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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키누안을 눈앞에 두고 과거를 되짚었다.
보육원, 생도, 폭풍기, 보더시티, 그리고 현재.
내 삶의 궤적을 따라 굵직한 사건과 배경이 지나간다. 그 궤적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얽혀 있었다. 헤어진 사람도 있고, 죽은 자도 있다. 아직도 내 주변에 있는 자들도 있지.
삶을 계산적으로 딱 자르기 힘들지만, ‘루카’라는 개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키누안’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난 키누안에게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루카라는 소년은 고지식하면서도 때론 반항적이었다. 폭력의 재능이 없었다면 진작 길거리 골목에 처박혀 죽었을 놈이다.
‘그러나 폭력의 재능만으론 한계가 있지.’
재능이 아무리 높고 높은들 결국은 개인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내 재능은 개인의 폭력에 불과했고, 국가와 집단이 가진 무력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빈약한 개인이 거대한 흐름에서 살아남는 법.’
그걸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키누안이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약자의 기술이다. 약자라는 위치는 전투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예측하기 힘든 현실을 유연하게 대응하고 그 빈틈을 노려서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낸다.
멋스럽게 표현하면 그런 거고, 따지고 보면 실수 한 번으로 죽는 공중곡예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아키에스 빅티마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다. 한입에 날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과 한 번의 결정으로 내 인생을 끝낼 수 있는 집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내 자신을 지켜냈다.
‘약자가 강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놈들끼리 충돌하게 해야 한다.’
국가 같은 집단이나 까마득한 경지의 강자와 일대일로 대립하면 아키에스 빅티마고 나발이고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 키누안 스승의 스승이 와도 소용이 없고, 창시자인 노엘 뮬리즈카조차 개인의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나 강자들끼리 충돌하면서 사건과 갈등이 복잡해지고 힘의 균형이 첨예할수록, 약자는 절묘한 무게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가 혼돈을 추구하는 건 필연이지.’
나도 당면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어려울수록 여러 세력을 끌어들인다. 이를 토대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비틀어서 틈이 열리길 기다렸다.
‘남들이 보면…… 나도 키누안 같은 존재다. 내가 개입하면 사건은 더 복잡해지고 예상 밖의 상황이 계속 벌어지지.’
나와 키누안은 각기 다른 폭풍이다. 우리가 움직이면 현실은 갈기갈기 찢길 듯이 혼란스러워졌다.
나와 키누안이 일으킨 상승작용의 결과가 아크바란의 폭풍기와 보더시티 사건들이다.
‘밑에서 올라오는 난기류가 뜨거울수록 폭풍의 세는 더 커진다.’
……키누안이란 폭풍이 받아들인 난기류의 속성은 증오, 분노, 복수 따위다. 그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한다. 때론 자기 자신이 증오와 분노의 원흉이 된다.
‘생각해보면 의도적으로 원한을 산 거다. 본인이 여러 사람의 목적지가 돼야…… 어딜 가든 혼란스러운 사건 사고가 일어날 테니까.’
키누안은 하나의 좌표였다.
키누안이란 좌표가 나타나면 여러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인 힘의 쏠림이 일어난다.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 힘들은 충돌하고 부딪히며 상호 영향을 끼친다. 예측 불허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누안은 불가해적인 현상이나 괴이한 인물이 아니다.’
지구의 머나먼 조상들은 과학이란 도구를 가지기 전까진 화산 분화와 번개 폭풍을 신의 노여움이라 상상하며 두려워했다.
‘당시의 조상들은 자연 현상을 이해할 만한 지식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저 두려워했다.’
키누안을 이해해라, 루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놈의 행동에는 사유가 있다. 불가해한 존재가 아니다.’
씁쓰레한 찻물이 목구멍을 넘어서 위장에 도달하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사고가 폭주하는 건 키누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누안은 목적을 이뤘느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도 하나의 단서겠지.
나는 화제를 전환하듯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면,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나는 건 궁지에 몰렸을 때였죠. 당신은 제가 무대에서 퇴장하는 게 두려웠을 겁니다.”
키누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채웠다.
“자네가 날 추적하는 걸 포기해선 안 되니까 개입해야 했지. 이렇게 이야기하니 바둑을 복기하는 느낌이군.”
나는 말을 계속 내뱉었다. 내게 부족한 건 정보다.
키누안이 쉽사리 실수할 것 같진 않지만 말을 걸어서 내게 없는 정보를 짜내야 했다.
“강대한 제국의 추적은 만만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쏠린 힘의 방향 중에서 가장 매서운 게 제국과 황제였을 겁니다. 그 힘을 나눠서 받아낼 사람으로 제가 있어야 했겠죠. 그리고 무쉬르 알 카슈라의 관심도요.”
“제국의 초점이 내게 향해 있으면 아무리 나라도 움직이기 힘들지. 일레이 군도 굉장히 유능했거든. 으음, 이젠 카르티카의 여우라 불러야겠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 버린 존재니까.”
“저는 이반 크라치아와 일레이의 관심을 끄는 존재였으니 제 복귀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됐겠죠. 제 뇌는 무쉬르 알 카슈라의 관심도 끌기 좋은 미끼고요.”
“내 계획으론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 자넨 죽었어야 해. 여기서 자네는 처음으로 내 거미줄에서 벗어난 거지. 무쉬르 알 카슈라가 당할 줄은 몰랐어. 그자는…… 설화와도 같은 전설이네. 이미 인간의 영역에 있지 않지. 청출어람이 따로 없군.”
이것도 알고 있다. 키누안은 무쉬르 알 카슈라의 죽음을 전제하지 않았다. 내가 놈의 손에서 살아남은 건 기적과도 같았다.
