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ternally Regressing Knight Chapter 490

490
렘은 여전히 설명을 잘 못했으나 전보다는 나아졌고, 그걸 들은 아율과 주올이 감탄했다.

“어디서 말 잘하는 재주를 익혀 왔구나, 그거로 다른 여자를 꼬드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대륙에서 무슨 웅변 아카데미 같은 곳에라도 들어갔다 온 거냐?”

엔크리드는 감탄하는 둘의 모습이 이해되면서도 거부감이 들었다.

렘은 어떻게 봐도 좋은 화자는 아니었으니까.

중간중간 하는 말을 듣자면, 이 새끼가 음유시인을 했다면 여럿에게 답답증이란 병을 줬을 것 같았다.

“그리메의 길이라는 게 뭐냐면, 그리메란 사람이 있었수. 그 사람이 걸은 길이유. 그 길은 또 뭐냐면 그리메의 일대기를 말하는 건데 자, 여기까지 이해했수?”

물론 듣는 사람이 뛰어나면 상관없는 문제였다. 엔크리드는 언제나 그렇듯 좋은 청자였다. 집중해서 들었고 호응도 해 줬다.

그로 인해 렘은 더 열심히 말했다.

중복되는 걸 제하고 쓸데없이 되묻는 걸 제해서 내용만 추리는 건 엔크리드의 장기였다.

그는 그렇게 했다.

서부의 옛 영웅 중 그리메란 사람이 있었는데 순례길 비슷한 걸 했단다.

순례길이 종교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차례로 방문하는 거라면, 그리메란 사람이 한 건 사냥길이라고 명명해야 해야 맞을 테지만.

죽일 만한, 죽여야 할 것들만 있는 곳을 골라서 차례로 방문했으니까.

그는 그렇게 제 길을 걸었고, 서부를 여행하며 눈에 보이는 마물이나 마수, 괴물을 죄다 죽이고 다녔다.

사냥에 환장한, 주술로 그림자를 다루는 영웅의 일대기였다.

신화와 전설의 중간쯤에 걸린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식인 나무 괴물의 몸에 주술로 불을 붙여 죽인 일.

호수에 살던 수십 개의 촉수를 부리던 마물의 약점을 찾아 찔러 죽인 일.

투명 두건을 지닌 도적을 죽인 일화 등등.

그중에 몇 개는 뭔가 말이 안 되기도 하는, 옛이야기가 그렇듯 적당히 각색된 그런 구전 설화였다.

그와 관련해서 한때 서부에서는 그리메의 길이란 성인식이 있었다.

다른 건 아니다. 그가 걸었던 길 일부를 재현해서 걷는 거였다.

“진짜 그리메의 길을 걸어 보잔 거지.”

성인식이라 하지만, 그리메란 영웅이 갔던 길을 그대로 가면 성인식이 아니라 자살식이다.

이제 막 열다섯 먹은 애를 마물이 판치는 길에 혼자 보낸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보다 열화된 일정과 경로로 움직이는 건데, 지금 렘이 말하는 건 진짜 그리메의 길이었다.

그러니까 그 영웅이 정말 움직였던 경로다.

그렇다고 그 길을 전부 답습하자는 건 아니었다.

그럼 정말 몇 년을 돌아다녀야 할 테니까.

렘이 말하는 건 영웅 그리메의 마지막 길이었다. 들어 보니 또 무슨 영웅을 기리자는 건 아니었다.

“딱 구경하기 좋은 게 몰려 있어서.”

단순한 의도였다. 엔크리드가 보기에는 뭘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어서 그런 거로 보였다.

렘의 등에 묵직한 배낭이 보였다. 주올도 아율도 전부 묵직한 배낭을 멘 채였다.

“짐을 챙기라고 했어야지.”

“짐은 무슨, 준비는 우리다 다 했다. 소풍이나 가자는 거다.”

아율이 툭 내뱉듯 말했다.

그리메의 길을 소풍이라 부를 수 있나?

듣던 서부인들이 눈을 깜빡였다.

반쯤 미친 소리로 들리는 게 정상이지만, 이들이라면 소풍이 맞긴 했다.

