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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92

292
털북숭이 유인원이 인류로 진화한 것처럼, 에퀘시안 종족도 진화의 산물이다.

지구의 동물로 따지면 ‘얼룩말’에서 에퀘시안이 탄생했다.

나도 실제로 얼룩말을 본 적은 없다. 사전적 지식이 전부이며, 사진과 그림으로만 생김새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룩말이 초식동물이라는 건 안다.

여기서 얼룩말과 에퀘시안 사이에 지성을 제외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에퀘시안은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다. 그것도 우주의 여러 종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사냥꾼이자 전투 종족이다.

엔의 줄무늬 빛은 주황이었다. 본디 어둡게 착색된 듯이 흐릿한 줄무늬지만 전투태세에선 환하게 빛난다.

츠즈즈즈.

에퀘시안은 줄무늬를 통해 체내의 열을 통제하고 배출한다. 수분을 적게 이용하는 열 배출은 효과적인 진화였고, 덕분에 에퀘시안은 근지구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인간도 지구력이 우수한 편이지만, 에퀘시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에퀘시안은 폭발적인 근력과 질긴 지구력을 같이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이 평생 육체를 단련해봐야 평범한 에퀘시안의 신체 능력조차 따라가지 못한다.

누군가는 태생적 신체 조건의 차이를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 느낄 것이다.

‘평범한 자연체 인간이면…… 에퀘시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다행히…… 나는 생명공학으로 뇌 신경계 기능을 끌어올린 강화 인간이며, 기계공학으로 신체를 대체하고 보강한 사이보그이기도 했다.

나는 엔의 창날을 떨치려고 팔을 휘둘렀다. 엔은 잠깐 창을 뒤로 뺐다가 냉큼 뻗었다. 그 동작은 얄미울 정도였다.

‘엔의 대인전 기술이 발군이다.’

나도 에퀘시안과 싸우는 게 처음은 아니다. 에퀘시안의 전투술이 낯설진 않다.

‘그러나 엔은 에퀘시안의 전투술을 극단까지 단련한 실력자야. 같은 전투체계라도 급이 달라.’

엔의 전투술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끈질김’이었다.

엔은 에퀘시안 특유의 근지구력 때문에 지치지 않고 체력을 유지했다. 놈은 시원하게 나와 부딪히지 않았다. 제대로 실력을 겨루는 게 아니라 내 큰 동작을 미리 차단하며 격렬한 충돌 자체를 피했다.

……짜증이 난다.

그러나 내가 짜증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엔의 작전이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내 육체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어.’

엔은 철두철미하면서도 냉정했다.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을 유지했다.

내 신체는 전신의체가 아니다. 호흡과 지구력에 한계가 있었다.

도발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순간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키이잉!

나는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엔이 곧장 따라붙으며 창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반면, 내가 밀어붙이면 엔은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단기적인 근력과 민첩성은 내가 우위다.

‘제대로 붙으면 내가 밀릴 이유는 없어. 그러나 엔은 그런 정면충돌 자체를 피하고 있지.’

엔은 통통 뛰면서 원 방향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어떻게든 엔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나는 의체 출력을 순간적으로 최대치로 높이며 나아갔다.

끼이이잇!

난 발끝으로 바닥을 깊게 누르며 빙글 돌았다.

내 발아래에서 쩌억하는 소리가 났고,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파였다.

후웅!

난 태풍의 눈이 된 것처럼 대기를 휘감으며 크루시스를 휘둘렀다.

가속이 크게 붙은 크루시스가 소리보다 빠르게 엔의 몸통을 노렸다.

엔도 놀란 듯이 헬멧의 안광이 커졌다.

카아앙! 부- 웅!

엔은 긴급히 발을 땅에서 떼면서 창대로 크루시스를 막았다. 그는 크루시스의 충격량에 길게 밀리더니 벽까지 처박혔다.

그러나 나는 눈을 찌푸렸다. 내가 노린 건 이게 아니다.

‘엔은 일부러 몸을 허공에 날려서 충격을 흘렸다.’

인간이라면 저러고도 온몸이 부러졌을 터다. 그러나 에퀘시안, 특히 엔은 튼튼하기 짝이 없었다.

우지직, 빠직.

엔이 부딪힌 기계설비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나도 내가 엔에게 고전할 줄은 몰랐다. 실전이란 변수투성이고, 싸움에는 상성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경험이 많을수록 그 변수와 상성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다.

