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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더시티에는 보이지 않는 탁류가 흐른다. 사람들은 물이 목까지 차올라야 질척한 흙 맛을 느끼겠지.
보더시티의 위태로운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자유로 위장한 방임, 진보로 포장한 혼란, 무관심을 관용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꾹꾹 누르며 덮어둔 갈등은 오랫동안 썩어갔고, 그 위로는 악의 꽃이 악취를 풍기며 피어났다.
‘예정된 파국이 다가오고 있지.’
보더시티는 머지않아 사라질 과도기의 도시였다. 삼국과 종족의 경계를 담당했던 도시는 폭탄처럼 터질 것이다.
팽창한 삼국은 충돌하며 전쟁을 벌일 터다. 이건 지식인과 위정자라면 누구나 예견하는 미래다.
종족 갈등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노바스 행성에 살고 있는 종족 간의 우위와 계급도 정해지고 있다.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특정 종족은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고, 효용성이 떨어지는 종족은 열악한 처지에 놓일 터다.
“라피스, 이번 사태가 끝나면…… 보더시티를 떠나는 게 좋을 거다. 동족 사회에 합류하든, 벨라토시티든 간에 말이야. 너라면 어디서든 좋은 대우를 받겠지.”
“제 걱정을 해주시는 건가요?”
“걱정이라기보다 보더시티의 파멸을 미리 말해주는 거지.”
라피스는 인류와 친밀한 타르파 종족이다. 라피스 본인도 우수한 기술자이니 어딜 가도 홀대받진 않을 것이다.
‘어디서도 나보다 더 잘 살아가겠지.’
생각해보니, 내가 라피스를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라피스보다 더 위험한 건 나다.
터벅, 터벅.
나는 라피스와 함께 항구의 인파를 헤쳐나갔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내 동공이 떨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스륵.
난 고개를 올려서 라르스가 대기하고 있는 통신탑을 보았다. 라르스의 모습이 점처럼 희미해서 상당히 집중해야만 형체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원래라면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탑 꼭대기에 라르스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거기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살피고 있었다.
“라르스, 도착했다.”
내가 귓가에 손을 대며 말했다.
-루카 님, 우측으로 230미터 정도 이동하시면 됩니다. 건물 하나가 나오는데, 그 주변은 인파 통제가 된 상태입니다. 아까 전부터 경호원 보강이 눈에 띄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경호원 보강은 엔의 보고 때문일 것이다.
“들어간 사람이 앙귀스 레지나인 건 확실하겠지?”
-제 의안은 올해 나온 물건입니다. 날아가는 새의 깃털 개수조차 셀 수 있죠. 저도 지상으로 합류할까요?
“넌 그 최신형 눈깔로 주변을 계속 감시해. 외부 동향을 보고 이상이 생기면 알려.”
-알겠습니다.
라르스는 군말을 달고 싶은 듯했으나 군인답게 명령에 충실했다. 아마도 현장에 뛰어들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할 터다.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그럴 테니까.
뚝.
난 통신을 끊고 라르스가 안내한 대로 움직였다.
‘라피스는 나와 같이 움직인다. 그 편이 더 안전해.’
내 예상이 맞다면, 앙귀스 레지나의 주변에는 괜찮은 전력이 없다.
‘에퀘시안 용병들은 항구에 없어. 다른 임무에 투입된 상태겠지.’
나는 엔이 속한 용병대의 병력 운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작전 구역이 여럿 발생하면, 유동적인 판단과 기동성이 필요한 임무는 엔에게 단독으로 맡겼다.
‘엔이 혼자서 이 지역을 맡은 거다.’
남은 호위는 기껏해야 머릿수를 채우는 보조인력일 터다.
‘만약, 괜찮은 전력이나 에퀘시안 용병이 이 부근에 있었다면…… 나와 엔이 전투를 벌일 때 지원을 왔을 거다.’
내 뇌의 사고가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 정도 분석은 지금의 내게 어렵지 않았다.
난 군인 출신이며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지금과 비슷한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다. 전술과 전략적 상황이라면, 작은 단서만으로도 큰 흐름이 불 보듯 훤히 보였다.
나는 골목길에 등을 대고 머리만 내밀었다.
‘열 명, 아니, 열셋.’
나는 건물 주변을 돌아다니는 자들을 보았다. 전신 전투복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순찰 드론이다.’
이 부근을 돌아다니는 경찰 드론이 있었다. 두 대 정도가 높게 솟구친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벨라토 연방의 경찰 병력들…….’
공권력이 개입하면 까다로워진다. 혹여나 내 신원이 벨라토 연방에 노출되면 더욱 골치 아프다.