신화시대처럼 말도 안 되는 괴물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작된 여행이었다.

“갑시다.”

“그러자.”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갈아입을 옷, 선물 받은 것들만 챙기고 움직였다.

“한 달? 좋네.”

그동안 사흘에 한 번은 씻는 게 불만이었던 수인이 가장 여행을 반겼다.

이제 자주 씻으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언제나 엔크리드만 보던 프록이 뒤에 붙었고.

엔크리드, 렘, 둔바켈, 루아가르네, 아율, 주올. 여섯이 함께였다.

“같이 가고 싶지만, 몸도 회복해야 하고 점쟁이 부족이나 남은 식인종 놈들도 처리해야 하니. 내가 함께 가지 못한다고 아쉬워하지 말아라.”

떠나는 중에 검나래가 말했다.

서부식 농담이었다.

“되게 아쉽네.”

엔크리드가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하게 답하니, 검나래가 피식 웃었다.

농담을 건네는 맛이 있는 놈이었다.

대화를 끝내고 주섬주섬 무장만 챙겨 나온 뒤다.

“맏이 주술사란 작자는?”

엔크리드가 타박타박 걸으며 물으니 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겔겔대고 있수다. 회복하고 뭐 준비한다고 하면 한 달도 짧지, 그것도 빠른 거요. 아, 맏이 주술사가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합디다.”

“별거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렘은 그런 엔크리드를 보며 참 신기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실력도, 의지도 평범함의 궤를 벗어났다.

비범함이란 무엇인가, 보통 수준보다 뛰어남을 말할 것이다.

렘이 본 사람 중 가장 비범하며 탁월한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갑시다.”

렘이 어깨동무를 해 왔다.

“안 불편하냐?”

“이제 좀 컸다 이거요?”

키는 본래 엔크리드가 더 컸다.

작은놈이 배낭까지 메고 손을 올리는 게 힘들어 보여서 한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내려다보고 렘은 올려다봤다.

“이따 대련이나 한판 합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가면서 주올에게 들어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는 집단 유목 생활을 한다고 했다.

전사를 잃은 작은 부족에게 알아서 살라고 내보내는 건 다 죽으란 소리였다.

그러니 책임지고 사람을 돌보겠단 거였다.

풍족하지 않은 삶이 익숙하지만, 올해는 대륙에서 온 마경성지교의 사도 새끼가 깽판을 치는 바람에 더 배를 곯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좀 곤란할 것도 같았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떠나기 전, 발 빠른 서부인 몇 명에게 이쪽으로 들어오는 상인을 통해서 편지를 전해 주라고 했다.

여전히 별 건 아니었다.

왕에게 한 통, 보더 가드에 한 통이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서부에 왔는데 남는 빵이나 있으면 보내라고 썼다.

정말로 빵을 보내면 다 썩어서 올 테지만, 크랑이나 크라이스나 둘 다 영리한 인간들이니, 알아서 할 것이다.

대륙은 곧 우기다. 보름쯤 지나면 보더 가드 쪽에도 비가 내릴 시기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고 볼을 스쳐 갔다.

옆에 아율이 붙어 걸었고,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물었다.

“렘이 따라온다던데.”

“알아.”

“같이 오나?”

“내가 왜?”

렘을 따라오나 싶어 물었는데, 렘이나 아율이나 반응이 비슷했다.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그런 태도였다.

“여기 남는다고?”

“남지.”

긴 지팡이를 들고 있던 아율은 바닥을 툭툭 짚으며 이어 말했다.

“아이가 생겼다.”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한 말이었다. 엔크리드조차 잠깐이지만, 말문이 막혔다가 되물었다.

“뭐?”

그러다 곧 이런저런 의문이 생겼는데 우습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이거였다.

아이가 생기는 건 그렇다 치고, 그걸 어떻게 벌써 알지?

“주술을 다루는 사람은 제 안에 새로운 생명이 생기는 걸 민감하게 알아.”

서부, 또 주술사들은 그렇다고 한단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에 렘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남겼다.

서부에서는 아이를 가졌다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냥 할 일 다 하다가 나중에 몸이 무거워지면 쉬는 시간을 더 갖는 게 전부지.