노련한 라그나타가 떠올랐다. 라그나타는 노쇠했지만, 엔은 아직 전성기의 육체였다.

‘……대인전 기술과 경험은 엔이 나보다 앞서 있다.’

그래, 명심하자. 엔은 처음 상대해본 레기온도 대파시킨 놈이다. 표면적인 전투력은 내가 높다고 한들, 쉽게 이길 순 없겠지.

나 역시…… 수없이 몸부림치면서 나보다 더 강한 자들을 꺾어왔다. 엔도 그런 경험이 많을 터다. 강자를 상대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겠지.

‘여기서 내 뇌를 소모한다면, 남은 일정의 미래가 어둡지만…….’

앞으로 내가 헤쳐나가야 할 위험과 장애가 수두룩하다. 여기선 되도록 뇌를 아끼고 싶었지만,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난 보더시티 복귀 초전부터 강자를 만났다. 대충 싸워서 넘어갈 상대가 아니다.

통, 통, 통.

엔은 날아간 충격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좌우로 가볍게 뛰고 있었다. 끔찍한 술래잡기의 미래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위이이웅.

나는 품에 있던 충격권총 루이나를 꺼내서 잡았다. 지금부턴 다각도로 전투를 풀어낼 생각이다. 발 빠른 사냥감를 사방에서 포위해 덫으로 몰아가듯…… 엔을 단 하나의 결말, ‘패배’로 몰아간다.

엔의 헬멧 안광이 뾰족하게 가늘어졌다. 놈도 내가 뭔가 준비한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치킹!

엔이 충격탄 대비용으로 팔뚝에 장착된 에너지 방패를 펼쳤다.

위이잉!

엔의 왼팔에서 방패가 작동하면서 둥근 에너지막이 생겼다.

2차전이라도 하듯, 우린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삐이이이이잇!

……그 순간, 찢어지는 소음이 일었다.

통제실에 있던 예비 음향기기들이 일제히 굉음을 냈다. 바닥의 먼지가 들썩들썩 떨렸고, 금속과 유리가 진동했다.

쩌어어억!

얇은 유리는 심지어 금이 가고 있었다. 나도 굉음에 눈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라피스의 짓이었다. 난 라피스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라피스가 의미 없이 굉음을 만들진 않을 것이다. 나를 돕기 위한 행동이다.

난 흐트러지는 초점을 바로잡으며 엔에게 집중했다.

엔이 비틀거렸다. 그토록 말끔하던 움직임은 고장 난 것처럼 버벅였다.

‘이 소음은 엔에게 영향이 크다.’

엔은 고통스러운 듯이 헬멧에 손을 가져가며 벗으려 했다.

투- 웅!

난 루이나의 방아쇠를 당겼다. 엔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에너지 방패를 들어서 충격 폭발을 상쇄했다.

콰아앙!

짧은 폭발과 굉음이 엔의 빈틈을 만들었다. 나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비집듯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길게.’

요란한 기교는 필요 없다. 나는 크루시스를 낮게 끌며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크루시스는 엔의 가랑이부터 정수리까지 가를 기세였다.

엔이 헬멧을 반쯤 젖히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난 그대로 크루시스의 손잡이를 놓았다.

스륵!

크루시스가 내 손에서 벗어나며 길어지듯 날아갔다. 그 칼날의 끝이 엔의 배부터 시작해 안면까지 긁어냈다.

콰드드득!

엔의 갑옷이 찢겨나가며 살점과 피부도 터져나갔다. 거대한 짐승의 손톱이 엔을 일직선으로 그은 것 같았다.

털썩.

피투성이가 된 엔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줄무늬의 빛도 약해지고 있었다.

“푸흇, 푸슈웃, 크릇.”

엔은 주둥이와 코가 찢기고 날아간 채로 피거품이 끓는 숨을 내뱉었다. 칼날에 찢겨 쩍 벌어진 이마 사이로 주름진 뇌가 보인다.

철퍼덕.

세로로 길게 찢긴 엔의 배에선 기다란 내장이 쏟아졌고, 갈라진 가슴에선 쿵쿵 뛰는 심장의 하부가 보였다. 심장이 뛸 때마다 엔의 몸에서 피가 잔뜩 새어 나왔다.

“우린 둘이고, 넌 혼자였지. 홀로 나선 게 네 실수다, 엔.”

