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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님의 사망 소식은 측근에게만 전달됐습니다. 외부에 공개하면 파장이 클 테니까요.”
퀼리아가 높게 솟구친 개척신전을 보며 말했다. 신전 주변은 코라인 거주구와 겹쳐 있어서 백의를 입은 행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위잉.
내 신경계는 전투할 때처럼 각성한 상태였다. 확장된 감각 때문에 세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감각을 퀼리아에게 좁히자.’
난 퀼리아를 감시하는 중이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코라 사람이며 교구장의 편이다. 여차하면 나와 척을 질 수 있는 여자였다.
‘라르스가 암살범이라면, 난 퀼리아를 죽여야 한다.’
각오한 일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물렁한 사람이라지만, 머릿속이 꽃밭인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퀼리아와 라르스를 저울에 올려둔다면, 당연히 라르스를 구하고 퀼리아를 버려야 한다.’
모두를 구할 순 없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대부분 결과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며, 때론 최악을 피하려고 차악을 삼켜야 한다.
난 퀼리아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녀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전사다.
가늘게 압축한 내 감각이 축수처럼 퀼리아를 훑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과 가슴의 떨림,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마저 느껴진다.
퀼리아도 내 관측을 절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포식자를 등 뒤에 둔 피식자가 된 기분이겠지.
‘그러나 강대한 포식자라도 종종 피식자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곤 한다.’
나는 퀼리아의 기량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나보단 부족한 듯하나, 그녀가 가진 기량의 바닥까지 내가 아는 건 아니다.
경험이 많은 전사라면 자신보다 강한 자를 꺾기 위한 비장의 수 한둘 정도는 가지고 있다.
‘퀼리아를 상대로 방심하면 내가 죽는다.’
내 신경계가 전투태세인 건 필연이다.
“라르스를 만나 내막을 물어보자고. 너도 교구장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많을 테니까.”
내가 재차 강조했다. 적어도 라르스를 만날 때까지 그녀는 협조할 터다.
‘보더시티의 교구장은 적이 많았다. 용의선상의 인물이 무수히 많을 거야. 퀼리아도 진범이 따로 있다면 잡고 싶을 거고.’
나는 개척신전의 흐름을 관찰했다. 묘하게 부산스러웠다.
“신성국은 왜 보더시티 교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지?”
내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다. 퀼리아의 사고 초점을 ‘본국의 교단’에게 돌리려는 화제 전환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구장 암살이 본국의 음모라고 여기게 만들려는 얄팍한 수작질이다. 이것도 키누안에게서 훔쳐 배운 심리 장악의 일부였다.
“보더시티 교구는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아 변화가 빠르니까요. 이단이 나오기 좋은 환경이죠. 그래서 본국에서 파견 나온 사제들은 보더시티 적응을 힘들어합니다. 현지 실정에 맞게 적당히 교리를 왜곡하기도 하니까요. 간혹 어쩔 수 없는 변질이 따라오죠.”
나는 디셈교는 물론이고, 종교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이단은 종교 국가에 굉장히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넌 그 변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난 일부러 변질이 아니라 변화라고 말했다.
“제 의견은 중요치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퀼리아의 절제된 감정 신호를 모조리 훑으며 읽어냈다.
‘교단과 국가에 대한 복종보다…… 교구장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더 우선해서 움직인다.’
상관과 부하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일종의 사병화였다.
근위대원도 오랫동안 복무하면 국가보다 자신의 상관에게 더 충성하게 된다.
퀼리아가 코라 신성국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군인이었다면, 나는 타협의 여지조차 없이 그녀를 죽여야 했을 터다.
‘이래서 세상은 어지러운 법이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마음은 불변하는 기계가 아니다. 매 순간 요동치며 끝없이 변화한다.
그렇기에 우린 누군가를 쉽게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계속 바뀌는 법이니까.
제국의 황실이 ‘인간의 마음’이 없는 친위대를 꾸리고 싶어 하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마음이 있다면 온전히 믿을 수가 없으니까.
나도 일레이를 끝없이 의심한다. 헤일라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었다. 우린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의 관계다. 사람 사이에 완벽한 신뢰와 믿음이란 존재치 않는다.
