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키누안은 아직 보더시티에 있다. 퀼리아는 그 증거자료를 내게 내밀었다.
“키누안의 동선을 알고 있으면서 여태 놔뒀다는 건가?”
홀로그램에는 보더시티에 퍼진 신도들이 보낸 키누안의 사진,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고도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신도의 보고를 받고 찾아갈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까요. 그리고 키누안을 제압할 무력이 부족합니다. 군대가 아니라 우수한 소수의 전투원이 필요하니까요.”
퀼리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키누안을 잡기 위해서 보더시티에 군대를 풀어놓기도 힘들며, 설사 풀어놓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 단순히 숫자만 많아 봐야 혼란만 더 커질 것이다.
우우웅.
우리가 탄 공중차량은 가장 최근에 키누안이 나타난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딱, 딱.
난 양손의 엄지를 부딪치며 생각에 빠졌다. 집중적 사고가 부드럽게 머릿속에 녹아들면서 가속했다.
‘키누안은 자신을 외부의 적들에게 고의로 노출하고 있다.’
자신을 미끼로 삼고 있었다.
‘난 키누안의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내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지.’
키누안을 찾아 몰려들 자들이 얼마나 될까? 일단은 나도 그중 하나이긴 하다.
‘하지만 어쭙잖은 자들이 찾아내진 못하게 움직이고 있어.’
나는 한쪽 입술이 사납게 씰룩이는 걸 참지 못했다.
“이건 키누안의 초대장이로군.”
아예 몸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찾을 수 있게 완전히 드러낸 것도 아니다.
키누안은 일정한 수준에 이른 실력자들만이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지금 키누안을 찾아가는 건 놈의 계략에 일부야. 함정을 파놨을 수도 있다.’
머리가 점차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까지 예상해서, 날 머뭇거리게 만드는 거라면?’
키누안의 미끼 작전은 단순한 허세일 수도 있다.
어차피 추적자들을 떨치지 못할 거라면, 찾기 쉽게 단서를 남겨서 ‘함정’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걸 수도 있다.
매사에 신중한 이들이라면 ‘너무 쉬운 정답’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에 익숙한 자들은 일이 지나치게 잘 풀리면 불안해한다. 나도 그런 부류였다.
‘만약, 키누안의 허세라면? 추적자들을 머뭇거리게 만들어서 시간을 벌려는 건가? 정신전이기를 사용할 시간이 필요해서?’
내 머릿속에선 선택지가 무수히 많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키누안이란 존재는 혼돈에 가까우며 무한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수읽기가 가장 힘든 자다.
‘함정이든 말든 치고 들어가야 한다. 설사 함정이라도 내 힘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어.’
난 결단을 내렸다.
“키누안의 부하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데드로닌은 키누안을 숭배하는 일종의 종교집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키누안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죠. 키누안이 보더시티에 도착하고 나서 만든 조직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결속력과 충성심이 강합니다.”
“키누안은 심리 장악에 능해. 여러 가지 말로 꾀어냈겠지. 보더시티에는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회부적응자도 많았을 거고. 제국에서 구르고 구른 키누안에겐 다루기 쉬운 놈들이었을 거야. 그 규모는 어느 정도지? 연이은 사건으로 소모가 심했을 텐데?”
“추정하기론, 열댓 명 정도 남았을 겁니다. 저번 사태로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으니까요.”
나는 감청을 감안하고 라르스와 장거리 통신을 시도했다.
-지금 이동 중입니다. 놈을 찾으셨습니까?
“흔적은 찾았다. 넌 여우와 접선하고 이쪽으로 와.”
-드디어 때가 왔군요.
라르스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진짜 임무가 코앞에 있었다.
짧은 통신이 끝났다.
쭈욱.
난 흐물흐물한 영양젤리를 짜먹으며 기력을 보충했다. 코가 찡할 정도의 암모니아 냄새가 나서 정신이 바짝 드는 맛이었다.
스륵.
나는 손을 움직여 무장을 확인했다. 군인의 습관이다.
충격권총 루이나, 고압축 중량병기 크루시스, 화광 시리즈를 비수로 만든 불나방 두 자루다. 불나방은 원래 세 자루였으나 한 자루를 키누안에게 사용하고 회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별 실용성은 없지만…… 그라켄 부트.’
