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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09

309
사고 지도가 있는 방에는 나와 일레이 둘만 남았다. 우린 둘이서 키누안의 사고 지도를 바라봤다.

마리아와 사리엘, 그리고 퀼리아는 특임대원 두 명의 감시를 받으며 바깥에 있었다.

치이익.

둘이 남자마자, 일레이는 갑갑한 헬멧을 뒤로 접어서 젖혔다. 무기질적인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유리알 같은 동공이 파랗게 빛났다. 감정이라도 내비치지 않으면 기계라는 게 절실히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루카, 키누안에게 이런 거추장스러운 메모가 필요해?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아키에스 빅티마의 사고 기술 중 하나인가?”

일레이가 팔짱을 끼며 턱을 괴었다. 그도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필요 없지. 내게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 이건 우릴 교란하려는 함정이겠군.”

내가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함정이 아닐 거야. 뭔가 이상해. 지금까지 키누안이 우리에게 내민 함정과 계략과는 다르다. 계책이라기엔 너무나 얕은 방식이야. 지나치게 쉬워.”

“루카,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게 네 지론이잖아. 이렇게 쉽게 정답이 나올 리가 없지 않아?”

“현실이 내 지론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자신의 가치관에 갇혀서 눈앞의 정답을 놓칠 생각은 없어.”

일레이가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의 유연성이라는 거로군.”

일레이는 푸른 눈을 잠시 감았다가 옅게 떴다. 생체 시절의 습관이 아직 그에게 배어 있었다. 훗날, 기계 신체에 완전히 익숙해지면 저런 습관마저 사라지겠지.

“키누안은 사고 지도 같은 방식을 통해 사소한 정보를 확보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이러지 저러니 해도 뇌 손상으로 인한 기능 이상이겠지.”

내가 정리하듯 말했다.

키누안은 오랫동안 아키에스 빅티마를 사용했다. 뇌 손상으로 인한 기능 이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다.’

키누안이 모종의 수단을 통해 아키에스 빅티마의 부작용을 극복했을 거란 생각마저 했다. 키누안이 종종 내게 드러낸 약점이나 ‘뇌의 기능 이상’은 연기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알 듯 모를 듯한 놈의 행태 때문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쉼 없이 고민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진실에 닿았다.

일레이가 내뱉은 고사를 빌리자면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이건 키누안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여겨야 믿을 수 있는 ‘진실’이다.

‘키누안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며…… 혼돈의 괴물로 여긴다면 믿지 못할 정보.’

여기서 키누안이 내게 심어둔 쐐기를 뽑으며 왜곡된 인지를 바로잡는다.

“루카, 네 말대로라면 키누안은 정보를 머릿속에 제대로 저장하기 힘들 만큼 뇌가 망가진 거야. 그 상태로도 온갖 추적을 벗어나며 움직이다니…… 괴물이 따로 없군.”

일레이는 여전히 키누안을 드높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뇌가 망가지고도 유유자적하게 모두를 따돌리는 괴물. 그게 일레이의 머릿속에 있는 키누안이다.

“일레이, 우리가 유리해. 키누안은 궁지에 몰렸어. 숨겨야 하는 정보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지. 놈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

“음, 그런 건가…….”

일레이는 내 말에 흐릿하게 대꾸했다. 줄곧 키누안을 추적한 일레이는 놈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키누안이 심어둔 쐐기는 뽑아내기 힘들다. 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키누안은 우리에게 몇 번이나 빈틈을 드러냈을 거야. 그러나…… 우리는 키누안이 그런 어설픈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 믿기에 빈틈조차 함정이라 여겼겠지.’

완벽한 존재는 없다. 완벽한 척할 뿐이다.

나는 키누안의 사고 지도를 외우고선 불태웠다. 남겨둬서 좋은 건 없다.

“라르스는 어떻게 된 거지? 난 너와 접촉하라고 마지막 지시를 내렸어.”