“하수도에 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있습니다. 외부의 습격을 대비해 만든 비상통로죠.”
퀼리아가 차분히 날 안내했다.
개척신전과 코라인 거주구는 신성국의 설계와 자본으로 건설한 지구였다.
퀼리아는 하수로를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내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려서 빈틈을 만들려고 하는군. 퀼리아도 날 제압해 주도권을 잡고 싶을 테니까.’
나와 퀼리아는 묘한 신경전을 펼치며 걸었다. 하지만 나도 불편한 협력 관계에는 이골이 난 몸이다. 제국 시절에 비하면야…….
일단은 퀼리아의 이야기도 귀담아들었다. 나중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있었다.
‘상수도와 전기 시설도 전부 보더시티 중앙과 분리되어 있군. 주요 통신 시설도 마찬가지고.’
여긴 보더시티 내에 있는 코라 자치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로와도 같은 하수로의 구조를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눈 감고도 찾아올 수 있을 정도다.
지끈, 지끈.
눈두덩이와 관자놀이가 아프다. 혈관이 터질 것만 같다.
‘심호흡하며 신경계를 안정화해.’
퀼리아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요한 숨이 내 입술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현역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루카.
나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예전이라면 이 정도로 두통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대개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지. 자신을 갉아먹으며 소모하는 능력이니까.’
내가 본 사람들도 그러했다.
“다 왔습니다.”
퀼리아가 걸음을 멈추며 전방을 응시했다.
하수도 끝에는 깨끗한 백색의 문이 있었다. 개척신전 내부로 들어가는 길인 듯했다.
스륵.
난 목갑을 매만졌다.
‘이반이 목갑의 장치를 일시적으로 해제했을까?’
확신은 없다. 내가 예지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나는 앞장서며 백색의 문을 매만졌다. 문이 녹슬어서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끼이익.
내가 문을 잡아당기며 열었다. 삭막하게 고여있던 공기가 내 코를 찔렀다.
우웅.
한 발자국 나아가니 대기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묘한 압력이 느껴진다. 전자기적 교란 때문에 의체가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난 목갑이 작동하지 않는 걸 확인했다. 외부와 차단됐는데도 목갑은 느슨했다.
‘이대로 목갑을 부숴도 작동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목갑은 신뢰의 상징이다. 이반과 나를 이어주는 고리이기도 했다. 그는 키누안을 체포한 뒤의 자유를 내게 약속했다.
‘이걸 깨면 앞으로 이반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맹렬하게 나를 방해하겠지.’
황제의 분노를 감당할 생각은 없다. 이반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뼈저린 배신을 넘어갈 정도로 물렁하진 않다. 나도 그 선을 넘을 생각은 없다.
“감시 시설은?”
먼저 들어간 내가 문을 연 채로 퀼리아를 기다렸다. 그녀도 내 곁을 지나치며 앞장섰다.
“순찰을 주기적으로 돌 겁니다. 전자적 감시장치는 없습니다. 해킹의 위험도 있고…… 공식적으론 고문과 심문 시설이 여기에 없어야 하니까요.”
나는 손을 접었다가 펼치며 가볍게 풀었다. 순찰원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생길 것이다.
“루카 님, 저는 지금까지 당신에게 순순히 협력했습니다.”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기도 합니다만, 지금의 부탁을 위해서이기도 하죠. 불필요한 살상은 없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강압적으로 침입했다면 분명히 많은 사제와 신도가 죽겠죠.”
퀼리아가 날 돌아봤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말해.”
“절 믿고 제 능력에 몸을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라르스 앞에 도착할 때까지만요.”
“인지왜곡을 내게도 적용하겠다는 거로군.”
“그러면 유혈사태 없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전에 퀼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지왜곡은 외부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닙니다. 사용자 본인도 자신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죠.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썼다간 본인의 몸도 가누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퀼리아의 능력에 몸을 맡기면 난 취약해질 것이다. 퀼리아의 기습에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제안을 내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죠. 주도권을 가진 건 루카 님이니까요.”
