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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른 정황은 어차피 추론이다.
하지만 이 추론이 정답이 아니라면 현재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빠진 조각이 있어도 그건 내가 ‘관측’하지 못했기에 공백일 뿐이다.
우린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현재를 통찰할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을 고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난 제국이 감춘 어두운 역사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지금의 사태는…… 역사의 반복이다.’
제국은 걷잡기 힘든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불만을 부추겨 봉기를 유도한다.
내가 아는 거짓 봉기의 주모자만 해도 둘이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창시자, 노엘 뮬리즈카. 그리고 근위대장 헤일라스.’
노엘과 헤일라스는 사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제국의 안정을 위해 고름을 미리 짜내는 역할을 맡았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일레이 카르티카는 십 년에 걸친 계획을 준비했다. 그건 공화국 때문만이 아니었다.
‘프란세크의 몸을 빌린 봉기를 통해 이반의 치세에 반대하는 세력을 일거에 처리한다.’
머지않아 프란세크 측에 모인 세력은 숙청을 당할 것이고, 이반의 제국은 더 단단해지겠지.
이런 짓거리를 순조롭게 하려면 아키에스 도미니의 권한이 있어야 한다. 일레이가 가진 배경과 역량의 깊이가 거기서 나온 것이다.
일레이가 아키에스 도미니 역할을 했다면, 모든 게 순조롭다.
‘비어있는 조각은 단 하나다.’
일레이가 어째서 아키에스 도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개인의 자유와 공화국을 꿈꾸던 소년은 그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앞서 말했듯이, 우린 과거로부터 배운다.
‘나는 노엘 뮬리즈카의 절망과 좌절을 알아. 헤일라스가 황제에게 거짓 봉기로 공물을 바치려 했던 이유도 알지.’
노엘 뮬리즈카 시대의 제국은 외적의 위협에 쫓겨 이주해야 했다. 그 때문에 강압적 통치로 국력을 한계까지 짜냈고, 노엘은 반군의 수장으로서 불만을 적절하게 배출하는 역할을 맡았다. 노엘은 자신의 이상보다 제국의 생존을 우선시했다.
헤일라스는 쿠스토리아 가문과 근위대의 존속을 위해 움직였다. 그는 거짓 봉기로 군벌화된 군부와 군인 가문의 힘을 줄여서 황제의 견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 역시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가문과 근위대 생존을 위해서였다.
‘나는 일레이를 알아. 녀석은 이기적이다. 가문이나 주변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꺾을 놈이 아니야.’
오히려 자신의 가문과 부하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룰 놈이다.
그렇다면 내 의식에선 단 하나의 전제만 남는다.
‘일레이, 너도 노엘 뮬리즈카처럼 무얼 알게 된 거냐?’
어떤 연유에서든 일레이에겐 공화국을 포기하고 이반과 손을 잡을 만한 사유가 생겼다.
철컥, 위이잉!
나는 이반을 제압한 상태이고, 그의 관자놀이에 루이나의 총구를 바짝 댔다.
뚝, 뚝.
코피가 멈추지 않는다. 눈의 혈관이 터져서 시야도 붉었고, 앵앵거리는 이명 때문에 청각 정보 처리가 어려웠다.
“루카, 넌 지금 미쳐 가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치료를 받아야 해.”
이반이 내게 제압당한 채로 말했다.
“그럼 바깥 상황을 제게 보여주시죠. 감시 카메라를 통한 아크바란 내부도요.”
나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난 호위까지 물리며 내 안전을 포기하고, 널 설득하려고 했어. 내 진심을 겁박으로 응할 건가? 정말로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흔들리지 마라, 루카.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림자들은 당장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제가 틀렸다면 말씀하시죠. 다시 말하지만, 일레이가 지금 아키에스 도미니의 역할을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레이는 차선책이지, 당신의 마음에 딱 드는 아키에스 도미니가 아니죠.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히지 않은 자니까요. 이반, 당신은 결함이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싶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절 설득하려고 한 거죠.”
“일레이의 머리는 네가 잘라서 가져왔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넌 우수하니 잘 알 거다. 근위대의 신경계 강화 처리와 아키에스 빅티마의 사고법이 합쳐지면 효과만큼이나 부작용도 커지지. 네가 줄곧 억눌렀던 발작이 지금 일어난 거다. 네 추측은 피해망상이야.”
