신기하긴 했다. 수많은 동굴도 그렇고 가끔 절벽을 타는 동물도 보였다.
저건 원숭이인가? 아니 곰을 닮았는데.
“곰숭이다.”
주올이 마저 설명해 줬다.
곰과 원숭이의 중간쯤 되는 동물이라고 했다.
저런 게 왜 있나 싶지만.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잡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굶어 죽더라도 잡아먹으면 안 되는 동물이란 거다.
뾰족 솟은 귀에 둥근 몸에 둔해 보이는 놈이었다.
인간이 해를 끼치지 않아서 그런지, 곰숭이가 다가와 뭘 내려두고 갔다.
빨간 열매였는데 반으로 쪼개니 석류처럼 작은 알맹이가 가득했다.
“영생과다. 시큼한 맛인데 달고 맛있다. 선물을 받았으니 우리도 선물을 줘야지.”
주올이 말하며 럭키 피쉬 조각이나 곡물가루로 만든 주전부리 같은 걸 내놨다. 곰숭이는 적당히 경계하며 다가와선 먹을 걸 가져갔다.
연신 이쪽을 향해 눈알을 굴리는 걸 보면 경계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식인종 놈들은 곰숭이도 공격하는 놈들인데 반응을 보니까 여기에 숨지는 않은 것 같군.”
“그때 도망간 놈들?”
“그래, 아마 지금도 쫓고 있을 거다. 사냥꾼이 모여서 움직였으니 금방 잡을 거다. 서부는 넓지만, 숨을 곳은 없으니.”
엔크리드는 단검을 휘두르던 마지막 놈의 등에 단검을 꽂은 기억이 있었다.
맞은 부위가 좋지 않아서 멀쩡히 움직이긴 힘들 텐데?
주술이 신성력만큼 치료술이 뛰어난가?
그렇다면 두 다리로 걸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걷기엔 그른 몸이 됐을 거다.
등, 척추 부근을 정확히 찔렀다.
엔크리드 자신이 차던 붕대 갑옷처럼, 그런 유물이라도 하나 차고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큰 부상일 것이다.
그런데 용케도 지금까지 도망자 신세였다.
잡혀서 감옥에 갇히거나 진즉에 죽은 게 아니라.
그것만 봐도 보통 놈이 아니긴 할 터였다. 하긴 실력도 무척 뛰어났다.
“가자고.”
그리메의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대련, 요리, 호수에 둔바켈 던지기 등을 하며 움직였다.
대부분 벨롭터를 타고 달렸는데 대륙과 비교하면 땅이 훨씬 넓게 느껴졌다.
중간에 시야를 가로막는 산맥 같은 게 없어서였다.
그렇게 가는 길에서 뜬금없이 구울이 튀어나왔다.
한창 서쪽으로 달린 뒤였다.
끄워어어어.
구울, 서부에선 흔히 보기 힘든, 마경의 상징과도 같은 마물이었다.
둔바켈이 나섰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곡도가 단숨에 놈의 목을 갈랐다.
퍽 하고 마른 짚단처럼 잘린 목에서 검은 피가 흐르고 머리통이 날아 땅을 굴렀다. 그렇게 몇 마리의 구울이 더 보인 뒤다. 아율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렘, 여기부터는 불가침 영역이다.”
“알아.”
“더 가면 안 된다는 소리다.”
“알아.”
그럼에도 렘은 계속 걸었다. 그러며 말했다.
“진짜 그리메의 길을 가자고 했잖아.”
그리메란 영웅이 남긴 전설의 끝은 행복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는 마경을 찾았고, 마경에서 나온 마물과 싸우다 죽었다. 그 끝은 행복보단 처절함이 앞섰으며 처절한 만큼 위대했다.
“서부에도 마경이 있수다.”
렘이 말했다.
마경은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 그중 가장 큰 게 남부 마경이라 알려졌지만, 그 하나만이 마경이라 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흘러 흘러 듣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름이 붙은 마경도 있수다.”
렘은 엔크리드보다 많이 알았다.
성인식을 치르며 서부에 있는 걸 봤으니까.
일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렘은 성인식 당시에 마경 경계로 다가가 그 안을 보았다.
“이쪽 마경의 이름은 침묵이라고 부르우.”
말하고 렘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웃으며 물었다.
“구경 가겠수?”
끄덕.
엔크리드는 숨도 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뒤를 지키기 위한 검을 들겠다. 그런 기사를 꿈꿨다. 그 꿈을 가로막는 것 중 하나가 마경이었다.
오아라를 죽인 것도 마경의 주민인 발록이었다.
“아율, 괜찮을 거다. 왜 침묵이란 이름이 붙었는지도 알잖아.”
주올이 한참 생각하더니 아율을 달랬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무날이 넘도록 벨롭터를 타고 달린 길이다.
전력으로 달린 건 아니지만, 빨리 달리긴 했다. 목적지는 마경이었다.
더 나아가자 황톳빛 땅이 슬슬 검어졌다.
그냥 검은 것도 아니고 칙칙하며 비린내도 풍기기 시작했다.
그워어어!
