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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98

298
보더시티를 흔들던 혼란의 기세는 잦아들고 있었다.

앙귀스 레지나의 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녀는 공연 내내 종족 간의 공존과 평화를 떠들었고, 쟈파 상사와 손수공업이 화해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표면적으론 보더시티의 갈등과 분쟁이 종결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밑에 깔린 계략과 음모를 아는 자는 몇 없었다.

손석재의 죽음도 소요가 끝나고 안정된 뒤에 발표될 것이다.

‘보더시티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어. 일시적으로 막은 거지. 또 이런 일이 생길 거야.’

국가와 사회에서 완벽하게 해결되는 문제란 없다시피 했다. 문제가 생기면 미봉책으로 사태를 억누르는 게 전부다. 이번에 힘겹게 밀봉하더라도, 언젠가 폭동과 전쟁 같은 형식으로 사회적 문제와 갈등은 폭발할 것이다.

사회적 갈등에 대한 정답은 없다. 통치자와 위정자들조차 문제가 당장 터지지 않게만 미묘한 균형을 잡는 게 고작이다.

앞으로도 보더시티에선 내 시야 바깥의 사건이 무수히 많이 일어날 것이다.

앙귀스 레지나는 손석재의 양녀로서 손수공업의 지분을 차지하고, 손석재의 가족과 협상하면서 연방 정부와 거래할 것이다.

이스마엘도 손수공업의 MAU 기술과 설계를 전략무기연구부 산하로 가져오려고 할 것이고, 앙귀스 레지나와 쟈파의 협력을 구하려고 할 터다.

이들만 손석재의 죽음으로 찢어진 이권을 노리는 게 아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 손석재의 죽음은 또 다른 혼란을 만들어낼 터다.

그러나 이제 이건 그들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내 개입은 여기까지였다.

뚝, 뚝, 뚝.

난 고개를 돌려서 창문을 응시했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이스마엘과 헤어지고 나서 싸구려 호텔로 들어왔다. 라르스도 옆방에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쏴아아아.

어느덧 빗소리가 격렬했다.

거리의 간판과 홀로그램 광고 중 일부는 전기합선이라도 일어났는지 깜빡거리다가 꺼졌다.

다소 소란스러운 밤이었다.

‘날이 밝으면 가야 선생을 찾아간다.’

당장은 잠이 오지 않지만 눈을 감아둬야겠지.

철퍽.

난 빗소리 사이에 섞인 이질적인 발걸음을 들었다. 슬그머니 창문을 바라보니 샛노란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똑, 똑.

살벌한 안광과 달리 행동은 공손했다. 샛노란 안광의 주인은 조심스레 창문을 두드렸다.

‘보얀.’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뒤로 물러나며 방 안의 조명을 켰다.

“보얀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볼 때마다 덩치가 커지는 보얀이 엉거주춤하게 창문을 넘어서 들어왔다.

“어떻게 날 찾았지?”

“차관님에게 물어봤습니다.”

“이스마엘도 내 정확한 위치는 모를 텐데?”

“요즘 후각이 많이 예민해져서요. 돌아다니다 보니 루카 씨의 냄새를 잡을 수 있었어요.”

보얀이 머쓱하게 자신의 코를 툭툭 쳤다.

“타고난 사냥꾼이군. 비가 오는데도 내 냄새를 찾아오다니 놀라워.”

난 보얀의 팔다리를 쳐다봤다. 라르스에게 부러졌을 팔다리에는 부목조차 없었다.

내 시선을 느낀 보얀이 창피하다는 듯이 웃었다.

“깔끔하게 부러진 덕분에 움직일 정도까진 붙었어요.”

난 어이가 없었다. 반나절 만에 부러진 뼈가 자력으로 얼추 붙는다고?

우월한 육체와 높은 신진대사의 결과물이었다. 더군다나 보얀은 신체 활성도가 가장 높은 성장기였다.

“그래, 뭐. 그 튼튼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으음, 제가 인사하러 온 게 이상하거나 싫으신 건가요?”

그렇게 말하니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거기 앉아. 싸구려 숙소라서 음료도 없어. 마실 게 필요하면 수돗물을 떠서 마셔라.”

