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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84

284
나는 키누안을 알면서도 모른다.

하기야, 세상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나는 지젤을 모른다. 그녀의 행적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내 아버지, 헤일라스의 내적 갈등과 고뇌를 내가 어찌 이해하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젠 알 도리도 없지.

이반 크라치아는 물론이고, 무쉬르 알 카슈라의 심리도 겉핥기로만 읽어낼 뿐이다.

날 위해 목숨을 건 일레이 카르티카도 알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녀석의 감정과 내면은 막 뒤섞인 물감처럼 그 색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저들도 마찬가지겠지. 누가 나를 완전히 알겠는가? 그저 외부로 드러낸 언행과 희미한 단서로만 ‘루카’라는 존재를 파악할 뿐이다.

‘하지만 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지. ‘완벽한 사람’은 없어.’

제국의 초인 황제들조차 완벽한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치는 자들이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인 무쉬르 알 카슈라도 불완전한 존재였다.

키누안도 마찬가지다. 그는 혼돈의 신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키누안은 나와 같다.’

매번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세우고 힘겹게 결과를 성취하고 있을 터다.

난 그저 키누안의 결과물만 보고 있었다. 키누안의 발버둥은 보지 못하고, 그가 쌓아온 ‘노력’을 폄하했다. 입만 바보처럼 쩍 벌린 채로, 그 대단한 키누안이니 엄청난 계략으로 쉽게 ‘성취’했을 거라 혼자서 지레짐작했다.

……키누안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만의 탑을 쌓아올리고 또 쌓아올렸다. 그 위에서 고고한 척하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덧 놈이 쌓아올린 탑도 꺾이고 또 꺾였고, 그는 내 시선의 높이에 서 있었다.

난 더는 키누안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된다.

“흐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이반이 정원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나는 그를 지켜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키누안의 기원부터 말씀해 주시죠. 전 더는 키누안을 비밀에 둘러싸인 존재로 인식하기 싫습니다.”

이반이 옆모습만 드러낸 채로 씨익 웃었다.

“좋은 판단이야. 수수께기와 비밀은 이유를 밝혀내면 힘을 잃고 말지. 배경과 동기를 아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행동 원리를 파악하기 쉬워지니까. 미지는 두려움의 근간이거든.”

이반은 연못 옆에 있는 바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보고 앉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자리에 앉았다. 이 정원은 지구의 원종으로 꾸렸다고 하나, 내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의미 없는 사치로만 보였다.

이반도 내 맞은편의 바위에 앉더니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턱을 괴었다.

“루카, 네 생각보다 황실은 복잡해. 황제와 직계가 절대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마냥 그런 것도 아니지. 곁다리에 걸친 귀찮은 방계의 견제도 있거든. 크라치아가 약해지면 바로 송곳니를 드러낼 기회주의자들이지.”

이반이 운을 뗐다. 그는 황실의 사정을 풀어내며 키누안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황가의 비밀주의란 제국민과 귀족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라, 같은 황족으로부터도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방패로군요.”

“비밀과 완벽이란 상통하는 면이 있지. 우린 완벽할 수 없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면모를 숨기면서 완벽한 척할 순 있지. 그렇기에 아키에스 도미니는 훌륭한 통치 도구 중 하나야.”

황제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행동이 없어도 아키에스 도미니는 물밑에서 황제의 뜻대로 흐름이 흘러가도록 돕는다.

‘그 흐름을 보고 있으면, 황제가 전지전능해서 모든 사건을 파악하고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

폭풍기의 사건도 황제의 뜻대로 흐를 뻔했다. 제국의 불온분자를 일거에 소탕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뭉칠 기회였다. 내 개입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됐을 터다.

폭풍기가 황제의 의도대로 끝났다면, 하나가 된 제국의 힘은 외부로 빠르게 뻗어나갔을 것이다. 즉, 전쟁을 시작했을 터다.