구울도 간간이 튀어나오고 변형된 랫맨도 보였다. 그래도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마경이라고 부르기엔 현저히 적은 숫자였다.
주변에 보이는 초지가 전부 사라지고 낮은 구릉이 눈앞을 막았다.
낮지만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구릉인데, 온통 까맣다. 구릉을 좀 타고 올랐다. 여기까지 오니 아율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서부인 중 몇몇은 이곳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 죽는다 말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런 저주는 없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몸에 나쁜 영향이 있겠지만, 여긴 초입도 아니었다.
마경에 근접한 땅일 뿐.
검은 안개 너머야말로 진짜 마경이었다.
구릉에 올라서 보니 칙칙한 검은 빛 사이로 다른 빛깔이 가끔 보였다.
회색의 나무다. 마경의 상징이었다.
모양은 기괴했다.
가지와 잎이 모여 산발한 여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바위는 사람 심장 모양인데 빛이 없는 칙칙한 고동색이다. 바람이 부는데 이제까지처럼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묵직하고 칙칙한 기운이 가득했다.
마경 회색 숲은 도시 오아라에 내린 저주였다.
그 저주는 기사 오아라가 가르고 벴다.
그리고 지금, 서부에 내린 저주가 눈앞에 있었다.
까만 안개가 좌우로 퍼졌는데 그거 때문에 시계가 확 열리지도 않았다.
“이 안에서 마물이 나온 건 딱 두 번인데, 두 번 다 서부가 망할 뻔했수다.”
렘이 말했다. 지나간 얘기다.
“보라마인이 그중 하나였수. 주술적으로 보자면 우스운 이름에는 힘이 깃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더라고.”
점쟁이 부족이 부린 저주의 이름이 보라마인의 저주였던가?
엔크리드는 렘의 눈에 어린 어떤 열기를 보았다.
저 마경을 끝내겠다는 그런 의지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는 사람이나 가족이 당했냐?”
보라마인이 출현했을 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어 가는 아버지는 말했을 테지.
도망가라, 싸우지 마라, 마경은 놔둬라.
서부 대륙에 사는 이들은 마경을 어찌하지 않을 것이다. 건드리면 남는 건 죽음뿐이니.
그게 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 것이고.
아버지의 원수, 가족의 원수, 그런 건가.
렘은 무슨 소리냐며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뭐라는 거요? 그냥 이웃으로 두기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건데.”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게 전부?”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이웃치고는 좀 멀리 떨어져 사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뭐 렘다운 답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엔크리드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대로 돌진하자고 온 건 아니니까 참으쇼.”
“뭘?”
“돌진하려는 거 아니었수?”
“내가?”
“응.”
“왜?”
“거, 마경이나 마물만 보면 눈깔이 좀 돌아가잖수. 저 프록이 사교도 보면 그러는 것처럼.”
“내가?”
“응.”
미친놈 보듯 하는 렘의 눈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돌진하면 자살 행위요. 정신 차리쇼. 씹, 안 되면 힘으로 말려야 한다. 아율 준비해.”
렘은 진지했고 엔크리드는 절로 욕이 나왔다.
“이 개새…….”
“개죽음이오! 정신 차리쇼.”
엔크리드는 참지 못하고 아케르를 휘둘렀다.
마경이니 불가침 영역이니 하는 곳에서 둘은 한동안 드잡이질을 했다. 그래도 진지하게는 안 했다.
대련은 엔크리드가 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후려갈기고서야 멈췄다.
주술도 안 받고 덤볐으니 엔크리드가 우위였다.
둘은 땀을 흘린 채로 갑자기 낄낄 웃었다.
둘 다 작정하고 한 농담이었다.
마경 따위는 지워 버릴 건데, 당장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는 일이란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여간 미친 새끼들이었다.
“어쨌든 여기엔 다음에 또 올 거요.”
“어, 그때 적당히 처리해서 치우자.”
“그럽시다.”
둘은 일어났고 아율은 서방을 세심히 살폈다. 아무래도 머리통에 병이 든 것 같았다.
마경 보고 뭘 치우느니 마느니 하고, 웃긴 왜 또 웃는 건가 싶어서.
주올은 그냥 가슴이 뛰었다.
이들이 보여 준 포부가 너무 말도 안 돼서.
근데 심장은 세차게도 뛰었다.
기대감이 치솟았다. 새삼 엔크리드란 명예 용사 옆에 사람들이 잔뜩 모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싸움을 잘하는 거?
그런 사람은 많았다. 렘도 있고 과거 서부에는 용사도 있었다.
잘생긴 거?
그것도 아니다.
‘꿈.’
포부가 다르고 꿈을 좇는 방식이 다르다. 즉,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눈이 부셨다.
그런 사람이니 자연히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거였다.
그게 주올에게 어떤 감동을 줬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울었고.
“무서우면 오줌을 싸, 그게 낫지. 왜 우냐.”
렘이 핀잔을 줬다.
주올은 울다가 웃어 버렸다.
이들이 말하는 것이 정말로 이뤄진 일 같아서 그랬다.
“병이 옮았나.”
렘은 걱정을 담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