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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과거의 기억을 뒤적여 가브리엘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아직 제국 밖을 모르던 시절, 가브리엘은 자신의 출신을 자랑스레 이야기했었다.
‘……난 황무지에서 태어났어. 자유로운 삶을 사는 노마드 출신이지.’
노바스 행성의 사회는 복잡하다. 종족 사회와 국가 사회만 있는 게 아니다.
노바스 행성에는 종족과 국가의 틀에 갇히지 않은 방랑자 집단이 있고, 그런 집단들을 통틀어서 노마드라 부른다.
내 뇌리에 깊게 남은 암살자, 라그나타 아니마도 노마드의 일원이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되새겼다. 흐릿한 가브리엘의 언행을 하나씩 붙잡으며 잡아당겼다.
‘다섯 살 정도라서 기억이 거의 없어.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속한 집단은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날 아크바란의 보육원에 돈 주고 맡긴 거고. 이십 년 넘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마 다들 죽었겠지.’
가브리엘은 자신의 노마드 집단이 전멸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스윽.
나는 동공을 움직여 ‘가브리엘과 닮은 중년 여성’을 보았다. 험상궂은 외모와 남다른 덩치가 가브리엘을 연상케 했다.
‘가브리엘의 가족인가?’
중년 여성과 가브리엘 사이에는 혈연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난 섣불리 가브리엘과의 관계를 묻지 않았다.
“우린…… 키누안을 찾으러 왔다. 그쪽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난 루카이고, 이쪽은 퀼리아다. 댁은?”
중년 여성은 사자의 갈기와도 같은 머리카락을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마리아, 마리아 오가노프다.”
통성명이 끝나고 짧은 침묵이 일었다.
‘키누안을 찾는 목적을 쉽게 말해주진 않겠지.’
만약, 키누안을 찾는 목적에 충돌이 인다면 이 자리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공통의 적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협력 관계가 되는 건 아니다.’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마리아가 그저 키누안에게 원한이 있는 거라면 협력하기 편할 터다.
‘원한 관계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아.’
마리아는 좀 더 물질적인 이유로 키누안을 추적하고 있는 듯했다.
“마리아, 키누안은 우리가 충돌하길 원하고 있다. 우리가 협력해 정보 공유를 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물러나기로 하지. 난 개인적 원한과 ‘유물’ 확보를 위해 키누안을 추적하고 있다.”
난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 먼저 목적을 내밀었다. 어차피 마리아가 우릴 공격하더라도 난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폭력의 우위는 이쪽에 있다.’
힘이 있어야 협상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법이다.
“자상하고 친절하군, 루카. 불편한 상황에서 먼저 목적을 내뱉다니 말이야. 하지만 그만치 자신의 폭력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일이 틀어져서 선공을 받더라도 날 죽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져.”
마리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는 얼굴에 드러난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노련한 듯했다.
마리아는 귓가에 손을 대더니 동료와 통신을 열었다.
“라파엘, 우리엘. 이쪽으로 와라. 협상이다.”
잡화점엔 곧 덩치로 가득 찼다. 중무장한 사내 두 명이 험상궂은 외모로 들어왔다. 잡화점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치겠군, 가브리엘이 몇이나 있는 거야?’
가브리엘과 닮은 면모가 저들에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마리아의 유전자가 상당히 강했다.
그래도…… 다들 가브리엘보단 잘 생겼고, 마리아도 일부 취향의 사내들은 좋아할 만한 강건한 여성이었다.
옛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가브리엘은 안면 골절이 잦아서 자신이 못생겨졌다고 주장하곤 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인 듯하다.
“아들들인가?”
“아버지는 다 다르지만, 내 배로 낳은 자식들이지.”
라파엘과 우리엘은 가브리엘보다 어려 보였다. 특히 우리엘은 덩치가 커서 그렇지 놀랍게도 소년적인 외모가 이목구비에서 드러났다.
‘가브리엘과 비슷한 문신.’
라파엘과 우리엘의 팔과 어깨는 십자가나 천사 날개와도 같은 문신이 있었다. 가브리엘의 등에도 천사 날개 문신이 있었고, 저들과 같은 형태였다.
‘가브리엘의 동생들인가?’
아마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모친일 터다.
지금까지 얌전하던 퀼리아가 라파엘과 우리엘까지 보더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리아, 당신은 구시대 종교를 믿고 있군요.”
퀼리아의 언행에선 묘한 적의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이 느껴지는 건 드문 일이었다.
“구시대 종교라니 어감이 좋지 않네. 뭐, 우리 가족이 크리스천이긴 하지.”