나는 구석에 있는 의자를 발로 끌어서 보얀의 발치까지 밀었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하죠. 이렇게 무사하신 걸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보더시티 바깥에서 루카 씨가 실종됐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실제로 실종되긴 했지. 자세한 이야기는 너한테 말할 일이 아니지만 말이야.”

무쉬르 알 카슈라와의 동거는…… 내게 유쾌한 기억이 아니다.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악몽으로 남을 터다.

“루카 씨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요. 손석재와 차관님 사이에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도 있었고요…….”

난 보얀의 말을 들었다. 예상대로의 사건과 흐름이 그간 있었다.

‘내가 보더시티에 계속 머물렀다면, 이스마엘은 손석재의 암살을 내게 부탁했을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말이지.’

나는 보얀의 손과 얼굴을 관찰했다. 전투의 흔적은 최근의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투 훈련을 하고 있나?”

“종종요.”

“그렇게 싸움을 싫어하더니 받아들이기로 했나 보군.”

“제 장점을 더 이상 묵히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해서 연방 사회를 기어올라가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른 크롤러와도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요.”

“거리의 크롤러들? 너와 맞지 않을 텐데?”

난 보얀의 이야기에 제법 흥미가 생겼다.

“전 다른 크롤러를 경멸하고 깔보고 있었어요. 지금도 사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죠. 제 동족들 대다수는 더럽고 멍청하며 근시안적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제 동족입니다. 타고나길 그러니 어쩔 수 없죠. 저들은 바뀌지 않을 테니…… 제가 저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죠.”

보얀의 내적 갈등이 느껴진다. 동족을 향한 애증이 있었다.

“네가 크롤러 사회를 연방으로 편입시키고 이끌고 싶다면…… 일단은 크롤러 사회에서 존중받는 사람이 돼야 해. 현실적으로 보면, 네가 크롤러를 납득시키고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은 힘의 논리뿐이지.”

“맞아요. 제가 설사 연방의 관료로서 순탄하게 승진하더라도 동족들은 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크롤러와 만나면서 그걸 깨달았어요. 저들의 방식을 깔보고 무시해선 존중을 얻을 수 없죠.”

하지만 무척이나 어려운 길이다. 크롤러로서도 우수해야 하고, 관료로서도 성취해야 한다.

“크롤러 사회에는 저와 같은 자들이 분명히 더 있을 겁니다. 두려워서 나서지 못할 뿐이죠. 지금까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이니까요.”

나는 듣다가 움찔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보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런 자들의 빛이 되고 싶습니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거죠. 크롤러라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증거요. 제가 묵묵히 걸어간다면 누군가는 따라올 겁니다. 제가 도중에 지쳐 쓰러지더라도, 닦아온 길을 따라온 자가 저보다 더 먼 곳까지 걸어가겠죠.”

혁명과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중첩의 결과물이다.

‘……노엘 뮬리즈카.’

아키에스 빅티마의 창시자가 떠올랐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노엘은 무기력한 하층민의 희망이 되고자 했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캄캄한 어둠을 헤쳐나가며 길을 개척했다.

선구자의 발걸음은 위대한 이정표이자 빛이 된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그 행동 자체가 위대한 것이지.’

보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냥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요.”

보얀도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길을 바꾸진 않았다.

크롤러의 수명은 인간보다 짧다. 보얀의 사춘기와 성장이 빠르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타인의 성장과 변화는 빠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내가 잠깐만 눈을 떼면 다들 금세 달라졌다.

‘날 바라보던 자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헤일라스도 달라지는 날 볼 때마다 속으로 깜짝깜짝 놀랐을 것이다.

“뭐, 잘해봐라, 보얀. 역시 넌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거다.”

보얀도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야 은혜에 보답하는 거니까요.”

보얀이 들어올 때처럼 창문을 열더니 몸을 창틀에 걸쳤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보얀을 바라봤다. 비바람이 그의 등 뒤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야나카와는 그냥 친구 사이인 거냐?”

방금까지 자신감 넘치던 보얀은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머뭇거렸다.

“……적어도 야나카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하, 그럴 줄 알았어.”

