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
우리의 뇌는 죽음과 맞닥뜨리면, 초신성 폭발처럼 모든 잠재력을 짜내며 신경계를 태워버린다. 죽음 앞에서 부상이나 영구적 손상은 사소한 일이니까 말이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뇌 신경계를 포함한 전신에 과부하를 일으킨다.
그 과부하 덕분에 죽음, 혹은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초인적인 집중력과 힘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신경계 화학 처리를 받은 근위대원은 초인적인 집중력과 힘을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끌어내 사용한다.
‘고속 사고와 고출력 의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뇌.’
이를 기반으로, 나는 아키에스 빅티마의 추론 상태를 유지한다. 자연체 인간이라면 정신 각성제를 다량 투여해야 잠시나마 접근 가능한 영역이다.
그리고 나는 태생적 한계를 넘기 위해 개조한 뇌 신경계로 그 너머의 한계에 도전한다.
한계 너머의 한계.
과거의 나는 뇌수를 냉매로 바꿔 한계영역에 장시간 도달한 적이 있다. 보더시티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종종 비슷한 감각에 일시적으로 접근했었지.
시간을 멈춘 듯한 영역.
그때마다 깨달은 한 가지 확실한 사실.
‘한계영역에 접근할 때마다 나는 빠르게 죽어간다.’
우리가 느끼는 현실이란, 사실 우리의 뇌가 외부 신호를 해석해 창조한 것에 불과하다.
다소 철학적 담론이지만, 진짜 현실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정말로 시간이 순차적으로 흐르는 게 우리 뇌의 착각이며, 현실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는 얼어붙은 강이라면…….
시간을 멈춘 채로 세상을 인식하는 나는 찰나지만 신의 영역을 엿본 것이라는 오만을 좀 떨어봐도 되겠지.
‘신의 영역을 본 대가를 치러야겠지만.’
멈춰버린 세상은 참으로 고요했다. 찰나도 흐르지 않아 늘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적응형 에너지 방어막과 이반.’
이반이 저 앞에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두 기의 레기온은 그림자들에게 당해 대파 직전이다. 저 레기온들은 죽을 걸 알고 여기에 온 것이다. 살아서 여길 나갈 생각이 없을 터다.
그림자 중 절반은 벌써 나를 보고 있었다. 저들은 내게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날 보는 그림자들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단거리 추진력은 사족 보행 구조가 유리하다. 저 짐승 같은 면모가 저들이 뇌를 단순한 전투 연산 장치로 사용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컴퓨터칩에서 나온 명령이 그림자들을 움직이고 있다.
‘이거 곤란하군.’
……아무리 생각해도, 실낱같은 가능성만 희미한 빛무리로 이어졌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솔직히 지금의 지젤은 좋은 여자라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악녀가 됐다.
장담컨대, 나와 지젤은 엄청나게 싸워댈 거다. 내 뺨에 얼마나 피멍이 들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잡념은 집어치우고,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집중해.’
난 적응형 에너지 방어막에 대해서 경험했다. 더는 낯선 호신장치가 아니다. 작동 원리를 알면 공략도 보인다.
내 미래의 움직임이 환시처럼 이반에게 뻗어나갔다. 가장 최적화된 움직임만 제외하고선 하나씩 제거했다.
하나의 움직임만 남았다. 아직 이건 첫 동작일 뿐이다.
첫 동작 이후로 파생되는 움직임이 환시로 보인다. 여기서도 최적의 하나만 남긴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
난 멈춘 시간 속에서 최적화를 반복했다.
최적화를 거쳐 쌓고 쌓은 내 사고와 의식이 극점으로 모여들면서 미래를 관통했다. 남은 건 현실로 실현하는 것뿐이다.
나는 힘겹게 끌어 잡았던 시간을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내 몸은 정해진 미래를 따라 움직였다.
끼릭!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친 동작은 수백 번 반복한 것처럼 매끄러우며 군더더기가 없었다.
난 이반의 오른쪽 목덜미를 노렸다.
당연하게도 첫 검격은 에너지 방어막에 튕겨나갔다. 하기야 내 검속이 방어막의 반응보다 빨랐다면 진작 이반을 죽였을 것이다.
끼이잇!
난 에너지 방어막의 반발력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며 회전했다. 무리한 역가속으로 인해 내 의체와 생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두 번째 검격은 힘의 방향을 따라 이반의 왼쪽 허리를 아래에서부터 사선으로 그을 듯이 나아갔다.
기이잉!
에너지 방어막의 위치 전환은 여전히 빨랐다. 방어막은 내 두 번째 검격도 여유 있게 튕겨냈다.
난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반발력을 죽이지 않고 몸에 실었다.
내 몸은 공중에 뜬 채로 돌았다. 이때부턴 내 발도 땅에 닿지 않았다.
드득!
내 몸뚱이에서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몸이 멀리 튕겨나가지 않게 힘의 방향을 통제하며 내 공격으로 전달했다.
내 몸은 크루시스에 이끌리듯이 쉬지 않고 돌면서 튕겨나가고 또 회전했다. 그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이반의 등에서 냉매 카트리지가 튕겨 나오는 게 보였다.