마리아가 목덜미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슬쩍 꺼내서 들어올렸다.
“퀼리아, 내겐 남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퀼리아에게 불필요한 적대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훌륭해. 교육을 잘 받은 제국의 군인 같군. 정말 궁금한 일이야. 제국의 군인이 코라의 사제와 협력하고 있다?”
마리아가 능글맞게 말했다.
“그쪽도 이쪽 사정을 파헤치고 싶으면 정보를 내놔. 댁도 제국의 방식이 뭔지 잘 알고 있겠지? 난 먼저 양보했어. 내 양보를 유약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마리아에게 세 걸음 접근했다.
라파엘과 우리엘이 내 행동에 반응하며 총구를 들어올리려 했으나 곧 마리아가 제지했다. 만약 놈들이 방아쇠를 당겼다간, 가브리엘의 혈육이고 나발이고 내 손에 머리통이 깨졌을 터다.
“맞는 말이야. 공평해야 협상이 되지. 상황을 설명할게. 우린 얼마 전에 보더시티 경매장에 물건을 내놓았어. 힘들게 찾은 아케인 유물이지.”
“캡슐 형태의?”
“그래, 내 남자친구가 경매장의 유물 호송을 맡았지. 그때 경매장 습격으로 내 남자친구는 죽었어. 아, 원한 때문에 키누안을 추적하는 건 아니야. 지금 남자친구가 둘은 더 있으니까. 역시 난 일부일처가 맞지 않더라고.”
난 마리아의 개인 연애사를 듣기 힘들었다. 내가 왜…… 중년 여인의 방탕한 연애사를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키누안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추적하라고 댁들에게 흔적을 남긴 거야.”
……목숨이 아까우면 여기서 포기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저런 자들에겐 그런 말은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물러날 순 없지, 으음, 음, 음.”
마리아가 말하다가 귓가에 손을 댔다. 통신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우리가 먼저 키누안을 찾았군. 믿든 말든 상관은 없어.”
난 두 눈을 크게 뜨고 마리아를 관찰했다. 그녀의 사소한 감정 신호도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진실이다. 거짓말이 아니야.’
나는 퀼리아를 잠깐 쳐다봤다. 퀼리아는 전적으로 내게 맡긴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 그쪽 힘만으론 키누안을 잡기 힘들 거다.”
“우리가 협력하기엔, 목적이 충돌하지 않겠어? 둘 다 캡슐 유물이 목적에 있잖아. 난 유물을 그쪽에 넘겨줄 생각이 없어.”
마리아가 말했다.
드륵, 끽.
총기의 장전음이 났다. 우리엘과 라파엘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자꾸만 가브리엘이 떠오른다.
“경매장 판매 대금만큼 지불하진 못해도, 어느 정도의 금액은 이쪽이 지불할 수 있다. 키누안을 놓쳐서 공치는 것보다 협력해서 푼돈이라도 건지는 게 나을걸?”
“흠, 하지만…….”
마리아가 날 쳐다보더니 웃었다. 그녀는 노련하게 혓바닥을 움직여 말을 이어가려 했다. 협상에서 우위를 잡으려 들겠지.
그러나 마리아의 협상은 여기까지다. 이 이상은 내가 끊는다.
기이이잉! 콰직!
내가 의체의 출력을 단숨에 올렸다. 발 아래에서 진동이 일다가 바닥이 깨졌다. 내 발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아까 말했지? 내 양보는 여기까지다. 자신 있으면 방아쇠를 당겨라, 머저리들아. 제국의 군인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여기서 보여주지. 너희가 아직 팔다리 부러지지 않고 잘난 척할 수 있는 건…… 내 어설픈 마음가짐 때문이야. 자, 방아쇠를 당겨봐. 먼저 공격을 받는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너흴 찢어발길 수 있으니까.”
대등한 협력은 대등한 폭력을 지녔을 때나 가능한 것.
마리아의 힘이 내게 끌어낼 수 있는 협상은 여기까지다. 더는 내가 허용치 않는다.
지금도 가브리엘이 생각나서 참은 거다. 성질머리 같아선 우리엘과 라파엘 둘 중의 한 명을 피떡으로 만들어서 실력 행사했을 것이다.
매서운 침묵이 잡화점에 맴돌았다.
“……좋아, 젊은 총각. 우리가 싸워봐야 도둑놈만 좋은 일을 시키는 거지, 시작하자고.”
마리아가 손을 바지에 비비더니 내밀었다. 나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의수의 악력이 우악스러웠다.
