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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ly Regressing Knight Chapter 489

489
“제 어머니가 제 고추를 떼려고 하더군요. 딸이 있었다면 명예 용사와 엮어 보려 했다고.”

얼굴에 나뭇잎 문양을 한 서부인이 당당히도 하는 말이다.

저주에 당했다가 일어나자마자 딸을 준다고 농담했던 그 아낙이 이자의 어머니였다.

딸이 없으니 아들의 그것을 떼려 했다는 말을 우습게 하니,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엔크리드도 생각지 못한 타이밍의 농담에 피식 웃었다.

딱히 누굴 웃기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남자는 계속 말했다.

“럭키 피쉬는 독특한 냄새가 나는데 이 냄새를 좋아하는 벨롭터 종이 있습니다. 가끔 실종되거나 없어지면 이 냄새를 통해서 추적하기도 하고 그런 용도로도 쓰는 그런 겁니다.”

지금 준 말린 생선 이름이 럭키 피쉬였다.

이건 먹는 것도 먹는 건데, 진짜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먹지 않는 보존 식량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행운의 부적 같은 거였다. 기묘하게 생긴 돌을 행운석이라며 들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 것 같으나 서부에는 왜 행운어라 부르는지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에는 사냥하다가 실종된 사람이 많았죠. 그럼 시체를 찾기도 어려우나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면 하늘신의 곁에 갈 수 없으니, 시체를 찾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때 이 행운어의 냄새로 시신을 찾곤 했다는 거다.

요즘에는 실종 같은 일이 흔치 않긴 했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 보니 힘들어서 일부가 모여 살게 되고, 그들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끼리 부족을 이루어 집단이 된 거다.

서부 민족의 시작이다.

신화가 아닌 인류학자 관점에서 볼 때의 시작.

“선물입니다.”

말하며 다시 해맑게 웃는다.

그 웃음에선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줄 수 있다는 기쁨, 선물을 건네기에 행복한 그런 미소다.

엔크리드는 천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둔바켈이 옆에서 한 점 얻어먹곤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단다.

“수인의 입에도 잘 맞습니까?”

남자가 말하고 파하하 웃었다.

그늘, 어둠이 사라진 웃음이었다.

이 남자뿐이 아니다. 다들 웃음에서 그늘이 사라졌다.

처음 왔을 때 보였던 까만 그을음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외에는 모두의 웃음 뒤에 숨겨진 어둠, 그딴 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엔크리드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절로 도시 오아라가 떠올랐다.

그 위에 쓰인 이야기를 생각했다.

아이가 웃는 도시, 먹구름이 걷힌 햇살처럼 그리 살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다시 지금을 보았다.

사람, 아이들, 웃음, 선물, 행복한 그런 순간이다.

눈으로 지금을 보는 동안 머릿속에선 과거가 지나쳐 갔다.

“검을 드는 이유는 뭐냐?”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멍청한 짓이다.”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비난하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 타이르는 사람, 말리는 사람, 비웃는 사람.

많은 사람이 있었다.

사공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게 좋았다.

누군가 지금까지 꿈을 잃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엔크리드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람들 웃는 게 보기 좋아서.”

지금은 그 외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름이 햇살을 덮어 은은하게 빛을 뿌렸다. 햇살막이 구름이었다.

밝고 따뜻하지만, 눈부시지 않은 햇살.

비가 자주 오지 않고 구름이 넓게 퍼지며 흘러가는 서부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이라.

안온하게 모두를 감싸는 햇살 아래 엔크리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검으로 지킨 것들을.

* * *

훈련 방식을 배우는 이들.

대련하자고 덤비는 이들.

그사이 제 훈련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다가 저녁이 됐다.

저녁으로는 푹 삶은 소고기를 먹었는데, 단단한 무를 넣어 끓인 스튜는 무척 맛있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저녁에 렘이 찾아왔다.

“거, 한 달은 넘게 있어야 한다는데.”

엔크리드는 막 씻고 몸을 말린 후에 지바의 어미가 준 얇은 옷을 입는 중이었다.

까슬까슬하지만 따갑진 않은 감촉의 가죽옷이었다.

서부에도 철을 다루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철은 귀한 물건이었다.

대장간이나 장인의 숫자가 무척 적은 탓이었다.

철을 캐내는 산지도 없어, 서부 밖으로 나가서 구해야 했다.

대신 가죽이나 털로 뭘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무두질 방식이 궁금할 정도였다.

얇게 펴고 약물을 발라 만든 가죽옷은 대륙의 상인이 서부를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뼈를 갈아서 만드는 뼈 칼도 잘 만들었고, 흑요석 창 같은 것도 잘 만들었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서부에서도 귀한 옷을 입으며 되물었다. 이런 가죽은 가공 방식부터 다르다고 하던가?