보얀은 작별인사로 고개를 숙였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보얀은 똑똑한 녀석이다. 내가 심상치 않은 일에 휘말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을 터다.

살아있는 날 보는 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 * *

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밤새 불던 비바람은 그쳤다.

퉁.

내가 라르스가 있는 옆방의 벽을 두드리며 짐을 챙겼다.

끼익.

문을 여니 준비를 끝낸 라르스가 복도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본 임무에 들어가겠군요. 어제 임무는 몸풀이 겸으로 해서 재밌었습니다.”

라르스는 나와 제법 친해졌다고 느꼈는지 농도 던졌다.

‘내가 맡긴 일을 라르스가 척척 잘 처리하긴 했어. 괜히 일레이의 특임대로 뽑힌 건 아니군.’

나도 일처리가 말끔한 라르스에게 호감이 있었다.

‘예전의 근위대원들은 이런 관계를 수십 년이나 지속했다.’

제국 근위대의 군벌화는 이상한 게 아니었다. 엄격한 선별검사와 강박적인 충성교육으로도 근위대 내부의 유대가 쌓이는 걸 막지 못했다.

복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근위대원은 황실과 제국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상관과 전우를 우선하게 된다. 이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근위대의 몰락도 그 때문이었지.’

황실은 근위대의 군벌화를 줄곧 견제했다. 그들은 근위대의 대체제를 연구했으나, 그 성과가 나오기도 전에 헤일라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해 근위대의 카리스마가 되었다. 황실이 위협을 느낄 만큼 말이다.

……나와 라르스가 지금처럼 임무를 수행하며 수십 년간 복무한다고 생각해보자. 결단의 순간, 라르스는 제국을 배신하고 내 편을 들 수도 있다.

실제로도 폭풍기에서 근위대는 그런 식으로 분열했다.

“루카 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라르스가 가만히 있는 내게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좀 피곤하군.”

“이번 임무가 끝나면 전신의체로 바꾸시죠. 생체는 아무래도 휴식이 많이 필요하니까요.”

라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신의체를 권했다. 제국에서 전신의체는 좋은 것이며 선망의 대상이다.

“……고려해보지. 정기 연락 때, 일레이에게도 준비하라고 말해둬.”

나와 라르스는 새파란 새벽 기운이 걷히기도 전에 가야의 병원에 도착했다.

가야도 깔끔한 신성국의 복식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오셨군요.”

가야가 우릴 반기며 말했다.

“밤잠이 적어서.”

“이틀간의 일은 어땠습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내 개입으로 엔은 죽었다. 그러나 이스마엘과 보얀, 야나카는 목숨을 건졌다. 여기서 더 나은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엔에게 미안할 노릇이지.

“라르스 씨, 여기 점검표와 오늘 일정을 정리했습니다. 환자 관리에 필요한 일손은 따로 불렀으니 경비만 맡아주시면 됩니다.”

가야가 라르스에게 얇은 책자를 건넸다. 라르스는 뺨을 긁적이며 날 보았다.

“저는 신전에 못 들어가는 겁니까?”

“가야 선생의 지시를 들어.”

내 말에 가야가 설명을 덧붙였다.

“코라에선 전신의체에 대한 거부감이 무척 큽니다. 특히 부상이나 장애가 아니라 강해지기 위해 멀쩡한 신체를 기계로 개조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죠. 보더시티의 개척 신전이 아무리 신체 개조에 그나마 관대한 편이라고 해도 힘듭니다.”

나는 라르스를 쳐다보며 ‘들었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르스는 책자를 순식간에 넘기고선 집어넣었다. 그의 의안이 책자의 내용을 전부 저장했을 것이다.

라르스는 가야를 대신해 병원의 경비를 맡는다. 보더시티의 혼란이 많이 가라앉았다지만, 아직은 안정화가 안 된 상태였다.

“루카 씨, 더 준비하실 게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그럼 출발하죠.”

가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어디론가 연락했고, 머지않아 신전 소속의 공중차량이 병원의 상공에 도착했다. 코라의 공중차량답게 매끈한 유선형이었고 도색은 새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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