내가 엔의 앞에 서며 말했다.

으득, 으드득.

천장에 박혔던 크루시스가 삐걱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텅! 휘익!

난 떨어지는 크루시스를 낚아채 돌리며 무게 중심을 바로 잡았다. 그리곤 엔의 목덜미에 칼날을 곧장 대었다.

-제법, 이네, 라피스. 네게, 장비점검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엔이 머리를 간신히 틀며 라피스에게 말했다. 뒷덜미에 걸친 전투 헬멧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뚝.

라피스는 조작하던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울려퍼지던 굉음도 멈췄다. 그녀의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루카. 엔을 살…….”

라피스가 고개를 들어 엔의 상태를 보다가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했다.

엔의 몰골은 상당히 끔찍했다. 손톱만큼만 칼날이 더 파고들었다면 즉사였을 터다. 간발의 차로 즉사는 피했지만 몸이 세로로 반쯤 쪼개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누가 와도 살릴 방법이 없어. 빨리 보내주는 게 고통을 더는 거야.”

내가 차갑게 말했다.

라피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힘겹게 들어서 엔과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이 젖어있었다.

-라, 피스의 방해만 없었다면, 비장의 수로, 널, 끝장냈을 텐데 아깝군.

저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영영 알 수 없겠군.

“마지막까지 허세는 끝내주네. 그간의 정으로 우리에게 해줄 조언 같은 건 없나? 어차피 죽는 김에 말이야, 쟈파를 위해서라도.”

엔이 갈라진 주둥이로 탁한 웃음을 내뱉었다.

-뭐, 행운을 빈다, 루카.

그 말을 끝으로 엔은 목덜미에 달린 통역기를 잡아뜯었다.

엔은 자긍심을 지켰다. 나도 예의를 다해야겠지.

“아…….”

난 라피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제자리에서 돌면서 칼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툭.

내가 동작을 끝내며 멈췄고, 엔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흐윽, 끅, 끄읍…….”

라피스는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라피스. 미안하지만 쟈파를 구하려면, 엔을 애도하며 울고 있을 시간은 없어. 바로 움직여야 한다.”

나는 엔의 시신에 손을 뻗어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 있는지 뒤적였다.

라피스도 울먹이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엔의 전투 헬멧을 들었다.

“……저는 쟈파 상사 소속 에퀘시안들의 정비를 종종 맡았고, 덕분에 이들의 장비를 잘 알고 있죠. 에퀘시안의 전투 헬멧엔 뇌파 통제기가 달려있어요. 뇌파 통제로 신체와 정신의 안정성을 높여서 냉정한 판단력을 더 쉽게 유지하고 전투 지속성을 올려요.”

“아까 그 소음이 에퀘시안의 약점인 건가?”

“그건 아니에요. 뇌파 최적화와 반응값은 에퀘시안 개체마다 달라요. 그저 엔이 제게 자주 정비를 맡긴 탓에…… 제가 엔의 설정값을 알고 있었던 것뿐이죠. 그래서 엔의 통제기 주파수에 맞게 소리를 만들어 교란할 수 있었어요.”

라피스는 엔과 친했다. 그래서 허점을 찌를 수 있었다.

‘지금 라피스는 장비를 맡기는 엔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겠지.’

난 라피스를 칭찬하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

이 상황에서 슬퍼하는 라피스의 응용력을 칭찬할 정도로…… 내가 눈치 없진 않다.

나는 엔의 시신에서 손을 뗐다.

‘용의주도하군, 엔.’

엔은 단서가 될 만한 걸 남기지 않았다. 그의 단말기나 개인 장비의 데이터를 해킹할 시간도 없었다.

“앙귀스 레지나와 연락이 닿아?”

“우리 사이의 개인 연락은 손석재가 차단했어요. 그래도 콘서트를 앞두고 있으니 분명히 근처에 있을 거예요.”

암담한 상황이군.

‘라피스를 여기에 그냥 둘 순 없어. 호위를 붙여야 한다.’

나는 라르스를 라피스의 호위로 부르려 했다.

치직, 칙.

단거리 통신이 열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서 울렸다.

-앙귀스 레지나를 발견했고, 현재 미행하고 있습니다.

라르스가 나보다 한발 먼저 통신을 보냈다.

……내 안에서 라르스의 평가가 올라갔다. 어쩌면 제법 유능한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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