난 일레이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일레이를 관찰하며 거짓과 진실을 고민하긴 싫었다.

일레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녀석이 날 기만할지언정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 믿는다.

“합류 지점에 라르스가 나타나지 않았어. 마지막으로 개척신전에서 신호가 끊어졌다. 최악의 경우, 이미 죽었을 수도 있어.”

일레이는 숨을 고르더니 날 설득하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라르스를 버리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사리엘이라는 크롤러의 코가 키누안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우수하고, 키누안이 궁지에 빠진 게 맞다면…… 우린 키누안을 잡을 수 있어. 라르스는 군인이다. 국가를 위한 소모품이 될 각오를 한 녀석이지.”

일레이의 의견도 틀린 말은 아니다. 라르스도 소모될 각오를 하고 이번 임무에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내겐 한 가닥의 선이 있었다. 그걸 끊어내면 뭔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헤일라스가 말하던 불순물일지도 모르겠다.

“일레이, 너는 기꺼이 라르스를 버리겠지. 키누안도 나와 같은 상황이면 그럴 거야. 헤일라스라도 라르스를 내버려뒀을 거다. 하지만…… 나는 네가 아니야. 키누안이나 헤일라스도 아니지.”

나는 뒷말을 삼켰다.

‘나는 나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닳아버리는 건 지긋지긋했다. 내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방식이다.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필부의 삶을 산다는 이유로 영웅의 밑거름이 되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 난 확신하고 있다.

‘라르스는 죽을 각오가 된 녀석이 아니야. 그저 전투 기계에 갇힌 소년이지.’

라르스는 자신의 경험으로 쌓아올린 가치관이나 신념으로 ‘소모’를 선택한 게 아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어렸다. 녀석은 제국의 소모품으로 세뇌된 것에 불과하며, 희생을 자진해서 선택할 만큼 정신이 여물지 않다.

“루카, 넌 퀼리아와 행동하며 라르스를 구해라. 난 마리아 일당을 데려가 키누안을 찾도록 하지. 여기까지가 내 양보다.”

난 일레이가 그런 제안을 꺼낼 거라 예상했다.

“일이 끝나고 나서 마리아와 사리엘을 죽이지 마라. 도움이 된 협력자들이니 정당한 대우를 해줘.”

“그럴 생각이야. 지금 마리아 오가노프의 이력을 찾아보고 있어. 배경이 있어서 쉽게 건드려선 안 될 인물이니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배경?”

“벨라토 연방의 군부 고위층과 연줄이 있는 모양이야. 자세한 건 조사 중이다.”

마리아가 국가의 폭력 앞에서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 이유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 * *

내 목갑은 이반의 목줄이다. 그는 목갑을 통해 나를 감시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이번엔 그 통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이반, 저는 코라의 개척신전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저번처럼 신호가 강제로 끊어질 테니 목갑이 작동하겠죠.”

나는 목갑의 데이터 전송 주기에 맞춰서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뜸을 들인 내가 말을 마저 이어갔다.

“당신이 허락하든 말든 저는 움직일 겁니다. 제가 키누안을 찾길 원하시면 알아서 처리해주시죠. 이제 단 한 걸음입니다. 그 한 걸음을 앞두고 제 머리가 터지는 걸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 없고요.”

그래, 이건 협박이다. 난 제국의 황제를 향해 협박을 내뱉었다. 참 많이 컸구나, 루카.

난 전송 시간을 확인하고선 기다렸다.

지금이면 목갑이 데이터를 제국의 군사위성으로 쏘아올렸을 것이다. 기밀투성이 데이터이니 민간에 공개도 안 된 최신 보안기술이 덕지덕지 발려있을 터다. 어쩌면 아케인 문명의 기술을 역설계한 통신체계일지도 모른다.

스릉.

난 목갑을 더듬으며 매만졌다. 별다른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반이 내 목갑의 통제를 풀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도는 없다.’

