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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 아크바란의 대기는 탁하고 미적지근할 터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쾌적했다.
스읍.
숨을 계속 크게 들이마시고 싶을 정도다. 복잡한 정화장치를 거친 공기는 폐를 씻어낼 듯이 맑고 산뜻하다.
난 질이 좋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크바란 상층 구역의 고층 건물들이었다. 전형적인 제국식 건축물답게 기하학적인 선들이 정교한 대칭과 균형을 안정감 있게 이루고 있었다.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건축물들이다.
상층 구역 너머로는 하층 구역이 보였다. 하층 구역은 멀리서 보니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하고 난잡했다. 균형미라곤 눈곱만큼도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층 구역이 내 감정을 더 뒤흔들었다.
옛 기억이 떠오른다.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그러나 과거의 여운에 잠길 여유는 내게 없다.
‘지금 내가 봐야 하는 건 현실이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서 내가 있는 방을 보았다.
내가 머무는 황궁의 병실은 강박적으로 깨끗하고 넓었다. 바닥의 대리석은 먼지 한 톨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반짝거렸다.
‘낯설지만은 않아.’
예전에도 여기에 머문 적이 있었다.
원과 선으로 이뤄진 의미 모를 금장이 천장 테두리를 따라 이어졌고, 그 아래로는 채도가 낮은 붉은색 천이 창문 위까지 내려온 채로 흔들렸다.
‘나는…….’
……일레이와 함께 우주선을 탄 채로 아크바란의 상공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국군이 나타나 우릴 견인했다.
내 복귀는 제국 내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듯했다. 난 외부와 접촉할 수 없도록 감금을 당했다.
황제의 그림자가 내 감시역으로 붙었다. 지금도 문밖에는 황제의 그림자가 시커먼 외투를 두른 채로 서 있을 터다.
‘일레이도 어디론가 끌려가다시피 했다.’
나는 애써 초조함을 지우려 노력했다.
‘이반은 일레이 카르티카를 섣불리 처형하거나 고문하진 않을 거야.’
내가 보기엔 이반과 일레이는 미묘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난 황궁에 갇힌 채로 요양을 했다. 나중에 일이야 어쨌든 육체의 피로를 덜어내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일주일 남짓한 휴식으로도 강행군에 지친 내 육신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이반이 날 만나러 오지 않고 있다. 그 어떤 제안이나 지시도 없어.’
황제의 그림자는 내게 그저 기다리라고만 언질했다.
‘이건 내 예상과 달라.’
지금껏 내가 본 이반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는 나와 빠르게 접촉하려 들 터였다. 일주일이나 시간을 낭비할 리가 없다.
가슴이 서늘하다.
‘내 판단이 틀린 건가?’
난 정말로 일레이의 각오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인가?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었다.
‘이반이 내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이반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알현이 지연될 만한 일이 있는 건가?
내 사고는 거기에 멈춰서 나아가지 못했다. 안락한 요양 생활에도 신경계의 피로는 쉽게 달아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나는 멈춰있는데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그 사실이 날 안달나게 만들었다.
이반이 날 동요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정말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다.
최악의 경우, 나는 제국에 내 발로 들어왔다가 용을 쓰며 탈출을 시도해야 하는 병신같은 짓거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머저리가 되는 셈이다.
다행히, 이반은 날 머저리로 만들지 않았다.
일주일이 완전히 지나기 전에, 문이 열리면서 내 고민이 깨졌다.
끼이익.
시커먼 외투로 전신을 가린 그림자가 방문을 열었다.
-따, 라, 와라, 알, 현이다.
그림자의 두건 아래로 안광이 얇게 흘러나왔다. 슬쩍 드러난 얼굴은 언뜻 보면 쇠붙이만 있어서 안드로이드 같았다.
‘인간적인 기능이 제거된 전투 기계.’
여전히 그림자는 황제의 수족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통제된 황궁의 복도는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또각, 또각.
나와 그림자의 발걸음 소리만 깊은 동굴에 들어간 듯이 울렸다.
황궁의 규모는 언제나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황궁을 보면 황족을 찬양하는 신전 같기도 하다. 역대 황제의 무용을 그린 벽화는 천장과 벽을 따라 이어졌다.
벽화나 초상화, 그리고 조각상에서 묘사된 황제들은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존재들이었다. 무결한 신성이 그들의 상징이었다.
날 안내하던 그림자가 우뚝 섰다. 금장으로 된 나무가 양각으로 박힌 양문 앞이었다.
