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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51

351
나는 키누안을 죽였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나 아직 실감이 가지 않았다.

난 발꿈치로 그의 머리를 찍었다. 부서지는 정수리와 으스러지는 뇌를 목도했다. 이건 환각이 아니다.

그 이후, 난 길다의 안전을 확인하고선 자리를 벗어났다. 당장 소란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귀찮으니 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의 무례를 길다에게 사과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터벅, 터벅.

골목을 걷던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사방이 건물로 막힌 골목이라 대낮인데도 바닥에 닿는 빛이 희미했다.

“하아…….”

내 코와 눈에서 피가 간헐적으로 흘렀고, 고열로 이마도 뜨겁다. 치료를 막 마친 따끈따끈한 뇌가 아니었다면, 진즉 망가졌을 것이다.

주르륵.

난 외투의 소매로 흐르는 피를 벅벅 닦아냈다.

‘키누안은 내 손에 죽었어. 끝난 거다. 쉬어도 돼, 루카.’

그러나 달아오른 감정이 쉬이 식지 않았다. 오히려 후폭풍처럼 자잘한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심지어, 그 감정의 폭풍에는 슬픔과 후회도 있었다. 키누안을 죽이지 않고 끝낼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서로에 대한 애증이 우리, 아니, 적어도 내겐 있었다.

……나도 놈에게 지독한 감정 지배를 당한 것이지. 그렇게 당하고도 키누안을 온전히 미워하고 증오할 수 없었다.

‘놈을 더 알아가는 게 두려웠어.’

키누안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깊게 알게 된다면 죽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고 더 단호하게 행동했다. 어찌 보면 무쉬르 알 카슈라를 죽일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를 죽이기 힘들어질 거란 사실이 난 두려웠던 거다.

난 나의 무른 면을 경계한다.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머저리가 되고 싶진 않다.

‘거기서 키누안을 놓쳤다면, 다신 기회가 없었을 거다.’

키누안은 ‘소중한 길다’를 납치해서라도 잠적했겠지. 그러면 영영 찾을 방도가 없다.

‘당신은 정말로 길다 때문에 그토록 발버둥 치며 살아온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듣고 싶긴 했다.

……내 안의 괴물은 사라졌다.

길다를 구하려고 키누안은 합리적 판단과 인내를 포기했다. 그 순간부터 놈은 인간으로 격하되었다.

덜그럭.

난 주머니를 뒤져서 키누안의 소지품을 꺼냈다.

‘크레딧칩과 단말기, 그리고 두툼한 수첩과 펜.’

이건 키누안의 유품이나 마찬가지다.

이제야 키누안의 죽음이 절실히 와닿는다. 난 그의 수첩만 꺼내서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날로그적이로군.’

수첩의 겉면은 손때를 탄 가죽이었고, 안쪽에 꽂힌 종이 뭉치는 테두리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키누안은 아날로그 기록을 선호했다. 생각해보면, 키누안만 그런 게 아니다.

제국은 고위층일수록 비밀이 많다. 그들은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언과 기록을 남겼다.

딸깍.

난 수첩의 단추를 열고선 첫 장을 보았다.

‘여인의 사진?’

사진 한 장이 바짝 붙어있었다. 산화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막을 입혔는지 겉면이 매끈했다.

사진의 여인은 의자에 앉은 채로 머리만 살짝 돌려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길다를 닮았어.’

사진의 여인과 길다는 혈연관계일 것이다.

난 사진 밑에서부터 옆으로 쭉 이어지는 글자를 읽어나갔다. 잉크의 농도와 색을 보니 한 번에 쓴 게 아니라 시기가 각각 달랐다. 중간에 추가로 삽입했는지 색이 많이 다른 종이도 있었다.

-너의 빛, 아르테를 잊지 마라.

-넌 이 여자를 사랑했다.

-모든 걸 잊더라도, 이 기억만큼은 지켜야 한다.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아르테는 키누안의 연인이었는 듯했다. 추억을 기록하듯 생각나는 대로 생일이나 첫 데이트, 함께 방문한 장소 따위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몇몇 글자는 급하게 쓴 듯이 휘갈긴 모양새였다. 뒤로 갈수록 구체적이기보단 추상적이었다.

-난, 아직도, 왜?

이 의문에는 빗금이 있었다. 그 밑으론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이건 글자뿐인 추억이다.

-기억나지 않는데 왜 지켜야 하지?

글자에서도 떨림이 보였다. 키누안의 인간적 고뇌가 보였다.