이제 나의 회전은 피와 살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충격으로 뇌진탕이 일었고, 머릿속의 피도 회전 방향을 따라 급하게 쏠려서 의식이 사라졌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키이이이잉!
가속이 붙은 나는 칼날로 된 구와 같았다. 내가 이반 앞에서 회전했고, 검격은 폭풍처럼 쏟아졌다.
내 생체가 가속도를 이기지 못했다. 공기 저항 때문에 내 피부가 찢기며 터져나갔다.
……깜빡이던 내 의식도 곧 증발할 것 같다.
의식 소실은 예상한 상황이다. 내 팔다리 의체는 지연된 신호를 따라 알아서 움직일 터다.
적응형 에너지 방어막이 과열로 망가지든, 아니면 방어막의 위치 전환보다 칼날이 빨라지든 간에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의식이 끊어졌다.
두득!
……회전이 조금이나마 느려지고, 손끝의 감각이 달라진 탓에 정신이 들었다.
크루시스의 칼날이 이반의 목을 반쯤 파고들고 있었다. 내 검속이 방어막의 위치 전환보다 빨라졌다.
쪼개지는 이반의 목덜미가 느릿하게 보인다. 그는 날 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도 못 하고 있는 표정이다.
나는 전투, 폭력, 살인의 전문가다. 네 실책은 알량한 기계 장치 하나만 믿고 날 막으려 했다는 거지.
스륵!
난 크루시스를 놓았다. 더 들고 있다간 내 몸이 딸려갈 것이다.
키아아아아앙!
크루시스는 엄청난 가속과 함께 굉음을 내며 원반처럼 날아갔다.
내 몸도 여전히 가속의 영향에 있어서 돌고 있었다. 혼란한 시야 사이로 이반의 머리가 보인다. 목만 벴기에 아직 놈은 죽지 않았다.
뿌득!
난 이반의 머리채를 잡으면서 왼발부터 바닥에 댔다. 회전을 멈출 때가 왔다. 더는 내가 뒤질 것 같다.
콰직!
내 왼발이 땅에 닿자마자 부서질 듯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어떤 내부 장치 때문인지 몰라도 부러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왼다리가 버텨냈다.
피키이이익!
착지 충격이 왼발이 타고 무릎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내 복부까지 올라오면 오장육부가 다 터질 것이다.
우우우웅!
충격을 감지한 무릎과 허벅지의 완충 장치가 작동하더니 매섭게 진동했다.
틱! 티틱!
다리의 부품과 외장이 충격을 흡수하며 일부 이탈했다.
난, 아니, 라줄리 21호의 의족은 충격 상쇄에 성공했다! 심지어 부러지지 않았다.
츠즈즈즈즈!
내 왼다리에서 거센 연기가 새어나왔다. 착지한 오른발도 가벼이 땅에 닿았다. 다리 하나를 완전히 잃을 각오를 하고 착지한 것인데 두 다리가 멀쩡했다.
……라피스 라줄리는 역시 최고다. 이 자리에 그녀가 있었다면 힘껏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였다. 지젤이 그 자리에 있더라도 말이다.
“하…… 하하.”
피가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솟구친다.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시야도 비좁았다. 시야 중심을 제외한 주변이 어둡고 붉게 보였다.
뚝뚝.
팔다리의 체결부도 핏물로 뜨뜻했다.
하지만 난 웃고 싶었다. 아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쾌락 호르몬이 솟구쳤다.
몇 번이나 경험한 상황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역경을 뚫고, 나의 폭력을 실현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철컥.
난 이반의 머리를 들고선 루이나의 총구를 들이밀었다.
끼익!
그림자들이 뛰어오다가 멈췄다. 게걸스러운 짐승처럼 레기온을 파헤치던 그림자들도 고개를 들고선 붉은 안광으로 날 쳐다봤다.
‘이반을 인질로 삼아 이 자리를 빠져나가.’
내가 들고 있던 이반의 머리가 진동하며 음성이 퍼졌다.
-루카, 넌 날 죽이지 못할 거야. 그런 녀석이니까.
나는 입안에서 번지는 피 맛을 느끼며 웃었다. 숙인 머리를 따라서 피가 떨어졌다.
이 다음 내 행동은, 젠장, 모르겠다. 생각조차 길게 이어지지 않고, 단발적인 사고만 깜빡였다.
돌고 돌아서 모든 건 처음 계획대로였다. 움직임은 본능에 맡기자. 뇌가 뭉그러져도 몸이 어떻게든 하겠지.
나는 그림자들을 응시하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림자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날 따라오고 있었다.
-좌절에서부터 내가 일어난 날을 기억해? 난 내가 부여받은 통치의 운명을 알아. 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할 거다. 그리고 이 풍파가 지나가면 내 통치는 더 견고해지겠지.
웃음이 나온다.
“아직도 그날의 망상에서 나오지 못한 거냐.”
그건 그저 우연이다.
-시험해보면 알겠지. ‘공격해라’.