아율도 그렇게 할 터였다.

그녀는 말하며 활짝 웃었다. 서부인다운 해맑은 미소였다.

“난 부족을 위해 일하고 이들을 지키고 아이를 키울 것이다. 이 땅을 사랑하기에 떠나고 싶지 않다.”

아율이 제 배 위로 손을 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아이는 지킬 것이다. 그만큼 강한 여자니까.

얼굴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지금 그녀가 아름다워 보였다.

이성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다.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렘이 없어도 되나?”

“서운하지만, 괜찮다. 영영 떠날 것도 아니고. 그 자식도 제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할 테니까. 껍질만 남아서 옆에서 앵앵거릴 사내새끼는 나도 필요 없어.”

그래 보였다.

어지간한 남자는 아율의 팔뚝보다 두꺼운 팔뚝을 갖지 못할 테니.

건강미만 따지자면 테레사나 둔바켈을 씹어먹는 건강 미인이었다.

속도 넓고 이해심도 깊었다.

렘이 괜히 반한 게 아닐 터였다.

아까부터 귀 기울여 듣던 렘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렇게 됐수다. 근데 내가 왜 여기 남을 거라고 생각한 거요?”

엔크리드는 이런 분야로는 렘 새끼의 눈치가 둔바켈 급이라 생각했다.

“아이, 아내, 서부, 남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냐?”

엔크리드가 조용히 다독여 보냈으나 아율도 들을 건 다 들었다.

“미친 서방아, 그럼 떠나는 게 정상이냐?”

흔쾌히 보내 주지만, 그 안에 애정 어린 욕설이 섞이긴 했다.

여행길은 시작부터 시끌시끌했다.

그게 나쁘진 않았다.

주올이 그걸 보며 허허 웃고는 손짓으로 벨롭터를 불렀다. 일행 여섯에 벨롭터 여섯 마리가 여행길 동무였다.

엔크리드가 탈 놈은 머리 위로 불꽃 모양의 빨간 비늘이 있는, 전체적으로 갈색빛이 도는 놈이었다.

보고 있자니 괜히 짝눈이가 떠올랐다.

짝눈이의 등을 타고 달릴 때면 어떤 쾌감 같은 걸 느끼곤 했다.

언제고 그놈 위에서 돌격할 일도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벨롭터를 타고 움직였다. 기본적으로 길을 나서고 움직이는 모든 일 중 딱히 어려울 일은 없었다.

“도와줘요.”

중간에 마물 카피캣이 나오자.

“처리하고 오겠다.”

주올이 나서서 돌멩이 몇 개로 쫓아냈다.

“여기서 죽이면 피 냄새 때문에 다른 놈들이 꼬인다.”

죽이는 대신 쫓는 이유가 명확했다.

즉, 능숙한 사냥꾼이 함께였고.

“랫맨 무리네. 다녀오겠수다.”

피할 수 없는 무리가 다가오면 렘이든 누구든 나가서 슥삭 처리했다.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통을 쪼개고, 호쾌한 발길질로 바로 뒤에 선 또 다른 마물의 머리통을 부수는 걸 보면 마물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은 물가로 움직여야겠다.”

대부분 황무지였으나, 중간중간 작은 호수도 있고 호수 근처로 가다 보면 드문드문 초지도 보였다.

서부 여행길은 초원도 아니고 황무지도 아닌 땅이 태반이었다.

벨롭터는 풀도 먹고 호숫가에서 물도 마시고 말린 생선도 먹었다.

뭐든 잘 먹는데 특히나 생선을 좋아하긴 했다.

그르륵.

먹이를 주자 귀엽게 머리를 대고 비비는 걸 보면 없던 정도 생길 듯했다.

피가 차가워서 그런지, 비늘은 은근히 시원했다. 그렇다고 막 차가워서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밤이 되고 모닥불을 피운 뒤다.

둔바켈이 수인 특유의 사냥 본능으로 토끼 하나와 두더지를 잡아 왔다.

“훌륭하군.”

감탄한 주올이 요리를 자처했다. 서부에서 사냥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둔바켈은 이걸 또 아무렇지 않게 해낸 거였다.