-아니, 기억과 감정조차 잊었더라도 지켜야 한다. 내 삶의 증거니까.

-감정을 형성할 기억조차 잊었다면, 기억을 재입력하고 감정도 다시 만들어내면 된다.

난 눈을 나직이 찌푸렸다.

수첩의 내용이 기괴해지고 있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부작용으로 키누안에겐 가장 먼저 기억의 소실이 일어난 듯했다.

-나는 아르테를 사랑한다. 그녀를 향한 감정은 헌신적인 사랑이다. 더는 생각하지 마라. 이거면 충분해. 우린 아르테에게 헌신한다.

‘우리’라는 말이 나왔다. 아마 키누안의 자아 동일성이 흐려지는 시기였던 모양이다.

난 진가우의 말을 떠올렸다. 급격한 뇌 재생의 부작용이다.

‘여기서부터 키누안은 뇌 재생에 손을 댄 거다.’

수첩을 넘기다 보니 사진이 하나 더 나왔다. 가계도를 보니 아르테의 딸, 그웬돌린이었다.

-아르테가 내게 딸을 부탁했다.

그웬돌린에 대한 메모가 이어지다가, 의문이 문득 나왔다.

-잠깐, 내가 아르테와 이후에 만났다고? 아르테를 만난 적이 있다면 꼼꼼히 적어뒀을 텐데?

여긴 빗금이다. 그웬돌린의 성장에 대한 기록이 나왔다.

-갈수록 그웬돌린은 아르테를 닮아간다. 남편을 닮지 않아 다행이로군.

나는 흐르는 글씨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키누안은 본인조차 수첩의 기록을 믿지 못하고 의문을 달곤 했다.

-부탁하지 않았어도, 아르테의 딸이라면 지킬 가치가 있지. 아르테를 향한 헌신은 우리의 명제다.

-그웬돌린은 사치를 좋아한다. 벌써 부모의 유산을 다 써가고 있다.

-돈이 더 필요하다. 하층 구역에서 추적당하지 않는 재산을 형성하자.

키누안의 행적이 보인다.

스스스스.

고요하던 내 머릿속도 사납게 날뛰려고 했다.

-이번 기록은 찢어서 지우지 마! 아르테의 남편을 죽인 건 나다! 아니, 우리지! 헌신이라 말한 이유가 있었어. 질투라는 감정은 다음 형성에서 배제해. 똑같은 실수는 하지 마.

역시 키누안은 영리했다. 과거의 자신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삭제한 걸 알아채곤 극렬하게 경고했다.

‘키누안은 질투에 미쳐서 아르테의 남편은 죽였어. 아마 아르테도 키누안의 손에…….’

아르테는 죽어가면서 딸 그웬돌린을 키누안에게 부탁한 것이다.

‘키누안은 아르테의 부탁만 기록에 남기고 자신의 죄악을 삭제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키누안은 자신이 아르테를 죽였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

-헌신이라고 앞에 강조한 이유가 있었어. 그때 아르테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우린 안 거야. 질투로 사고를 치지 말라는 뜻이었지.

-우린 미쳤다. 이걸 읽거든 당장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 뒈져버리라고.

-웃기지 마. 기록을 남기기 전에 네가 죽으면 됐잖아. 너도 죽기 싫었으면서 왜 내게 죽으라고 하는 거지?

-우리가 자살하지 않은 건 그웬돌린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 안하무인 성격으론 혼자서 살아남기 힘들어. 그웬돌린에겐 내가 필요해.

-같은 실수는 없을 거야. 중요, 그웬돌린을 내 딸이라고 생각하고 지켜내. 딸을 향한 감정을 형성하면 질투가 덜하겠지.

-그웬돌린은 누구의 씨인지 모를 아이를 임신했다. 낙태할 것 같군. 하지만 배 속의 아이는 아르테의 핏줄이다. 반드시 지켜야 해.

-내가 그웬돌린을 죽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아르테의 손녀이자, 그웬돌린의 딸 ‘길다’를 지켜. 이번엔 실패하지 마, 제발, 부탁이다. 정신 바짝 차려. 신중해져라, 키누안.

길다가 핏덩이였던 시절의 사진이 나왔다. 그 밑엔 꾹꾹 눌러쓴 글씨로 다짐하는 내용이 있었다.

-우린 이렇게 불안정해선 안 돼. 기억과 감정을 일관성 있게 수복할 방법을 찾아내라. 그 전까진 길다에게 최소한의 간섭만 해. 우린 예측불허한 존재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길다가 소중하다면 멀리서 지켜.