이반이 그림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드드드득!
그러나 그림자들은 오류가 생긴 안드로이드처럼 오작동을 일으켰다. 몸을 떨면서 안광만 깜빡였다.
‘그림자의 규약과 이반의 명령이 대립된다.’
이반도 당황한 듯했다.
자아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일어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림자는 이반이 만든 전투기계가 아니다. 선대 황제의 작품이었다.
‘황제에게 위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인가?’
그 어떤 명령보다 우선되는 절대적인 내부 규약이 있는 듯했다. 이반도 이건 몰랐던 것이다.
“움직이면 방아쇠를 당기겠다.”
내가 협박하듯 중얼거렸다.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루카는 날 죽이지 못해.
이반의 말은 공허하게 그림자들을 지나갔다. 저들은 자아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너보단 내 명령을 듣는 것 같은데?”
흠, 빈정거릴 힘은 남아있군. 내가 이죽거리니 이반은 침묵했다.
내가 부서진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림자들은 길거리 놀이라도 하듯 멈췄다가 움직이며 따라왔다.
꽤 걸은 것 같다. 기껏해야 1분 남짓이지만 말이다.
‘큰일이다.’
사실, 몸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의식도 억지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토록 맹렬하게 날뛰었는데도 추위가 뼛속까지 엄습하고 있었다.
내 몸은 뒈져간다는 신호만 세차게 보내고 있었다. 황궁을 걸어서 빠져나갈 힘이 없었다.
기익, 끽.
내 다리가 느리다.
날 쫓는 이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노련한 근위대원이었다면…… 진작 내 공백을 노리며 공격했을 것이다.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도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한계에 도달했군.
이반의 머리가 내 왼손에서 빠져나갔다.
‘이 빌어먹을 기성품!’
내 의체는 라피스의 걸작, 라줄리 21호다. 그러나 왼팔만큼은 대파당한 후에 여분이 없어 기성품을 쓰고 있었다.
누적된 충격과 피로를 이기지 못한 왼팔이 망가졌다. 손가락이 느슨해지면서 이반을 놓친 것이다.
내 상태가 괜찮다면 이반의 머리를 잡아챘겠지만, 지금의 나는 엉망진창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이반의 머리가 굴러가는 걸 보았다.
오른손을 뻗어서 루이나를 겨누려 했다. 그러나 내 조준보다 그림자가 더 빨랐다.
카앙!
그림자 하나가 매섭게 달려들더니 이반의 머리를 낚아채며 고속 기동했다.
이반을 확보한 그림자가 무리들 사이로 뛰어들어갔고, 다른 그림자들은 장벽을 만들 듯 뭉쳤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루카! 이게 통치자의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이 우주가 선택한 건 나야!
이반의 웃음이 쩌렁쩌렁 퍼졌다.
기이잉, 기잉.
그림자들의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듯 빛났다.
내 왼팔이 기성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반은 내 손에서 허무하게 벗어났다.
여기까지 상황에 이르니, 나조차도 이반에게 어떤 가호가 붙어있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하, 젠장.”
난 루이나로 그림자들을 겨누었다. 조준은 정교하지 못했고 손가락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당장 달려들 것 같던 그림자들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히려 명령과 규약 충돌이 일어날 때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절규하듯 고개를 높게 들었다.
-이건…….
-내 감정의 증명이야.
-추악하기만 한, 집착과, 소유욕이, 아니라는 증거…….
-앞만, 보고, 달려.
그림자들의 입을 통해 한 마디씩 흘러나왔다.
타닥!
생각할 시간과 여유도 없다. 나는 바깥 통로로 뛰었다.
내가 생각해도 더럽게 달리기가 느렸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정도로 말이다.
‘바바라?’
바바라가 통로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치이이이!
바바라의 의체, 특히 머리 부분은 과열로 인해 연기가 나고 있었다. 전류와 불꽃이 일며 머리 부분의 칩이 차례대로 터지는 소리가 났다.
제국이 키운 희대의 해커가 자신의 뇌를 소모했는데도 그림자 상대로 십 초 남짓한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고속 기동을 시작한 그림자들이 벽과 천장을 타며 날 추적했다.
“……5초면 지원이 도착할 거야, 가.”
고개를 숙인 바바라가 손가락을 안쪽으로 뻗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차마 바바라를 그냥 둘 순 없어서 들쳐 메고선 어설프게 뛰었다.
“멍청…….”
바바라가 말을 전부 내뱉지 못했다.
쿠르르릉!
5초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우리 옆의 벽이 무너졌다. 황궁의 벽이 이리도 잘 무너지는가 싶다. 물론,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그만한 힘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네 어리숙한 면도 시간 계산에 넣었지, 굿보이 루카.
여우 모양의 헬멧이 뿌연 먼지 사이에서 보였다.
일레이 카르티카의 레기온이었다.
일레이가 나를 지나치며 복도로 나아갔다. 그는 달려오는 그림자들과 마주하며 카타스트로피를 세차게 뽑아들었다.
-저 앞에 지젤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봐.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