“루카, 지금의 불안정은 네 탓도 커. 황위가 급작스럽게 이전된 탓에 권위를 잃은 거지. 어떤 변명을 가져다 붙여도 그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선대 황제 폐하의 치세는 무척이나 안정적이었죠. 그러니 더 불안정하게 보일 겁니다. 비교당하기 쉬우니까요.”

난 이반의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지기 전에 정리했다. 내가 궁금한 건 키누안에 대해서다.

“아키에스 도미니, 키누안은 내 기억으로도 통치 안정에 많은 기여를 했지. 그러니 아버지도 의심 없이 키누안을 신뢰했을 거고. 하지만 나도 그런 키누안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어.”

이반은 고요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키누안에 대해 말했다.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행보다.’

키누안은 하층 구역 출신이었다. 나와 같은 이레귤러이기도 했다.

‘생도 시절 전후로 키누안은…… 선대 아키에스 도미니, 즈벨리의 눈에 들었다. 그 이후로 충실한 황제의 종사로 활동했고.’

나는 무쉬르 알 카슈라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즈벨리의 뇌는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 있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와 키누안이 벌인 일이야. 나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어. 하지만 아버지는 즈벨리를 처분해야 한다고 느꼈던 모양이야. 즈벨리가 불온했든 키누안이 이간질했든 간에.”

난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카슈라의 말이 하나씩 기억났다. 카슈라도 즈벨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카슈라는 키누안이 즈벨리를 넘겼다고 말했다. 즈벨리와 황제의 갈등에는 키누안의 계략도 있었겠지. 즈벨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키누안은 인위적으로 흐름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그랬다면 진즉 의심을 사서 죽었겠지.

‘키누안은 즈벨리와 황제와의 미묘한 갈등을 알아채고 자연스레 이간질을 했을 거야.’

이 추론은 어디까지나 정황으로 파악한 가설이다. 진실은 다를 수도 있다. 그걸 염두해두자.

“아버지는 키누안을…… 으음, 잠시, 쉬자고, 루카.”

이반이 신음하더니 이마를 짚었다. 그는 두통을 호소하며 숨을 헐떡였다.

이반 크라치아는 황제다. 거기다가 제국에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만든 의체를 사용하고, 매일매일 점검을 받을 터다.

이반에게 어떤 ‘이상’이 생긴다면 오로지 ‘뇌의 기능 이상’이다.

‘기능 이상.’

나는 가만히 이반을 지켜봤다. 이반은 기능 이상을 겪는 모습을 내게 드러냈다.

‘이반은 내게 약점을 보여주고 있어. 함정인가?’

난 손가락으로 꺼끌한 목을 매만졌다. 피부와 밀착된 금속 목갑은 이반이 내게 건넨 목줄이다.

‘내가 목갑을 착용하고 있기에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건가? 비밀을 유출하면 언제든 죽일 수 있기에?’

5분여가 지나자, 이반이 곁눈질로 날 겨우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간혹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렸다.

‘그만, 괜찮아, 아직은…….’

난 이반의 두서없는 말을 뇌리에 집어넣었다. 그는 무언가에 저항하고 있었다.

“루카, 나는 누구지?”

이반의 전신의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의 땀에서는 산뜻한 향기가 났다. 참으로 사치스러운 의체로군.

“당신은 제국의 황제입니다.”

“그건 내가 아니잖아. 그보다 더 본질에 가까운 말을 해줘.”

“인류의 수호자, 건국의 아버지, 디노 크라치아의 후…….”

내 건조한 말에 이반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아니야!”

이반이 소리를 질렀다. 상당히 공격적인 파장이 일었다. 연못이 출렁이고 풀잎이 흔들렸다. 기절한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고민하다가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이반’입니다. 네로, 이반, 셀림 중에서 제가 고른 이름이죠.”

말을 마친 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무언가의 실마리가 잡힐 것만 같았다. 황제 이반 크라치아가 품고 있는 비밀이 코앞에 있었다.

“그래, 나는 이반이지. 하, 하, 좋아, 훌륭해.”

