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경험과 지식은 경중을 따질 것 없이 둘 다 중요하다.
지식이 없는 경험은 얄팍하고, 경험이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
아크레시아, 벨라토, 코라.
세 국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성향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막상 경험해보면 근본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색깔은 다를지라도 그 틀은 같았다.
보더시티의 교구장과 정신치료사 가야는 포스 사용자이며 코라의 고위층이다.
‘형이상학적인 신앙과 믿음을 가졌으며, 물리 현상을 초월한 초능력을 자신의 손에서 자아내는 자들.’
생도 시절에 나였다면 저들을 아득히 머나먼 존재라고 여겼을 것이다. 같은 종이라는 느낌마저 받지 못했겠지.
자, 생각해보자, 루카. 가까이서 본 저들이 초월적인 존재이던가?
보통 사람보다 수양이 깊고 통찰력이 좀 더 있는 자들에 불과하다. 초월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가야 선생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도망친 자였다. 그는 고귀할 순 있으나 결코 위대하진 않았다. 그가 내팽개친 짐은 동생이 대신 짊어졌다.
가야의 동생이자, 보더시티의 교구장. 그는 짊어진 짐에 짓눌려 몸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보더시티의 교구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고 있다.’
교구장이 지금까지 어떤 짓을 했는지 내가 전부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키누안과 손을 잡을 정도라면 어지간한 범죄조직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겠지.’
교구장의 행적을 외부에서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타락한 성직자라 손가락질할 터다. 그러나 그의 악덕이 없었다면 보더시티의 교구는 진작 무너졌겠지.
어쩌면 교구장에겐 키누안 같은 자와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은 방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그에겐 그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키누안은 곁에 둬선 안 될 부류의 사람입니다. 타인을 이용하기만 하죠. 키누안과 함께 한 자는 모두 배신을 당했고 파멸했습니다.”
내가 묵직하게 입을 뗐다. 과거가 뇌를 스쳐지나갔다. 키누안은 혼돈의 상징이자 파멸의 징조였다.
키누안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절묘하게 비집고 들어간다. 예나 지금이나 심리 장악의 귀재였다.
“독이 든 성배라도 마셔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키누안은 수년 동안 좋은 협력자였습니다. 작은 지원으로도 큰 결과를 가져오는 자였고, 그 효율이 무척 좋았죠.”
“키누안과 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만능열쇠를 가진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든 키누안을 부르면 해결이 되니까요. 심지어 놈은 무리한 지원이나 대가도 요구하지 않죠. 그래서 교구장님도 점점 키누안에게 의존하게 됐을 겁니다.”
난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했다.
날 바라보는 교구장의 시선이 점차 바뀌고 있었다. 어느덧 호의에 가까워졌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당신은 키누안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군요. 역시 키누안의 추적자답습니다.”
교구장은 내가 제국의 유명인사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보더시티에 있는 동안 쟈파 밑에서 일하면서 키누안을 추적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키누안은 누군가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척 살갑게 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용무가 끝나면 흔적을 지우듯 불을 지르고 떠나죠. 이번엔 교구장님께서 그 불길에 휘말리신 겁니다. 키누안이 이번엔 ‘무엇’을 얻었는지 궁금하군요. 놈을 찾을 단서가 될 겁니다.”
교구장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다른 사제들과 이야기해보죠.”
교구장이 팔찌에 연결된 사슬을 가볍게 휘둘렀다. 사슬은 저절로 팔찌에서 떨어지더니 내 목갑을 둘러쌌다.
촤르륵!
사슬은 포스의 빛을 머금은 채로 내 목에 달라붙었다.
“제가 자리를 비워도 감속장이 몇 시간은 유지될 겁니다.”
교구장은 그리 말하며 방을 나섰다.
난 목덜미를 만지다가 가야를 쳐다봤다. 가야는 수심이 드리운 얼굴로 찻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 치부를 루카 씨에게 보이고 말았군요. 아우님의 말처럼 전 비겁한 사람입니다.”
“……가야 선생은 보더시티 교구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던 거지? 아예 이쪽과 연을 끊고 살았을 테니까. 댁의 성정을 볼 때, 알았다면 어떻게든 지원하고자 노력했을 거야.”
내 나름 위로랍시고 한 말이다.
“몰랐다는 게 면죄부가 되진 못하죠.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의식적 회피든 나태함이든 간에 제 잘못입니다.”
가야는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다. 죄책감을 크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찻잔을 마저 비우고선 주변을 살폈다. 내 생각보다 개척신전은 위험천만했다.
‘그리고 가야를 인질로 삼는 것도 의미가 없어. 가야는 이미 교구장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인질로 잡히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거야. 교구장의 언행을 보아, 형제의 희생을 꺼리는 자도 아니고.’
난 목이 꺼끌꺼끌한 걸 느꼈다.
‘목갑이 신전에서 반응할 줄도 몰랐어. 목갑의 장치가 폭탄이라면…… 지금 내 목숨은 교구장에게 달린 거다.’
이렇게 쉽게 교구장에게 내 생사를 넘겨줄 줄은 몰랐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혀도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게 우리 세상이었다.
‘그래서 교구장도 안심하고 있어. 내 목숨을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측근과 회의하면서 내 처분을 논하고 있을 거야.’
난 이미 직감했다. 협상이 틀어지면 교구장은 날 죽일 것이다.
교구장은 자신의 악행과 치부를 내게 드러냈다. 내가 이걸 바깥에 퍼트린다면 교구장도 끝장이었다.
‘회의 결과에 따라 내 생사가 결정되겠군.’
나도 최악의 결과를 염두에 두며 다른 계획을 머릿속에서 짜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최악보단 차악이나 차선의 결과가 올 것 같았다.
