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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앙로즈의 보스, 그레이스 ‘디바’.
나는 헬멧을 벗으며 그레이스의 등을 보았다. 그녀의 옷은 뒷면이 파여 등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민망한 노출은 꼬리뼈 부근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낯설군.’
나조차도 은연중에 라비앙로즈의 보스는 언제나 마르티나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라비앙로즈라는 갱단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보스였다.
또각, 또각.
그레이스는 걷고 있다.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낯설었다.
“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조직의 규율을 유지하려면 보스부터 전통을 지켜야 하죠. 라비앙로즈는 매춘부를 지키기 위한 조직이니까요.”
그레이스가 민망한 듯이 말했다.
라비앙로즈는 매춘부의 안전과 권익을 위한 자경단으로 시작했다.
디바라는 명칭과 요염한 복장은 라비앙로즈라는 갱단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규율이었다.
‘그레이스가 내키지 않는 보스가 된 건 책임감 때문이겠지.’
그레이스도 새로운 디바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에 떠맡았겠지.
전통 있는 갱단이라도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다. 보스에게 카리스마가 부재하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다.
그레이스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는 그녀를 존중한다.
“아크바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 라비앙로즈도 숨을 죽이고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죠. 그래서 당신의 방문이 달갑진 않습니다, 루카 도련님.”
“보스 입장에서 달갑지 않다는 거지?”
내가 살짝 섭섭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레이스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개인으로 보자면 당신의 생사를 안 것만으로도 반가울 따름이죠. 하지만 제가 아는 당신은 혼란을 몰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저는 라비앙로즈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고요.”
“그쪽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진가우 소장과 만나고 싶을 뿐이야. 마르티나 디바의 후원자였잖아. 연락할 방법이 있어?”
“여전히 진 소장님은 라비앙로즈의 가장 큰 배경입니다.”
난 눈을 옅게 떴다.
“진가우 소장의 다음 정부가 너인 건가?”
“질투라도 하시는 건가요?”
그레이스가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나도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그럴 리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물어본 거야.”
진가우와 그레이스가 어울릴 것 같진 않았다. 종잡기 힘든 진가우와 냉철한 그레이스가 한 침대에 뒤섞인다고? 내 상상력이 빈약한 탓인지 몰라도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세상은 기묘한 법이죠. 저도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진 소장님께서 당신을 만나겠다고 하셨으니 안내하겠습니다.”
그레이스가 통신을 받았는지 방향을 틀었다. 그녀는 라비앙로즈의 안전가옥 중 하나로 향했다.
‘그레이스와 진가우가 잠자리를 가지는 건 아니야.’
그레이스의 말투를 봐도 그러했다.
‘그리고, 아마…… 그레이스의 취향은 진가우 같은 남자가 아니겠지.’
그레이스는 남녀 모두를 좋아하는 양성애자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 취향은…… 능글맞은 사내보다 챙겨주고 싶은 동생 같은 사람이겠지.
으음, 괜히 머쓱하다.
나는 어깨를 주무르듯 매만지며 그레이스를 따라갔다.
“루이나는?”
내가 화제를 바꾸듯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루이나는 ‘1세대 루이나’다.
현재 내가 쓰는 루이나는 이반이 새로이 만들어 선물한 2세대다.
“뒷골목 싸움에 쓸만한 무기는 아닌지라 잘 손질해서 보관 중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옛 연인의 근황을 묻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했다. 싱숭생숭하다.
또각.
그레이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 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다세대 주택이 있었다. 하층 구역의 사람들이 값싸게 머무는 주택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니 건물의 상태는 상당히 나빴다.
“건물이 오래됐군. 백 년도 넘었나?”
난 허름한 외관을 보며 중얼거렸다.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배관은 부식돼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자세히 보니 개수도 하지 않아서 폐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건물 입구에는 노숙자나 부랑배들이 너저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자도 있었고, 전자마약을 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고장 난 듯이 점멸했다.
‘그러나…… 진짜 소속도 없는 부랑배는 아니야.’
저들은 라비앙로즈의 조직원이었다. 그들은 그레이스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길을 열었다.
끼익, 끼익.
나와 그레이스는 유격으로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여기에 진가우 소장이 있다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진가우 소장이 여기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그레이스를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 하층 구역에서 발생할 위기 정돈 자력으로 넘어갈 수 있다.
뭐, 내 판단이 틀렸다면 대가를 치르면 될 일이다.
“도련님이라면 들어가자마자 상황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가 그리 말하며 문 옆에 섰다. 날 따라 들어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난 문손잡이를 아래로 꺾으며 밀었다. 힘을 세게 주면 부서질 것만 같다.
끼이익.
녹슨 문이 바닥을 긁으며 밀려났다.
덜컹, 쾅!
경첩의 유압도 망가져서 문은 놓자마자 거세게 닫혔다. 주의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찧을 터다.
방 내부에는 색이 바랜 가구와 장식품이 보였다. 사소한 소품 하나조차 수십 년은 넘은 듯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표지의 안료도 날아가서 제목을 읽기 어려웠다.
내가 발소리를 내자, 안쪽에서도 기척이 일었다.
“아, 역전의 용사께서 오셨군. 몇 번이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번번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자네에게 붙어있는 게 강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어.”
진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걸어가며 대답했다.
“살아있으니 강운이겠죠.”
“우리의 삶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됐는데, 살아있다는 걸 행운이라 볼 수 있을까?”
“흠, 소장님이 철학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난 진가우 소장이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우우웅.
옅은 기계음이 일고 있었다.
내실 벽면에는 마르티나의 의체가 담긴 저온 캡슐이 보였다. 그녀는 잠든 것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캡슐의 유리면에 비친 생체 신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르티나는 죽었다. 저 캡슐은 그녀의 관이었다.