‘키누안이 예상하지 못한 개입 덕분이지.’
그 개입은 일레이와 바바라였다.
“무척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는군요.”
“더는 자넬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눈을 깜빡였다. 키누안의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이미 끝났군.’
키누안은 정신전이기와 홀리에너지 캡슐을 사용했다.
‘무엇이 바뀐 거지?’
타인의 멀쩡한 뇌에 자신의 정신을 이식한 건가? 키누안의 의체에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사람의 뇌가 있는 건가?
머리통을 뜯어서 열어보기 전까진 알 수가 없다.
“교구장에겐 무얼 제시했습니까?”
“디컨은 참으로 순수한 사내야. 본디 성실하고 착한 사내이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있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수업을 시작해보겠네.”
난 눈을 찌푸리며 키누안의 말을 기다렸다.
“디컨은 보더시티 교구를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자네. 그리고 난 디컨에게 내밀 만한 협상패가 많이 없지. 한 번 배신한 상황에서 내가 디컨을 어떻게 꾀어냈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키누안은 궁지에 몰려 있다. 숨겨둔 협상패 따윈 이제 없다.
현재 여기에 있는 것만 생각하자. 답은 하나다.
“제 존재가 ‘공물’이겠죠.”
“훌륭해. 역시 자네다워. 이반 크라치아 폐하께선 자넬 위해 많은 양보를 하겠지. 홀리에너지 캡슐이 귀하다곤 하지만 국가들이 가진 유물 중에선 흔한 편이야. 폐하와의 협상에서 자네의 가치는 그 이상이네. 난 그 사실을 디컨에게 납득시키기만 하면 됐지.”
나는 입을 열려다가 움찔했다. 이 이상은 ‘라르스’에게 위험한 대화다.
내가 뒤를 돌아봤다. 반파된 라르스가 보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루…….”
라르스가 뭐라 말하려고 했다. 나는 내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조용히 해라.’
내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라르스는 침묵했다.
“라르스의 용도는 끝났으니 돌려보내 주시죠.”
더 들었다간 라르스는 풀려나더라도 이반 크라치아에게 죽는다.
‘황제가 감정적 인간이라는 걸 제국민이 알아선 안 된다.’
내 말을 들은 키누안은 웃었다. 그는 일어서더니 퀼리아를 불러서 라르스의 이송을 맡겼다.
꾸벅.
들어온 퀼리아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교구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 깨문 아랫입술로 참담한 심정을 내게 드러냈다. 그녀에겐 저것도 대단한 감정 표현이다.
“……고작 며칠을 같이 지낸 부하를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군. 난 자네의 그런 면이 참으로 좋아.”
“당신의 입에서 그런 칭찬을 듣고 싶진 않군요.”
“칭찬이 아니네. 자네가 날 이길 수 없는 이유지. 사람 간의 관계가 자네에겐 족쇄야. 나에게 번번이 밀린 이유도 이 때문이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자리에 다시 앉은 키누안은 찻잔을 입에 댔다.
“자네는 타인에게 붙잡혀 ‘할 수 없는 결정’이 많아. 가능성이 대폭 좁아지기 때문에 자네를 읽어내는 건 무척이나 쉬워. 반면 난 타인에게 감정적 구속을 당하지 않기에, 자넨 날 읽어내지 못하네.”
“‘사랑을 받되, 사랑하진 말 것.’”
난 키누안의 옛 조언을 입에 올렸다. 키누안은 충실히 그 말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게 모든 인간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비결이지. 자네는 훌륭한 학생이지만…… 이것만큼은 배우지 못했어.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고 말았지.”
난 오히려 피식 웃었다. 자괴감이 들거나 후회는 없다.
“그게 제 방식입니다.”
키누안도 날 따라 웃었다.
“그 차이가 우리의 명암을 가른 거네. 이반 크라치아는 고독한 아이였네. 그 애에게 자네는 자신의 어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친구, 그리고 평생을 어쩌면 함께할지 모르는 동반자이자 종사였지. 그 아이는 자네 예상 이상으로 자넬 사랑하고 있어. 자네는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어야 했으나, 이반의 마음에 보답하기 어려웠기에 도망치기만 했지.”
“당신이 선대 황제를 농락한 것처럼 했어야 했단 말입니까?”
“농락이라고 말하기엔…… 힘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나?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거네. 지금의 자네라면 잘 이해하겠지. 내가 약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이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며 키누안을 보았다.
‘어쩌면…….’
난 키누안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이자 이해자일지도 모르겠다.
“일레이, 쟈파, 앙귀스 레지나, 이스마엘 라, 손석재. 전부 자네의 우수한 패였네. 저들을 이용하고 버렸다면, 자네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어. 그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겠지. 사람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네.”
“……홀로 태어날지라도,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죠.”
내가 말하고도 아차 싶다. 키누안도 예리한 비웃음을 흘렸다.
“흠, 보육원 출신다운 말이로군. 아, 참고로 이건 비꼬는 거네.”
난 어깨를 으쓱했다. 화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안심되는군요. 당신은 절 생포해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데 말이죠.”
“명색에 스승이니 그 정도 제약은 걸고 제자와 싸워야겠지.”
“청출어람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지.”
“뭐, 제자의 도리는 스승을 넘는 것이겠죠.”
우린 서로를 마주 보며 앉은 채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기이잉.
내 의체가 서서히 깨어났다. 키누안의 의체에서도 출력이 올라가는 소리가 미미하게 퍼졌다.
“자네도 피곤할 테니 5초 안에 끝내도록 하지.”
싸움의 시작을 알리듯, 키누안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때렸다.
카- 앙!
찻잔이 깨지면서 그 파편이 내 얼굴로 고스란히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