그라켄 부트는 장식용 단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라켄 부트까지 사용할 일은 근래 거의 없다시피 했다.
“퀼리아, 네 전투 능력은 어느 정도지? 아마 복잡한 전황이 벌어질 거다. 내가 쓸 수 있는 말의 능력은 알아둬야 해.”
“각국의 최정예 군인과 싸워도 밀리지 않습니다.”
“근위대급은 된다는 소리겠군. 뭐, 이해했어.”
난 어렴풋이 퀼리아의 전투력을 가늠했다.
‘사실은 근위대 이상이겠지.’
나도 교구장의 능력을 봤다. 교구장의 호위와 측근으로 붙을 정도면 대단한 전투원일 것이다.
‘무엇보다 인지왜곡 능력을 능숙하게 전투에 응용한다면…… 허를 찌르기 좋아. 조건에 따라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다.’
어느덧 공중차량이 하강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보더시티의 구도심지였다. 보더시티 초창기에 중심이었던 구역이었다.
모든 도시가 그렇듯이 구도심지는 시간이 지나 노후화된다. 보더시티의 구도심지도 마찬가지였다. 재개발 없이 규제 없는 증축을 거듭하다 보니 난잡한 성채처럼 얽혀 있었다. 하나가 무너지면 연달아 다른 건물도 가라앉을 것처럼 불안정했다.
구도심지에는 마땅한 공터나 비행장이 없어서 착륙까진 어려웠다.
덜컹.
나와 퀼리아는 적당한 건물의 옥상에 붙어서 뛰어내렸고, 공중차량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신전으로 돌아갔다.
“키누안이 마지막에 발견된 곳이 저기입니다.”
퀼리아가 구도심지의 시장을 가리켰다.
나와 퀼리아는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에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우릴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으나 건드리는 멍청이는 없었다.
퀼리아는 코라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금자수가 놓인 백의는 눈에 띈다. 연방으로 따지면 관료 제복이나 마찬가지이니 부랑배에게 시비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딸랑.
우린 시장가에 있는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디셈교의 신도라는 걸 나타내는 빛 형태의 기호 같은 게 있었다.
우뚝.
나와 퀼리아는 잡화점 안쪽 가판대에 놓인 ‘신선한 머리’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우린 둘 다 신음과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신선한 머리 옆에는 목의 깔끔한 절단면이 인상 깊은 몸뚱이가 보였다.
“이 시신은 잡화점의 주인입니다. 독실한 신도였죠.”
퀼리아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며 덤덤하게 설명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우릴 초대한 게 확실해지는군요.”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크루시스에 내 손가락이 탁하고 걸렸다.
‘누군가 여기로 들어오고 있다.’
바깥의 발걸음이 꺾이면서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단순한 손님이라면 쫓아내면 그만이지만, 아니라면 대응해야 한다.
“어이, 이거 무슨 꼬라지야? 살인 현장을 내가 지금 목격한 건가?”
넉살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문 사내가 잡화점 입구에 서 있었다. 팔은 왼쪽만 의수였고, 가슴 보호구에 새겨진 오랜 전투의 흔적이 위압적이었다.
끼릭.
난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며 분석했다.
나이가 제법 있는 사내였다. 전신의체가 아니었고, 생체 외형만 보면 오십은 넘어 보였다. 반백의 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용병.’
이게 직관적인 내 평가였다.
용병이 지금 이 순간에 여길 방문한 게 우연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는 건 안일한 마음가짐이다.
‘저 용병 사내도 어떤 정보에 이끌려 여기에 온 거다.’
퀼리아도 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도 코라의 군인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기에 상명하복에 익숙할 것이다.
저벅.
사내가 잡화점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우리와 협력하고 싶은지 웃으면서 손을 바지에 비볐다. 당장 악수라도 건넬 태세였다.
‘불안하다.’
직감이 울렁거렸다. 내 오감은 맹렬하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단순히 사내의 출현으로 불안한 게 아니었다.
위잉.
이윽고, 나는 직감적 불안의 까닭을 인지했다.