이반의 가학적인 성향을 볼 때, 목갑의 통제를 일시적으로 풀었더라도 내게 말해주지 않을 터다.

내가 이반에서 통신하는 사이에, 일레이가 임시거처를 찾아냈다.

우리는 근처 폐건물의 잠금장치를 부수고 들어갔고, 임무 속행에 앞서 휴식하며 점검했다.

‘사리엘은 진정제를 맞은 채로 잠들어 있고…….’

일레이와 특임대원 두 명은 교대로 휴식하며 퀼리아와 마리아를 감시했다.

마리아가 날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슥.

마리아는 내게 턱짓하더니 이야기하자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의 감시를 맡은 특임대원도 따라붙으려 했다.

“감시는 됐어.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마리아는 이번 임무의 협력자다. 죄인을 다루듯 굴지 마.”

내가 특임대원을 제지했다. 마리아와 나는 복도를 빠져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너와 활동하는 조건으로 움직인 거다. 저 살인기계는 믿을 수 없어.”

마리아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일레이와 움직이는 게 꺼림칙할 것이다.

“불만이 있으면 사리엘을 데리고 여길 벗어나라. 방해가 있으면 내가 막아주지. 그쪽에게 협력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이미 충분히 도움도 됐고.”

순순한 내 말에 마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막아준다는 말이 거짓말 같진 않군.”

“저 ‘살인기계’는 내 친구이지만, 비정한 것도 사실이거든. 가끔은 짜증 나서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은 놈이야.”

마리아가 입술을 씰룩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줌마는 네가 마음에 들어. 흠, 나이 차가 있으니 애인은 힘들고, 저번에 말한 대로 데릴사위라도…….”

“난 여자가 있어. 얼굴은 예쁘고, 몸매도 날씬해.”

내가 빠르게 일축했다.

마리아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다가 일레이 방향을 힐끗 보았다.

“들어보니 부하를 구하러 가는 것 같던데?”

“멍청한 자식이 함정에 빠졌을 거다. 아직 죽을 각오가 된 놈도 아니야. 살아있다면 구하고 싶다.”

난 이반의 명령으로 라르스가 교구장을 암살했을 가능성을 배제했다. 일레이를 만나고 나서 확신했다.

‘이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키누안을 찾는 거다. 나와 일레이의 임무가 꼬일 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거야. 일레이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고.’

마리아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맥이 빠진다는 듯한 태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제국 군인인 줄 알았는데, 상당히 물렁물렁하네.”

“……그게 내 무기니까.”

내가 나직이 대답했다.

“흠, 흐음.”

마리아는 알 듯 모를 듯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가브리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에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의 존재를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가족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겉으론 강한 척해도 애정을 갈구하는 소년이 그 안에 있었다.

‘가브리엘이 선택할 일이지.’

마리아도 자식을 마냥 소모품처럼 여기는 부모는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우리엘, 라파엘, 사리엘이 저토록 따를 리가 없다.

비정한 면모도 있지만, 따스한 면도 있는 거겠지.

“아니마 이동학교를 알고 있나?”

“아, 그 이상한 여편네가 운영하는 학교잖아.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노마드들이나 알고 있는 건데…….”

“거기서 ‘가브리엘’을 찾아봐.”

마리아가 충격으로 정지했다. 그녀는 고장 난 기계처럼 가만히 있다가 서서히 신체의 말단부터 떨었다. 곧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날 돌아봤다.

“어떻게 안 거지?”

“그쪽과 닮았어. 바로 알겠더라고. 자세한 건 가서 들어봐. 한 가지만 미리 말하지, 가브리엘의 선택을 존중해라. 혹여나 강요한다면…… 더는 내가 물렁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될 거야.”

내 말을 듣자마자 마리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난 처음으로 ‘대장’이 아니라 ‘어머니’의 표정을 본 것 같았다.

“……넌 가브리엘의 친구로군. 하하, 녀석이 좋은 친구를 뒀구나.”

난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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