‘진가우.’
진가우는 마르티나의 캡슐을 보며 앉아있었다. 그는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턱을 괴었다. 안경 안쪽의 동공은 마르티나에게 꽂혀 있었다.
“용케도 목갑을 제거했군.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진가우가 날 힐끗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상당히 가라앉아있다.
‘도련님이라면 들어가자마자 상황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녀의 말처럼 난 진가우의 내면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진가우 같은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저 사내는 제국의 혼란을 몇 번이나 겪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처세술이 뛰어났다.
그런 사내가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감정의 신호가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고 있었다.
제국의 권력자이며, 전신의체로도 오랫동안 살아간 사내가…… 저토록 강렬한 감정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마르티나의 죽음 때문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놀란 탓에 가슴이 잠시 두근거렸다.
‘진가우 소장은 진심으로 마르티나를 좋아했다.’
여태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저 변덕스러운 제국의 권력자가 하층 구역의 여자를 후원하며 어울리는 것처럼만 보였다.
‘마르티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며 절망하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며, 빛이 꺼진 삶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살다 보면 겪는 인생의 쓴맛 중 하나다.
진가우 소장은 마르티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루카, 난 마음만 먹으면 마르티나를 살려낼 수 있네. 뇌의 활동은 멈췄지만, 아직 부패하진 않았지. 화학물질을 주입하고 전기 신호를 준다면 살아날 거야.”
진가우가 말했다. 난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마르티나가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소장님께 말했겠죠. 예상 범주의 행동이니까요.”
진가우의 메마른 웃음이 퍼졌다.
“하하, 맞아. 그러나 난 하루에도 수없이 고민하네.”
“그렇게 살려내더라도 소통이 힘들 겁니다. 뇌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한 거니까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진가우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은 답을 알면서도, 타인의 입으로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맞아, 편히 떠난 사람을 현세로 불러내선 안 되지. 이건 추악한 노욕이야.”
진가우가 등을 곧게 세웠다. 그가 천천히 날 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는 의안인데도 공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르티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신 줄은 몰랐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것일수록 소중하지 않은 척해야 하지. 가족, 연인, 친구는 약점이 되니까 말이야. 내 약점을 찾아내려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자들이 제국엔 수두룩하네. 이젠 정말로 약점이 사라졌으니 말을 꺼릴 것도 없지.”
난 진가우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사람은 다면적이다. 그 사내가 한 여자를 저토록 아낄 거라고 누가 상상할까?
‘진가우는 자신의 약점을 남에게 들키지 않았다.’
나도 진가우에게 속았다. 그는 소중한 사람을 곁에 두고 지키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휘말리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진가우도 내가 아는 제국의 권력자들과 똑같다.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살아남은 거야.’
마르티나가 괜히 천수를 누리고 편히 죽은 게 아니다. 진가우의 노력이 그 뒤에 있었다.
“나와 마르티나의 이야기는 자네의 삶보다 기네. 백 년도 훌쩍 넘었지. 우린 다른 길을 걷다가 때론 접점을 가지며 살아왔어.”
반세기도 살지 못한 나조차 온갖 인연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
‘진가우가 마르티나에게 가진 감정의 부산물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겠지.’
나는 입을 다물며 진가우의 말만 기다렸다. 용건을 꺼내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와 마르티나는 기계를 몸에 붙이지 않을 때부터 서로를 알았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고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어. 난 마르티나를 지킬 힘이 없었기에 물러났네. 타인의 약점을 잡고 이용하려는 제국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살벌한지 자넨 잘 알고 있겠지.”
남 일 같지 않았다. 나와 지젤도 서로의 약점이었다.
“그래서 마르티나를 지킬 힘과 능력을 갖추고 나서야 다시 만나셨군요. 그것마저도 신중하게 말이죠.”
“소중한 존재를 지키려면, 때론 거리를 둬야 하지. 당장의 충동과 감정만 앞서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걸 지키지 못해.”
저 말에 동의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뇌리에서 빛줄기가 번뜩거리며 연결되는 것 같았다.
지젤과 진가우는 교류가 있다. 예전에 진가우가 지젤의 논문을 읽고 조언을 넌지시 해준 적도 있었다.
지앤지 사이버네틱스 설립 시, 지젤은 자신의 인맥과 배경을 총동원했다. 진가우에게도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진가우는 처세의 달인이다. 직접적으로 위험을 무릅쓰진 않는다. ‘제국의 칼’ 초기 후원자 명단에도 그는 없었다.
그러나 진가우는 은연중에 정보를 흘려댔을 것이다.
“……지젤에게 절 보더시티로 보내라고 조언한 사람이 당신입니까?”
진가우는 아크바란에서 보더시티 내부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특히 과학 관련으론 모르는 게 없을 것이다.
“조언한 적은 없네. 극한치료를 위한 시설이 보더시티에 있다는 것만 가르쳐줬을 뿐이지.”
난 헛웃음을 흘렸다.
“소장님께서 절 좋아한다는 게 사실이긴 하군요.”
“거참, 늘 말했잖나. 난 자네 같은 부류의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이야.”
진가우가 일어서더니 마르티나가 영면하고 있는 캡슐 앞에 섰다.
끼릭.
진가우가 캡슐을 조작했고, 유리 안쪽에선 이글거리는 불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이내 거세진 불꽃이 캡슐 안쪽을 휘감았다.
타닥, 탁.
마르티나의 전신의체는 화학적 처리가 됐는지 장작처럼 불이 쉽게 붙었다. 곧 그녀의 의체는 붉게 갈라지더니 이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이제 마르티나는 진가우의 기술로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진가우는 불꽃이 꺼져가는 캡슐을 응시하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가 무얼 도와주면 좋겠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어느덧, 진가우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