“기다려야 한다니까?”

렘이 다시 말했다.

엔크리드는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어 내며 도로 답했다.

“응, 그래서?”

“같이 가야지.”

“어딜?”

렘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 작자는 술에 취하지도 않으면서 가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곤 했다. 이럴 때면 정신 차리게 말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어디겠수?”

렘이 턱짓과 함께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돌아가는 길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왜?”

엔크리드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이대로 여기에 남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 알콩달콩 밤마다 아율이랑 뒹굴면서? 어딜 간다는 건가? 검나래의 말에 따르자면, 그동안 못 한 걸 몰아서 한다던데?

“나 길치 새끼 패야 하는데?”

어, 이걸 들으니 곧바로 이해가 됐다.

맞고는 못 사니, 맞은 만큼 갚아 주겠다는 거다.

그런데 주술을 찾는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될까? 라그나는 기사가 됐는데?

“그 눈깔에 뭔가 불신이 가득한데?”

“아니다.”

“아닌 게 아닌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허약해졌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도끼로 해라.”

“……잠이나 처자쇼.”

엔크리드도 말을 돌리는 게 더는 할 말도 없어 보였기에, 렘도 시큰둥하니 말하고 말았다.

헛소리 집어치우란 뜻이었다.

엔크리드는 렘의 의도를 잘 알았기에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어떻게 봐도 쿵짝이 잘 맞는 둘이긴 했다.

“시간이 남는다니까 내일 여행이나 갑시다.”

엔크리드에게는 서부로 온 게 여행이었으나 렘에게는 아니었다.

서부에서도 보여 줄 게 꽤 많았다.

이미 아율이 보여 준 곳들도 있어서 억울했으나, 아직 남은 곳이 있다.

꽃을 꺾으며 이것저것 한다고 바쁘지만 않았다면 아율이 안내했던 곳도 다 자신이 알려 줬을 테지만.

화가 나는 건 아니고 조금 아쉬운 그런 일이긴 했다.

어쨌든 자신이 데려온 사람 아닌가.

“그래.”

엔크리드가 냉큼 답했다.

“내일 봅시다.”

렘이 돌아가고 다들 잠이 들었다. 엔크리드도 푹 잤다.

꿈도 안 꾸는 숙면이었다.

그렇게 잘 자고 일어나 고립의 기법으로 몸 단련하고, 아침부터 대련을 요청하는 쌍둥이도 두들겨 패 줬다.

“타격법 하면.”

“조금 더 강해지지 않을까?”

맞은 쌍둥이가 번갈아 가며 말했다. 쌍둥이라서 가끔 저런 말투를 보였는데 오래된 버릇 같았다. 그런 둘을 보며 엔크리드가 응원의 말을 건넸다.

“해 봐라.”

그 외에 기술을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단련하는 방식을 묻는 이들도 있었다.

서부인 중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향상심에 몸을 맡기는 이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이들도 여럿이었다.

엔크리드는 아낌없이 가르쳤다.

솔직히 렘이나 다른 이들과 비교하자면 무척 훌륭한 선생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한 얘기였다.

재능이 부족해 하나하나 자근자근 밟고 꼭꼭 씹어 가며 올라선 길이다.

재능이 있는 자는 있는 자에 맞게.

없는 사람에게는 거기에 맞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거다.

산 위에 오르지 않으면 오른 뒤의 광경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오를 때 단숨에 뛰어올랐다면 주변 풍광을 볼 수 없는 법이었는데.

엔크리드는 둘 다 했다.

자근자근 하나하나 꼭꼭 밟고 씹으며 올라섰다.

그러니 잘 가르치는 게 당연했다.

다만.

“체력을 먼저 기르는 게 좋겠다. 뛰어,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도끼를 휘두르는 척하다가 상대 발을 걸려고 하는 거지? 정확한 자세와 기본기 단련, 새벽에 일어나서 정오까지는 그렇게 해라.”

그렇다고 부드러운 선생이란 건 아니었다. 원하는 걸 하려면 노력은 당연했다.

엔크리드는 이런 면에서 타협이 없었다.

하기 싫으면 관두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관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엔크리드를 원망하거나 탓하는 건 아니었다.

관둔 후에도 근처에서 기웃거리며 고기를 굽거나 스튜를 끓이기도 하고 놀기도 했다.

서부인은 가죽에 나무판을 덧댄 스무 장의 카드를 만들어서 놀았는데, 각각 동물과 꽃 모양 등을 그린 거였다.