‘……아마 교구장은 나와 손을 잡을 거야.’
교구장에게도 다른 방도가 없다. 키누안이 경매장에서 탈취한 유물은 그에게도 몹시 중요한 것이겠지.
덜컹.
문이 열렸다.
회의를 마친 교구장이 열린 문 틈에 서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형님은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지금부턴 외부인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니까요.”
교구장의 냉랭한 말을 들은 가야가 말없이 일어섰다. 그는 나와 교구장에게 목례하고선 복도 너머로 걸어갔다.
* * *
교구장은 새로운 인물과 응접실로 들어왔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여성이었는데 전신의체 귀족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절도 있는 자세로 교구장 곁에 서 있었다.
‘……전투원이로군.’
난 여성 사제를 훑어보곤 고개를 돌렸다. 짧은 관찰로도 그녀가 전투원이라는 게 보였다. 언뜻 보면 나풀거리는 사제복이지만, 바짓단과 소매를 조여서 활동성을 높인 형식이었다. 펑퍼진 옷에는 무기를 숨길 만한 공간도 많았다.
‘그리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군인이나 전사다.’
여성 사제의 목덜미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만 봐도 단련된 근육이 드러났다.
“이쪽은 퀼리아 아소입니다. 제 전속 호위사제죠.”
교구장이 퀼리아를 소개했다. 퀼리아는 짧은 목례로 내게 인사했다.
당연히 퀼리아도 포스 사용자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포스 촉매가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당장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많은 비밀을 공유할 만큼의 최측근인가 보군요.”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절 지키지 못하니까요. 지금까지 키누안과 만날 때마다 퀼리아가 동행했습니다.”
교구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퀼리아에게 눈짓했다.
끼익.
퀼리아는 방의 벽을 따라 돌면서 바깥과 창밖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교구장님.”
확인을 마친 퀼리아가 말했다. 웃음기가 없는 사무적 어조였다.
“신전의 사람들이 전부 제 편인 건 아닙니다. 본국에서 온 감시자도 있죠. 제 적은 내외부에 모두 있으니까요.”
“대충 예상이 가능합니다. 크고 오래된 집단일수록 내부 알력이 심한 법이죠.”
나도 위정자와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
현재 교구장이 어떤 처지인지는 단편적인 흔적만으로도 훤히 보였다.
“……키누안과 저의 협력 관계는 파올로 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난 눈을 슬쩍 들어서 교구장을 살폈다. 괜히 보더시티의 교구 책임자가 아니었다. 그는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럼 쟈파 상사와 키누안의 관계를 잘 알고 계시겠군요.”
“간접적으로 형님도 엮여있으니 관심이 없을 수가 없죠. 쟈파 상사가 당신을 통해 키누안을 추적하는 것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교구장은 보더시티의 흐름을 무지하게 관망한 게 아니었다. 그도 그 밑에 흐르는 관계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크레시아, 벨라토, 코라. 삼국 어디 하나 쉬운 상대가 없군.’
난 키누안을 추적하면서 코라의 냄새를 지금까지 맡지 못했다. 내가 코라에 대한 경험이 적기도 하지만, 저들이 폐쇄적인 비밀주의를 잘 유지했다. 자신들의 흔적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쟈파의 남편, 파올로 콴은 제대로 된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케인 문명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였죠. 기이한 집착도 있었고, 자본까지 갖추니 제법 심도 있는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소 뒷걸음질하다 쥐 잡는다’라는 옛말이 파올로 콴에게 딱 들어맞았죠.”
교구장이 말하다가 중간중간 내 안색을 살폈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저도 깨끗한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그 누구보다 더러운 일을 많이 한 놈이니까요.”
내가 눈치껏 말했다.
“파올로 콴이 가진 자료와 유물 중에선 바깥에 유출되면 안 될 것도 있었습니다. 본인은 그 가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지만요.”
“당시 파올로 콴은 키누안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자료와 유물을 훔치기가 쉽지 않았겠군요.”
“몇 번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우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키누안이 먼저 우릴 찾아왔죠.”
그 이후의 일은 뻔했다. 키누안은 파올로 콴과 쟈파를 배신하고…… 교구장에게 붙었다.
‘그리고 파올로 콴의 가족을 파탄 냈지.’
나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갈무리했다.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에게 일어난 비극의 원흉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키누안이 배신자라는 걸 알면서도 곁에 두신 게 실수입니다.”
나도 방금 내 말이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굳이 공격적으로 교구장을 탓할 건 없었다. 가끔 난 이런 부분에서 미숙했다, 아니, 자주 미숙하지.
“정당한 지적입니다. 저는 오만했습니다. 키누안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여차하면 제거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키누안은 보더시티 교구 유지를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때론, 제가 맡기지 않은 일도 제 마음을 헤아려가며 해결해 주더군요.”
그게 아키에스 도미니의 역할이다. 직접적인 명을 내리지 않아도 황제의 뜻을 알아서 수행한다.
한숨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키누안을 친구라고 여겼습니까?”
내가 정곡을 찔렀으리라.
“부정할 수 없군요. 출신과 종교, 이념을 초월한 우정이 우리 사이에 쌓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키누안에 대한 경계를 풀고 말았죠.”
키누안은 유대를 쌓고 그걸 무너뜨린다. 그 행적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열하고 잔혹했다.
그러나 나조차도 종종 의문이 든다.
키누안을 직접 만나보면……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언행엔 늘 진심이 서려 있었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타인을 대했다.
‘괴인.’
내 머릿속의 키누안이 다시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난 입을 열어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서 놈이 이번에 가져간 게 무엇입니까? 그걸 알아야 제가 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구장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