* * *
난 마리아가 키누안의 흔적을 빠르게 찾을 수 있는 까닭을 알아냈다.
“소개하지. 내 양자, 사리엘 오가노프다.”
마리아가 크롤러 한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리아의 노마드 집단은 구성원이 대단히 복잡한 듯했다. 그중 한 명은 크롤러였다.
장성한 크롤러, 사리엘이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건가?’
크롤러 사리엘은 두 눈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크륵.”
사리엘은 나와 퀼리아 근처로 오더니 냄새를 각인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리엘, 사이보그는 제국 출신의 루카이고, 좋은 냄새가 나는 여자는 코라의 사제다. 협력자이니 기억해둬.”
“알, 았다, 마, 마리아, 마망.”
사리엘은 크롤러인 걸 감안해도 말투가 어눌했다. 행동거지를 봐도 크롤러 특유의 야성적인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속된 말로, 조금 모자란 친구였다.
“사리엘은 두 눈을 잃고 나서 후각이 극도로 발달했지. 다른 크롤러와 비교해도 독보적인 코를 지녔어.”
마리아가 주머니에서 큼직한 육포를 꺼내더니 사리엘에게 넘겼다.
사리엘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마리아의 곁에 붙어있었다.
‘자식이라기보다 애완동물 같군.’
마리아는 사리엘과 귓속말로 무어라 떠들었다. 사리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마리아 일당은 경매장에 유물을 넘기면서 일종의 보험으로 ‘특정한 냄새’를 묻힌 모양이었다. 사리엘이 특히 민감하게 여기는 냄새라고 했다.
‘캡슐 유물이 있는 곳에 키누안이 있다.’
어쩌면 마리아 일당이 보더시티에서 키누안을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집단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사리엘을 따라 이동했다. 마리아가 날 보더니 말을 내뱉었다.
“노마드 집단 중 상당수는 나쁘게 말해서 사회부적응자 소굴이지. 사리엘만 해도 자기 부족에서 쫓겨난 걸 내가 거뒀어. 그쪽도 사회 적응을 힘들어하는 별종 같은데, 관심 있으면 말해. 내 딸 사윗감을 찾고 있으니까. 날 닮아서 미녀야.”
으음, 자랑은 아니지만, 난 보편적인 미녀에 속하는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다. ‘마리아를 닮은 미녀’와는 접점을 가지고 싶진 않다.
“마음만 받지.”
내가 짧게 대답했다.
사리엘의 후각이 도달한 곳은 어느 창고 건물이었다.
“마, 망, 여, 기, 우리, 물건. 있, 다.”
사리엘이 큼직한 손가락으로 건물을 가리켰다.
꾸욱.
나는 먼저 나서려는 퀼리아의 어깨를 잡아서 눌렀다.
‘위험을 무릅쓰는 건 마리아 일당이 한다.’
아직 난 마리아 일당의 저력을 모른다. 그들의 실력을 완전히 파악하고 싶었다.
“라파엘, 우리엘. 가서 확인해.”
마리아가 아들 두 명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손짓했다.
라파엘과 우리엘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날렵하게 기동하며 좌우로 나뉘어서 건물 창문으로 붙었다.
라파엘이 손윗형제답게 더 능숙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엘은 경험이 부족한 소년답게 창문에 손대더니 열려 했다.
“멈…….”
마리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일이 일었다.
콰- 앙!
우리엘이 붙었던 창문에서 폭발이 일었다.
우린 인간이 육편으로 조각나는 걸 보았다. 피와 살점이 처참하게 튀었다. 우리엘이란 존재는 고깃덩이로 변했다.
“우, 우리엘이, 죽, 었어, 마망! 크아아아아앙!”
흥분한 크롤러 사리엘이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려 했다.
휙! 콰직!
마리아는 재빨리 사리엘의 머리를 잡아채더니 뒤로 내던졌다.
“네 코가 없으면 도둑놈을 못 찾잖아! 넌 뒤에 있어! 인간 자식은 또 낳으면 돼!”
마리아는 이를 드러낼 정도로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
창문을 들여다보던 라파엘의 통신이 우리의 귓가에서 퍼지고 있었다.
-……도망.
라파엘도 말을 마치지 못했다. 푸른 광선이 창문을 깨부수며 라파엘의 이마까지 관통했다.
우이이잉! 펑!
라파엘의 이목구비에서 빛이 번지는가 싶더니 머리 내부에서 폭발이 일 듯이 터졌다.
“퀼리아.”
내가 짧게 말했다. 퀼리아가 가면을 썼고, 그녀는 투명하게 흐느적거리더니 인기척조차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