“라르스, 일이다.”
-듣고 있습니다.
라르스의 밝은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순찰 중인 경찰 측의 드론과 안드로이드가 있을 거다. 놈들을 공격해 이목을 끌면서 도주해. 테러리스트처럼 보이면 딱 좋겠군.”
-시선을 끌라는 말씀이시군요. 제 적응형 입체기동 성적은 A였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아무래도 라르스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든 내게 표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난 숨을 죽이며 라르스의 행동을 기다렸다. 5분여도 지나지 않아서 신호가 왔다.
퍼- 엉!
멀리서 폭발이 일었다. 화마가 일어나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솟구쳤다.
나는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부두 어딘가의 연료 창고라도 터트린 모양이다.
……의욕이 지나치구나, 라르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이 주변을 배회하던 순찰 드론들이 매섭게 궤도를 틀며 폭발 지점으로 향했다.
난 드론이 빠진 걸 보면서 엄폐를 풀고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 여긴 통제 구역이…….”
가장 가까이 있던 무장 경호원이 내게 총구를 겨누며 경고하려 했다.
시간도 없고, 사살하지 않고 끝내기도 까다롭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미 경호원의 위치와 모습은 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끼릭.
내가 보급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절도 있게 차근차근 방아쇠를 당겼다.
타- 앙!
권총을 든 내 오른팔은 포탑처럼 일정하게 움직이며 정교하게 사격했다.
털썩, 털썩.
경호원들은 반응 사격도 못 하고 쓰러졌다. 내 총알이 비좁은 헬멧의 투과창을 뚫고 놈들의 머리에 박혔다.
일방적인 학살은 금방 끝났다. 살인을 저질러도 내 정신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고요했다.
대등한 상대나 강자가 아닌 약자를 상대할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능숙한 살인자라는 걸 더 깊게 깨닫는다.
내가 손짓하며 숨어있던 라피스를 불렀다.
“……다 죽였군요.”
라피스도 쓰러진 경호원들을 보면서 날 따라왔다.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더 걸리고 우리가 위험해져”
“아, 루카를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 전 전투용 의체를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혼자서 깨끗한 척할 생각은 없어요.”
위안이 되는 말이로군.
우린 앙귀스 레지나가 있다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외벽과 창문이 바깥에서 잠그는 형태였다. 급하게 개조한 듯이 철판과 사슬이 덧대져 있었다.
‘일종의 감옥이군.’
앙귀스 레지나를 콘서트 직전까지 여기에 감금할 생각인 듯했다.
콰직!
난 잠금장치를 깨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앙귀스 레지나.”
내부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무대 소품과 옷가지, 그리고 강렬한 향기가 자욱했다.
“뭔가 소란스럽다 했더니 당신이었네요, 명탐정 루카.”
앙귀스 레지나는 화장대에 앉은 채로 우릴 등지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너머로 우릴 보고 있었다.
나도 거울을 통해 앙귀스 레지나의 얼굴을 보았다. 무대용 화장은 가면처럼 짙고 두꺼웠다.
난 입을 다물었고, 라피스가 날 대신해 대답했다.
“루카는 우릴 도와주러 왔어요, 레지나.”
앙귀스 레지나가 화장솔로 얼굴을 색칠하듯 문질렀다. 그녀는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이 느긋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그토록 당신을 원할 때는 냉담하게 굴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선심을 쓰듯 나타나서 도와주시네요. 루카, 당신에게 저와 쟈파는 어떤 존재인 거죠?”
“하하…….”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을 들은 앙귀스 레지나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벅, 저벅.
난 앙귀스 레지나에게 다가가며 말을 내뱉었다.
“너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군.”
“제 다리에 총을 쏠 때요?”
“후, 다들 내게 어떤 답을 요구하지.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야. 쟈파? 앙귀스 레지나? 그래, 좋아! 내 속내가 궁금하면 말해주지.”
난 앙귀스 레지나의 머리채를 잡아서 당기곤, 곧장 그녀의 턱을 잡아서 밀어올렸다.
우득.
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라피스가 날 만류하려 뛰어왔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쟈파와 네가 험한 꼴을 당하면 잠자리가 사흘 정돈 뒤숭숭할 것 같아서 온 거야. 도덕적 이유나 거창한 관계를 바라지 마라. 난 내 마음만 편하면 그만이야. 네가 싸가지 없게 굴면서 내 심기를 건드리면 오히려 다행이지. 이대로 라피스만 데려가면 그만이니까.”
앙귀스 레지나는 벌건 얼굴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웃었다.
“솔, 직해서…… 좋네요. 카악, 큭.”