난 눈을 감고선 수첩을 잠시 덮었다.

“……미쳤군. 이딴 정신 상태로 그간 살아간 거라고?”

아무리 아키에스 빅티마를 통한 정보 흡수와 기억 추론, 자아 재형성이 빨랐더라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르테를 향한 집착은 키누안의 중심을 잡아줄 닻이야. 하나의 개체로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아르테에게 집착한 거다.’

난 수첩을 다시 펼쳤다.

히드라 약물의 사용량과 혼합할 제제의 수치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 적정 수치를 찾기 위해 많은 인체실험을 한 듯했다.

‘기록해야 할 정보가 과다해. 아날로그 기록만으로 한계가 왔겠지.’

수첩 중간중간에는 칩이 있었다. 난 조심스레 키누안의 단말기를 꺼내서 칩을 꽂아 넣었다.

삑.

연도별로 사소한 사건과 인물의 세부적인 내역이 주르륵 나왔다.

‘해킹당해도 괜찮을 정도의 중요치 않은 기록은 디지털로.’

그리고 타인에게 결코 들켜선 안 될 기록은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선대 황제 유리 크라치아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황제에 대해서는 아르테만큼이나 중간에 삽입된 종이가 많았다.

-유리 크라치아와 나의 우정은 깊다. 유리에게는 지엽적인 기억의 소실이 드문드문 있다고 이야기해라. 기억의 전손도 일어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감추려면 진실도 섞어서 말해야 한다.

-중요, 제국이 보관하는 아케인 유물 중에 정신전이기라는 게 있다. 아직 연구 단계다. 유리는 날 위해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요, 자아 재형성에 필요한 지식과 기억의 양이 터무니없이 방대함. 부분적인 기억의 소실도 잦다.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지니 사람을 만나는 일을 줄이고, 중요 기록은 매일 반복해서 습득해라.

절망에 찬 기록이 이어졌다.

-유리의 연구 성과를 기다리기 힘들다. 다른 방도가 필요하다. 어쩌면 날 도울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우정을 믿기엔 우리의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유리는 자식조차 도구로 쓰는 놈이다. 나도 도구에 불과하겠지. 우정이 과거엔 진실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난 황제에 대한 기록을 빠르게 넘겼다.

-중요, 우수한 적임자가 동시기에 둘이나 나타났다…….

나와 일레이의 이야기였다.

-중요, 길다에게 불운한 일이 생겼지만, 유리의 감시가 내게 붙었다. 나 혼자서 길다와 접촉할 순 없어.

-역할은 ‘일레이’가 더 잘 수행하겠지만, 길다를 지키기 위해선 ‘루카’가 낫다. 최대한 빨리 하층 구역으로 데려가서 루카와 길다를 엮어라. 기억해, 과정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날 지켜보는 이가 많다.

-근위대장 헤일라스가 루카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혼란을 저 소년에게 집약하자. 그럼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겠지.

나에 대한 기록과 계획은 굉장히 상세했다. 나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의 관계를 촘촘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밀봉한 흔적도 있었다.

-폭풍기 이전까지, 루카에 대한 이전 기록은 열람 금지다. 불필요한 정보는 다음 감정 형성에 방해가 된다.

-중요, 루카에 대한 감정 형성,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듯.

내 아키에스 빅티마가 상위 수준에 이르자마자 경계하고선 만든 지침이었다. 때가 오기 전까진, 날 정말 소중한 제자처럼 여긴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듯.’

그 문구에서 내 시선이 멈췄다. 이러니 나도 지금까지 헷갈린 것이지.

“하하…….”

감정 형성 지침은 각 인물마다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라는 말은 내게만 쓰고 있었다.

‘제자도 아니고 아들처럼이라니…….’

헛웃음이 멈추지 않고 목구멍을 긁으면서 올라온다.

키누안은 아르테와 그웬돌린을 죽였다. 하나는 사랑했고, 다른 하나는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루카도 몇 번이고 죽일 뻔했지.

키누안은 소중히 여기는 걸 스스로 파괴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자아의 불안정성 때문일지, 키누안이라는 인간의 본질 때문인지는 이제 와선 알 순 없다.

‘자신의 과오와 실패를 알기에, 길다만큼은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싶었을 거야. 그러나 길다도 자신의 손으로 해할까 봐 겁났겠지.’

난 고개를 들며 허탈한 심정을 토해냈다.

“당신은 참으로 끔찍한 인간이었군요, 키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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