“아뇨, 전 제가 가진 두려움을 압니다. 지금 제가 미쳤다면 키누안이 제 눈앞에 환각으로 서 있겠죠.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요.”
내겐 키누안이 증상의 경계다. 내가 발작하기 시작하면 키누안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못한다.
지금은 그런 현상이 없다. 정신병도 걸려본 놈이 잘 아는 법이지.
‘지금 내 상황은 사고의 폭주다.’
뇌를 짜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사건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금 내가 이해하려는 건 국가의 명운을 건 대계다. 이반과 일레이 정도 되는 인물이 10년 넘게 애증 어린 대립과 협력을 통해 이뤄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한정된 조각으로 전체를 보려면 내 뇌가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워야 한다.
“루카, 의심을 멈춰라. 난 네가 여기서 죽는 걸 바라지 않아.”
“제 의지로 사고가 통제되지 않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정신전이기로 당신의 뇌를 들여다보면 해결될 일입니다. 이 모든 게 제 편집적 망상이자 착각이라면…… 당신의 머릿속엔 유리 크라치아의 정신이 아직 들어있겠죠.”
내가 한쪽 손으로 짊어진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이 열리면서 정신전이기가 나왔다.
“내가 늘 원하는 건 너였어, 나의 아키에스 도미니 루카. 네가 이렇게 망가지기 전에 구하고 싶었다.”
이반이 쓸쓸히 말했다.
“제 추측이 틀렸다면, 당신만을 위한 아키에스 도미니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완벽한 아키에스 도미니요.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재활 치료도 충실하게 받도록 하죠.”
이반의 머리를 겨눈 충격권총 루이나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내 머리가 날아가더라도 몸에 새겨진 전투 반사 때문에 난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이반이 정신전이기 헬멧을 잡았다. 그는 뒤돌아서더니 내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스륵.
이반은 쓸 것처럼 헬멧을 정수리 위까지 들어올렸다.
난 차분히 기다렸다. 이반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웃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난 네 전부 파괴할 거다. 부디 널 가져달라고 빌게 만들어주지. 내가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제국에 필요 없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반은 정신전이기 헬멧을 옆으로 내던졌다.
“이반, 너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애새끼야. 원하는 걸 전부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이반은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게 내가 타고난 천부의 권리니까. 난 통치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어. 이 제국에서 내가 가지지 못할 건 없지.”
어처구니가 없는 특권 의식이다.
“그 누구도 원하는 걸 전부 가지지 못해. 넌 그걸 아직도 모르는 철부지 애새끼에 불과한 거고. 제국을 위해, 뒈져라.”
나는 루이나의 방아쇠를 당기면서 뒤로 뛰었다.
우웅.
그 순간, 이반의 몸이 빛났다. 새파란 에너지 방어막이 빠르게 그의 피부를 뒤덮었다. 내가 모르는 제국의 신기술이로군, 망할.
촤아아아아아!
폭발이 일지 않았다. 충격탄은 이반의 몸에 부딪혔으나 에너지가 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충격탄은 개인화기 중에서도 위력 하나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무기다.
이반은 초근거리에서 충격탄을 가볍게 상쇄했다.
치잉!
이어서 나는 크루시스를 뽑자마자 휘둘렀다. 이반의 머리를 노린 궤도다.
막대한 질량을 가진 크루시스였으나 이반의 머리를 부수지 못했다.
키이이이이잇!
이반의 몸을 휘감은 푸른 에너지 방어막이 크루시스의 충돌 지점에 모여들며 물리적 저항을 만들어냈다.
카아아앗!
반발력 때문에 나는 크루시스와 함께 미끄러지듯 튕겨나갔다.
‘젠장, 말도 안 돼.’
이반은 아케인의 전투 유물이라도 몸에 두른 것인가? 절망감이 순간 치솟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다행히도 그건 아닌 듯했다.
키잉!
이반의 날개뼈 사이에서 냉매제로 보이는 카트리지가 탄피처럼 튀어나왔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기술력이다.
치이이이이!