하지만 이 부탁을 거절한다면, 퀼리아와 나 사이의 미약한 유대도 끝이다. 퀼리아는 철저하게 코라의 사제로서만 날 대할 터다.
눈에 보이는 이득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사람이니까.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퀼리아가 배신한다면?’
위험은 미지수다. 난 인지왜곡 능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 자신도 있었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인지왜곡을 남들보다 잘 견뎌낼 것이다. 키누안의 부하들이 인지왜곡 능력에 빨리 적응한 것처럼 말이다.
“뭐, 나도 불필요하게 누군가를 죽이고 싶진 않아. 해보자고.”
퀼리아가 안도의 숨을 작게 뱉었다.
“당신의 양보를 기억하겠습니다.”
퀼리아는 한 손으로 가면을 꺼내며 반대편 손을 내게 뻗었다.
스륵.
나도 퀼리아의 손을 잡았다.
퀼리아가 가면을 썼다. 눈구멍에선 푸른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부터 발끝까지 일렁이며 사라졌다.
우웅.
포스의 인지왜곡이 내 손끝부터 흘러들어왔다.
손가락 말단부터 흐려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덜 깬 것처럼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인지왜곡으로 인한 환각이 있을 수도 있고, 환각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퀼리아의 말이 중첩된 듯 울렸다. 바로 곁에 있는데도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우우웅.
내 감각 기관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퀼리아의 손, 기분 좋을 정도로 차갑군.’
의수의 감각 센서로 체온이 느껴진다.
퀼리아와 닿은 손의 감촉만이 유일한 현실 감각이었다.
비틀.
넘어질 것만 같았다. 발이 바닥에 닿는 감촉이 없었다.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 아니면 제자리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집중이 조금만 끊어져도 현실과 괴리된 채 망망대해로 떠밀려 내려갈 것 같다.’
나는 인지가 뒤틀린 상태로 눈을 떴다.
꾸물, 꾸물.
내 불안감이 시각화된 듯이 세상은 끔찍했다.
‘환시.’
나의 주관으로 왜곡된 현실이 보였다. 통로의 벽과 바닥이 살점과 내장으로 이뤄진 것 같았다. 흥건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는 송곳니가 달린 입이 덫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퀼리아는?’
나는 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분명히 퀼리아일 터다.
‘지젤?’
그러나 지금 내 눈에는 퀼리아가 지젤처럼 보였다.
지젤이 내 손을 잡은 채로 끔찍한 지옥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끼릭, 킹, 끼리릭.
단단한 사슬에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내 손과 지젤의 손을 묶고선 잔뜩 조였다.
으득, 드득.
사슬에 짓눌린 손의 뼈와 살이 뭉개지고 있었다. 지젤의 손과 내 손이 하나의 고깃덩이처럼 엮였다.
지젤이 안내하는 지옥으로 나는 걸어간다.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건 나의 두려움이다.
우리의 뇌는 긍정보다는 부정에 민감하다. 행복보다 공포를 먼저 생각한다.
특히나 나는 부정적인 상황을 전제하는 불안적 경향이 강하다.
‘힘겹군.’
인지의 주관성이 강해질수록, 현실은 악몽에 가까워진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불쾌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난 내 안의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왜곡된 형태일지라도, 어쨌든 퀼리아와 바깥세상의 형태가 보이기라도 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직관 덕분일 터다.
‘……자기통제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정신병에 걸리고도 남겠어.’
퀼리아도 내가 경험하는 환각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터다. 환각은 주관적 인지의 영역이니까.
지젤의 모습을 한 퀼리아가 살점덩어리로 이뤄진 문을 열었다.
끼아아아아아!
문이 비명을 질러댔다. 환청이라는 걸 알아도 현실처럼 소름이 돋는다.
“다 왔습니다, 루카 님.”
퀼리아가 손을 떼며 그리 말했다. 코를 찌르던 피 비린내가 걷히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벽을 뒤덮은 살점덩어리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괜찮으십니까? 제 생각보다…….”
퀼리아가 날 바라봤다.
“별거 아니었어.”
나는 턱밑으로 떨어지는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