사내의 관자놀이에는 광학 조준기의 점이 희미한 녹빛으로 반짝였다.
퓻!
바늘이 나아가는 듯한 뾰족한 총성이 퍼졌다. 저격이었다.
털썩!
사내는 옆으로 휘청이더니 문에 기대며 쓰러졌다. 누가 보면 술에 취해서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관자놀이에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가 나가서 저격수를 찾겠습니다.”
퀼리아가 포스 촉매인 가면을 꺼내며 말했다. 그녀의 인지왜곡 위장이라면 저격을 피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럴 건 없어. 저격수는…… 우리가 이곳으로 들어가는 걸 봤을 거다. 그런데 우릴 공격하지도 않았고, 난 위협도 느끼지 못했어. 적인지 아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아.”
나는 죽은 사내를 잡화점 내부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릴 공격할 거면 벌써 시도했을 거야.’
나는 키누안이라는 인력에 이끌린 자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도 키누안의 적들을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키누안은…… 본인을 미끼로 삼아 ‘자신의 적들’을 여기로 모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실력자들이 모이면 필시 충돌이 일어날 거고 서로를 죽일 테니까.
‘그러면 키누안이 좋아하는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잡화점의 뒷문이 열렸다.
난 무기 없이 두 손을 들어서 대화를 시도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키누안을 찾고 있다면 우리와 이야기하지. 그쪽도 대화를 생각하고 나타난 거겠지?”
잡화점의 어두운 가판대 사이로 저격총을 든 여자가 걸어나왔다. 주름과 흉터가 뒤섞인 얼굴의 중년 여성이었다. 차림새와 무장을 보니 그녀도 용병 같았다.
중년 여성은 나처럼 팔다리만 의체였다. 인공피부를 쓰지 않아서 기계부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의체가 아닌 생체도 중년 여성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다부졌다. 타고난 강골인 듯했다.
“젊은이가 판단력이 좋군. 그러니 키누안을 찾고 있는 거겠지.”
“방금 저격해서 죽인 사내와 그쪽은 원한 관계인가?”
“하하, 전 남자친구야. 워낙 끝이 안 좋게 헤어졌거든.”
“그래도 전 연인이었는데 바로 죽이다니 과감하군.”
나는 서서히 올렸던 팔을 내렸다. 대화가 가능한 상대였다.
“내가 딴 남자랑 바람나서 깨졌거든. 덕분에 저놈은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 여자도 간수 못 하는 병신이 됐지. 그 때문에 날 보면 죽이겠다고 몇 년째 벼르고 있었거든. 나도 선수를 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이해해줘.”
“흠.”
중년의 치정관계를 들은 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중년 여성은 내 반응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이 우리들 사이에 남아있었다.
“그러니 경계 풀자고. 하여튼 그래, 댁들은 어디서…… 온 거지? 기묘한 조합이로군. 한쪽은 제국 출신 같고, 다른 하나는 코라의 사제?”
중년 여성이 한쪽 눈만 재치 있게 깜빡이며 말했다.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원인은 모르겠다. 처음에는 라그나타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라그나타는 묘하게 초탈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중년 여성은 굉장히 세속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불필요한 살상도 마구 저지를 것 같은 여자였다.
“……제국의 젊은이, 그리고 사제님. 참고로 내 동료들이 근처에 있어. 댁과 우리가 한바탕 난리를 피우면 키누안만 좋아하겠지?”
중년 여성이 믿고 있는 구석을 넌지시 내뱉었다.
난 아까부터 강렬한 기시감 때문에 집중이 힘들었다. 중요한 무언가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넌 노마드 쪽 용병이로군.”
내가 중년 여성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그녀의 얼굴과 특징을 유심히 살폈다.
“뭐, 용병이라고 보면 되지. 젊은이가 이 아줌마에 대해 궁금한 게 많나 보네? 이참에 가슴, 허리, 엉덩이 사이즈도 말해줘? 103…….”
중년 여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덩치가 어지간한 남자보다 커서 사소한 동작도 큼직큼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익숙하다.
곧 나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젠장할, 가브리엘…….’
저 중년 여성은 가브리엘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