주올이 요리를 시작하자, 아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 아내지만, 요리한다고 하면 말려야 하는 걸 잊지 마쇼.”

렘이 한껏 목소리를 죽여서 한 말이다. 아율도 제 손재주에 자신이 없는지 나서진 않았다.

주올은 렘보다도 요리 솜씨가 좋았다. 물가를 찾아 토끼와 두더지의 핏물과 내장을 제거하고 적당히 손질한 뒤에 그대로 스튜를 끓였다.

보글보글 끓어 대는 스튜가 풍기는 향이 잊은 허기를 불러왔다.

맛? 고소하고 담백했다. 특히나 소금이나 허브 가루를 넣어 만든 감칠맛에는 절로 엄지가 들렸다.

“서부 제일은 아니지만, 요리하는 데는 자신 있는 편이지.”

들어 보니 주올은 집단 부락 생활을 할 때 요리를 전담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싸움도 곧잘 하고 사냥도 곧잘 해서 이렇게 나서는 일이 많은 거였다.

주올은 평생 음식이나 만들며 누가 먹는 걸 구경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그럼 이번에는 왜 따라왔나?”

“부족을 구한 영웅에게 만들어 줄 기회인데 놓칠 순 없지.”

물으니 나오는 말이다.

대답이 참으로 유쾌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식기를 씻는 것도 주올이 앞장섰다.

“모두 은인이다. 잡일을 맡기고 싶진 않아.”

여행길이 한 달은 걸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까지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할 참인 것 같았다.

그리 잘 먹고 나서다. 배도 꺼트릴 겸 검을 들고 서니, 반대쪽에 렘이 섰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부서진 사암이 먼지처럼 변해 눈가를 괴롭혔다.

엔크리드도 렘도 눈을 찌푸렸다. 먼지에 눈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한판 합시다.”

“아내 앞에서 맞아도 되나?”

렘이 낄낄 웃었다.

하여간 말은 참 잘해.

“그, 재미를 더하고 싶어서 준비한 게 있수다.”

이곳은 서부다. 렘은 서부인이고.

자신의 내림 무기나 주술은 성지에 들어가 찾아와야 했지만, 편법도 존재했다.

이미 대륙에서 불노의 광인과 싸우는 동안 새로이 깨달은 것도 있었고.

“아율.”

며칠 연습함으로 준비도 했다.

아율도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해 보니까 딱히 문제도 없고 부작용도 없어서 이걸 연구할 생각도 있었다.

렘은 그사이 부족민에게 괴력의 심장을 쓰는 법도 새로 전해 줬다.

개량형이라고 해야 할까?

엔크리드가 쓰는 걸 보며 자신의 깨달음을 섞었다.

이제 서부인 태반은 다 쓸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아율의 주술을 몸으로 받아 낼 순간이었다.

“곰의 힘아.”

아율이 말했다. 그 말과 함께다. 무형의 어떤 것이 렘에게 깃들었다.

엔크리드는 마주한 렘의 어깨 위로 뭔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저건 또 뭐냐?

일전에 아율이 싸울 때 그녀의 몸 위에서 겹쳐 보였던 것과 비슷했다.

렘의 회색 눈에 안에 광휘가 엿보였다.

엔크리드는 아케르를 고쳐잡았다.

곧 도끼가 날아왔다.

기사의 일격 비슷한 수준의 참격이었다.

엔크리드는 순간적으로 아케르를 땅과 수평이 되도록 들었다. 그 위로 도끼날이 떨어져 두 개의 무기가 만났다.

쩡!

굉음이 터졌다.

반탄력이 일어나 엔크리드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엔크리드는 그 힘에 몸을 맡겨 뒤로 물러났다. 츠즈즈즈즈 하고 발바닥이 땅 위에 긴 자국을 만들었다.

렘은 도끼를 휘두른 자세에서 입술만 비틀어 올리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떠쇼?”

말해 뭐하랴.

엔크리드도 웃었다.

Join our Discord for the latest updates and novel requests - Click here!

Comment

0 0 votes
Article Rating
Subscribe
Notify of
guest
0 Comments
Oldest
Newest Most Voted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