이반의 몸에서 열기가 스멀스멀 흘렀다. 상당한 열량의 에너지를 단시간에 분출한 탓이었다.
“너도 이건 처음 보지? 적응형 에너지 방…….”
난 이반이 설명을 끝내기도 전에 방아쇠를 연거푸 당겼다. 충격권총에서 튀어나온 냉매 탄피가 사납게 흩날렸다.
촤아아아!
아까와 마찬가지로 충격탄이 상쇄되며 위력이 흩어졌다.
티- 잉!
이반의 등에서 냉매 카트리지가 둘이나 연달아 튀어나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냉매 카트리지를 따라 아지랑이가 길게 이어졌다.
‘도대체 저 크기의 인간형 의체에 최첨단 방호장치를 얼마나 쑤셔넣은 거야?’
말도 안 되는 사양이었다. 방어력을 보니 폭격이 정통으로 맞아도 살아남을 것 같았다.
치이이이이!
이반의 의체는 고온으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다른 전신의체였다면 이미 뇌가 익었을 것이다. 방열 설계가 얼마나 잘 되어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화르르륵!
고온 때문에 이반의 옷은 녹아내리듯 타올랐다. 나신이 된 이반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조금만 더 바보였거나 속물이었으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야. 너도 행복한 부자유보다 불행한 자유가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야?”
이반의 가변의체가 변형되었다. 피부와 골격이 변화하면서 가슴과 골반의 곡선이 드러났다. 변형하면서 내부 부품이 드러날 때마다 열기가 솟구쳤다. 열 배출을 위한 가변이기도 했다.
철컥.
나는 루이나의 탄창을 갈았다.
“관둬, 네 무장으론 아무리 용을 써도 날 죽일 수 없어. 아버지가 암살당한 덕분에 황제의 전용의체에 투자할 명분이 생겼거든. 명분만 확실하면 다른 황족이나 방계 놈들도 반대하지도 못하지. 참고로, 이 의체 하나가 우주전함 한 척보다 비싸.”
이반이 날 비웃었다. 그는 아직 그림자를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네가 황제일지 몰라도 전투의 전문가는 아니지.”
난 습관적으로 빈정거렸다. 젠장, 망할 습관 같으니. 악을 쓰는 것 같아 더욱 초라하군.
“흐응, 공손히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하해와 같은 자비심으로 지젤을 살려줄지도 모르잖아. 내 밑에서 같이 살게 해줄 수도 있고.”
“거참, 달콤한 제안이네.”
“어쨌든 널 죽이지 않겠다고 일레이와 약속했으니까. 일레이는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이반, 넌 일레이를 믿어?”
나는 장전한 루이나로 천장과 벽을 쐈다.
콰앙! 쾅!
착탄 지점이 흔들리며 파편이 흩날렸다. 황궁답게 몹시 튼튼해 벽이나 천장이 무너지진 않았다. 그러나 진동과 굉음은 퍼졌으리라.
“외부에 신호라도 보내고 싶은 거야? 의미가 없는 짓이야. 일레이 카르티카는 나와 거래했어. 특히 네 생존을 두고 말이야. 그리고 당장은 공화국보단 단결된 철의 통치가 필요하다는 점도 동의했지. 우리가 이러는 사이에 일레이는 프란세크의 몸으로 ‘민중 학살’을 저지르고 있어. 모든 건 계획대로지.”
음, 효과적 방법이로군.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는 프란세크가 이유 없이 시민을 학살한다면, 제국신민은 이반의 밑에서 단결할 것이다.
일레이는 이반과 합의한 사안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반은 안심하고 있다.
“나는 일레이를 믿어.”
“그 배신자를?”
“이번에도 날 배신했으니까 더욱 믿는 거야.”
이반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황급히 돌려 벽 쪽을 쳐다봤다. 무언가 이변을 감지한 듯했다.
콰- 앙!
충격탄도 버티던 벽이 무너지면서 잔해가 안쪽으로 튀었다.
“……하하.”
자욱한 먼지와 연기를 보며 나는 웃었다.
난 내 친구 일레이를 믿는다.
‘일레이가 항상 배신한다는 걸.’
카르티카 여우의 거짓말과 속임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