난 앙귀스 레지나를 던져서 바닥에 내쳤다. 라피스가 앙귀스 레지나를 부축했다.
“루카, 이럴 것까진 없잖아요!”
“라피스, 넌 앙귀스 레지나를 잘 몰라. 저 여자는…… 이래야 말을 알아먹거든.”
앙귀스 레지나도 라피스를 만류하듯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라피스. 루카의 속내가 궁금했던 거니까요. 흠, 손자국 모양의 멍이 남을 것 같으니 공연할 땐 초커를 차야겠네요. 루카처럼요.”
자신의 목을 만지던 앙귀스 레지나는 내 목덜미를 쳐다봤다.
“길거리 패션에 관심이 생겼거든.”
난 목갑을 툭툭 치며 말했다.
“와주신 건 고맙지만, 이미 늦었어요. 콘서트는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이에요.”
난 눈을 찡그렸다.
“손석재의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건가?”
“모든 건 쟈파를 위해서죠. 제 하나뿐인 어머니요. 지금까지 쟈파는 절 보호했어요. 제가 엇나가서 멋대로 굴더라도 쟈파는 싫은 기색 없이 인내하며 참았죠. 이젠 제가 쟈파를 보호할 차례예요.”
결의가 앙귀스 레지나의 얼굴에서 묻어나왔다. 저 표정을 보니 쟈파의 기억 속에 있었던 ‘엘리제 콴’이 떠올랐다. 엘리제 콴은 앙귀스 레지나의 과거 이름이다.
“과거의 기억은 어느 정도 회복했지?”
“가야 선생님 덕분에 제법 많이요. 이젠 감당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끔찍한 인간이었죠. 전 그런 사람이 제 친부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나 봐요. 항상 세상을 탓하고, 남을 탓하며…… 제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굴었죠. 정작 쟈파가 더 힘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앙귀스 레지나는 초조한 기색이 없었다. 납치와 감금을 당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연했다.
앙귀스 레지나가 이 정도의 인물인지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아니, 못 본 사이에 그녀가 성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내가 변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말이다. 멈춰있는 사람은 없다, 좋은 변화든 나쁜 변화든 간에.
……뭔가 불안하다.
난 앙귀스 레지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모공까지 관찰하듯 천천히 사고를 늘어뜨렸다.
앙귀스 레지나의 감정과 사고가 쉬이 읽히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튈지 예상이 어려웠다. 마치 혼돈이라도 잉태하고 있는 듯했다.
“더는 전 누구의 도움도 필요가 없어요. 쟈파도 저도, 키누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죠. 그리고 당신에게 기대고 싶은 제 여린 마음도요.”
내 불안 사이로 맴돌던 실마리가 희미하게 잡혔다.
에퀘시안 용병대가 쟈파 상사와의 계약 종료가 쉬웠던 이유. 아무리 용병 종족의 전사라지만, 엔이 마지막까지 그 어떤 단서도 내놓지 않고 신의를 담담히 지킨 까닭.
“앙귀스 레지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미 전 손석재의 딸로 입적됐어요. 법적 절차도 끝났죠. 엘리제 손이라는 웃긴 이름으로요.”
조각이 하나만 더 있으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보일 것 같았다.
앙귀스 레지나가 자신의 단말기를 꺼냈다. 그녀는 단말기를 확인하다가 맑게 웃었다.
“후후훗…….”
앙귀스 레지나는 함박 미소를 지은 채로 우릴 향해 단말기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손석재, 그리고…….’
손석재의 머리가 깨끗하게 잘려 있었다. 그 머리채를 잡고 있는 건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라그나타 아니마.’
라그나타가 손석재를 암살했다.
라그나타는 전성기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나 여전히 우수한 암살자다.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그녀를 막기 어렵다.
‘라그나타가 쟈파 상사 사옥에서 지낼 무렵, 앙귀스 레지나가 라그나타를 잘 챙겼지.’
그 시절에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간 친분과 대화를 난 모른다.
라그나타의 성격이라면…… 앙귀스 레지나에게 한 번 정도는 도와주겠다며 연락법을 주고 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눈을 옅게 떴다. 감정이 복잡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제가 보더시티의 여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루카, 딱히 의미 없지만 여기까지 오신다고 수고했어요.”
앙귀스 레지나가 날 향해 산뜻하게 윙크했다.
철컥!
예상 밖의 움직임은 라피스에게 일었다. 그녀가 자신의 호신용 권총을 앙귀스 레지나에게 겨누었다.
“그러면, 엔은, 엔은…… 도대체 왜! 엔을 루카에게 죽게 놔둔 거죠?”
라피스가 울먹이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