“박투라는 놀이죠.”

크로나를 걸고 내기도 하는 거였다.

여기서도 당연히 크로나를 쓰긴 했다. 그보단 물물교환이 활발하긴 했지만, 크로나 대신 좋은 가죽이나 마수의 이빨을 내미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이빨로 엮어 만든 목걸이도 있었다.

대륙에서는 야만인이니 개화가 필요하다느니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문화가 있었고 그건 존중받아 마땅한 거였다.

엔크리드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래서 불편하려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은 검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사람을 지킬 수도 있고 마물을 벨 수도 있고 전쟁에 나설 수도 있지만, 문화나 정치는 제 일이 아니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고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그냥 잘되길 바랄 뿐이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아침 해를 맞으며 렘이 왔다.

“뭐 하쇼?”

“그냥 구경.”

아율, 주올도 함께였다.

“루아가르네랑 냄새도 같이 갈 거냐?”

렘이 엔크리드의 뒤에 대고 물었다.

작은 바위 하나를 의자 삼아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던 둔바켈이 고개를 들었다.

냄새가 자기를 부르는 것임을 단숨에 알아듣는 걸 보면, 둔바켈이 눈치가 없는 건 필요할 때만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딜?”

“대장이랑 어디 좀 갈 거다.”

“난 같이 간다.”

옆에서 듣던 루아가르네가 끼어들어 답했다.

서부인도 재밌고 이런저런 흥미를 불러오는 것들도 있지만, 그녀의 욕망을 가장 크게 건드리는 건 무엇인가? 당연히도 엔크리드란 인간이었다.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주는 어떻게 막는 거지?’

원리도 이유도 모르겠다. 주술을 배워서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마법적인 도구를 지닌 것도 아니다.

저주야 그래, 뭐 알아서 막았다고 치면 그만이긴 했다. 그렇게 관심이 가는 부분도 아니었다.

그럼 검술 실력의 발전은? 그건 뭐라 설명할까?

분명 지금 보기에도 한계다. 재능의 한계, 실력의 한계, 이제부터 비약적인 발전은 어렵다. 더 힘이 세지고 단단해질 수는 있지만, 소소한 차이일 뿐일 것이다. 그게 한계란 거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도 한계였다.

그런 인간이 기사도 준기사도 아닌 그 중간, 틈에 섰다.

어떻게? 모른다.

가끔 한계를 돌파하는 행운을 갖는 사람도 있다.

프록이 가진 재능 판독의 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경우? 있다. 신의 장난이라고도 하고, 행운의 여신이 키스를 남겼다고도 했다.

‘운은 아니지.’

그런 것들도 운은 아니다. 적어도 루아가르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운이란 무엇인가?

기회다. 기회란 무엇인가. 순간이다. 그 순간, 그때, 그 시간에 찾아오는 기회를 잡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준비였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운도 의미가 없었다.

루아가르네가 보기에 엔크리드는 매일, 언제나 준비했다.

타고난 게 없다고? 그게 문제가 돼?

“기사가 될 거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말했고, 그걸 위해 나아갈 뿐이었다. 멈추지도 않고 어떤 의심도 없이.

부르르르, 루아가르네는 오늘도 전율했다. 요즘은 매일 이랬다.

엔크리드는 볼 때마다 프록의 볼을 부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런 인간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없다. 그러면 죽어라 쫓아다녀야지.

구애로 정신적 배우자가 되고 싶은 마음? 처음에는 그런 음흉한 의도도 조금 있었으나 지금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저 곁에 머물고 싶다.

저자가 나아갈 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걷는지, 걸음으로 인해 무엇이 변하는지.

‘궁금하다.’

그게 엔크리드를 볼 때마다 미지를 탐구하는 욕구가 치솟는 이유였다.

“그래.”

냄새, 둔바켈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는다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자, 그럼 갑시다. 한 달쯤 걸릴 것 같은데.”

렘이 말했다.

한 달? 좀 긴데?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물었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내가 말 안 했수?”

“안 했다.”

“아, 어제 대장이 헛소리해서 그런 거 아뇨.”

이 순간 남 탓을 할 수 있는 정신력이라니, 과연 렘이라고 해야 했다.

아율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헛소리를 지껄여도 그럴 수 있다는 고갯짓이었다.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는 따라 부른다고 하던가.

서부에는 그런 옛말도 있다고 들었다. 남 탓하는 렘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아율이나, 적당히 꼴 보기 싫은 모습이었다.

엔크리드는 설명이나 하라며 얌전히 기다렸고, 렘도 더 따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리메의 길이란 게 있수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야기, 그로 인해 생긴 어떤 전통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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