이반의 표정이 밝아졌다.

……부디 내 추측이 틀렸길 바란다. 난 인상을 찌푸렸다.

“우린 키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반.”

난 이반의 이름을 재차 부르며 그의 의식을 끌어왔다.

이반은 흡족해하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버지는 키누안을 신뢰했고, 키누안은 그 신뢰를 배신했어. 그 정도만 알면 돼. 놈은 황제의 신뢰를 배신할 정도로 간이 큰 대역죄인이지.”

이반이 그 말을 하면서 날 보았다.

“그럼 저도 대역죄인인 셈입니까?”

흠, 괜히 찔려서 내뱉은 말처럼 들리는군. 내 말에 이반은 웃기만 했다.

“그건 앞으로의 네 행실에 달렸어. 이제 너도 키누안만큼 제국과 황가에 대해 알게 될 테니까. 루카, 그간 너도 싫든 좋든 아케인 문명의 유산을 제법 보았을 거다.”

난 기억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어. 어떤 기술과 현상을 사용하려면 그 구조와 원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현실은 달라. 우린 구조와 원리를 알기 전에 현상과 결과부터 다루지. 원인과 해석은 나중에 하면 그만이야. 발화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지 못할 때부터, 인류는 불을 능숙히 사용했어. 아케인 문명의 기술과 유산도 마찬가지야. 당장 기술의 근원과 원리를 몰라도…… 어떻게든 작동만 시키면 돼.”

이반이 자신의 양 손가락 끝을 마주치더니 천천히 벌렸다.

치직.

이반의 손톱에서부터 홀로그램 실타래가 흘러나오더니 화면을 만들어냈다.

화면에선 아케인 문명의 유적과 유물이 흠칫흠칫 지나갔다.

그중에선 내가 아는 것도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캡슐 형태의 공간이동 장치였다.

“돌을 깎아서 도끼를 만드는 선조에게 우리가 쓰는 총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 봐. 선조 중 누군가는 머뭇거리다가 방아쇠를 우연히 당기고선 위력적인 투사체가 나간다는 건 이해하겠지. 그 원리를 파악한 자가 그 일대의 패자가 될 터다. 신적인 존재로 찬양받을지도 모르지. 탄창이 다 떨어지기 전까진 말이야.”

“아케인 문명에 비하면 우린 돌도끼를 든 원시인이라는 소리입니까?”

“잘 알아듣는 걸 보니 간식이라도 던져주고 싶네.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지 마. 나름의 칭찬이라고.”

“……그러시겠죠.”

이반이 손으로 펼친 홀로그램의 장면이 멈췄다.

홀로그램에는 헬멧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불구불한 회로 장식이 외부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헬멧이었다. 얼핏 보면 복잡한 회로의 모양새가 뇌의 주름 같기도 했다.

“제국에선 아케인 유물과 기술을 수없이 연구하고 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중요도가 높은 유물 중 하나야.”

난 헬멧 모양의 유물을 보면서 무수히 많은 추론의 띠를 이어갔다. 무엇 하나도 내키지 않았다. 하나같이 불쾌한 결론이 나왔다.

지금만큼은 내가 바보라도 괜찮으니 떠오른 추측이 전부 틀렸으면 좋겠다.

“……이게 무엇입니까?”

“이 유물의 기능을 파악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우린 ‘정신전이기’라고 부르고 있지.”

안 좋은 예감은 어째서 대개 들어맞는 걸까. 인생은 언제나 부조리하다.

늪에 잠겨있던 조각들이 차오른다. 내 뇌리에는 사건의 흐름이 보였다.

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가 아는 ‘이반’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또 일주일을 기다리기 싫으니, 이야기를 빨리 해야 할 것 같군요.“

이반은 식은땀이 맺힌 얼굴로 웃었다.

”아직 괜찮아. 네 존재로 인해 제법 억제가 되거든. 지금은 ‘아버지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아.“

……최악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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