-폐, 하께서, 기다리신, 다.
그림자가 문을 밀어서 열더니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는 안내를 마쳤다는 듯이 내가 들어가길 기다렸다.
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릴 때부터 풀과 물의 냄새가 났다. 화사한 꽃향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끼익, 쿵.
문이 닫혔다.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앞의 정원을 보았다.
‘……실내 정원.’
부드러운 빛이 천장에서 내려오며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거기엔 뒷짐을 지고 연못을 바라보는 이반 크라치아가 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도 여전히 비단 같았다.
예전 기억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반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정원이었다. 지구의 원종 식물로 꾸며놓은 정원의 작은 연못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지.
오늘의 이반도 대외적인 청년의 의체가 아니라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의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저 모습의 이반은 아름답긴 하나, 제국민이 원하는 위엄있는 황제의 모습은 아니다.
“안녕, 루카.”
이반이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러 빛깔이 뒤섞여 독특한 이채를 뿜고 있었다.
나는 꼿꼿하게 서서 이반을 보았다.
“절 부르시는 게 늦으셨더군요.”
난 어두운 입구에 서서 말했다.
“그래서 안달이 났어?”
“제가 실수했나 싶었습니다.”
“하핫, 널 조급하게 만들었다니 기분이 좋은걸. 더 기다리게 만들 걸 그랬어. 여기 정원은 어때? 너와 나의 추억을 기리며 재현한 거야.”
이반은 넓적한 바위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서 살랑살랑 흔들렸고, 이질적일 정도로 새하얀 맨발에 묻어 있는 흙은 툭툭 떨어졌다.
“그게 추억이었는지는 방금 알았습니다. 제겐 악몽 중 하나였는데 말이죠.”
나는 그리 말하며 이반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반은 툴툴거리는 내 독설을 좋아한다. 지금도 재밌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왜 날 부르는 게 늦은 거지?’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가 날 원하는 까닭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이반 크라치아 정도 되는 인물을 관찰하고 통찰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이반과 만나는 게 처음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러나 나는 이반을 잘 알고 있다. 이반의 가면이 깨진 모습도 보았지.’
나는 궁지에 몰려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던 이반을 기억하고 있다. 그 틈을 다시 비집으며 이반의 사고를 읽어내야 한다.
내 사고가 깊어질수록 이반의 안광도 진해졌다.
“네 뇌파가 요동치는 게 보여. 이번에 새로 단 센서의 성능이 무척 좋네. 널 더 잘 알기 위해 달았지.”
이반이 자신의 안구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유리알과 부딪히듯이 맑은 소리가 났다.
난 아직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두리에 서 있었다.
“키누안을 잡…….”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자고. 난 널 간만에 봐서 이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거든. 후후, 일레이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네.”
난 저 말을 듣자마자 흔들리는 감정을 통제하려 했다. 그래도 이반은 내 동요를 미미하게나마 알아챌 터다. 뇌파의 흐름까지 보는 상대로 감정을 완전히 숨기긴 힘들겠지.
‘일레이와 이반의 약속.’
이반은 일레이가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그 말이 내 뇌리에 맴돌았다.
“일레이가 절 반드시 데려오겠다고 했군요.”
“일레이 카르티카는 대단한 녀석이야. 군인이 아니었다면 여우가 아니라 뱀이라고 불렸을걸. 나보다 더한 독을 품은 뱀이지.”
내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끓었다.
‘일레이는…….’
그 필사적인 구출이 연기였을까? 아니면 나를 위해 시간을 벌려고 이반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
일레이는 이반에게 날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이반 앞에 있었다.
‘일레이는 내 성격을 잘 안다.’
날 구출하러 온 자신을 내가 버리지 못할 거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을 터다.
일레이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도박해서 날 데려오는 데 성공한 거라면?
‘이게 네 계략이라면,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일레이.’
일레이가 이 자리에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일레이의 속내는 여전히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난 일레이가 내게 해를 끼칠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 믿는다.
설사 일레이가 이반에게 날 넘길 생각이었을지라도, 무쉬르 알 카슈라에게서 날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날 속이는 일일지라도, 일레이 나름대로는 그게 날 위한 최선이라고 판단했겠지.
좋아, 동요하지 말자.
나는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생각을 끝냈다.
주륵.
하지만 코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걸 막진 못했다.
“너는 무리하고 있어. 늘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하지.”
이반이 일어서더니 내게 걸어왔다.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들어서 내 코피를 닦으려 했다.
휙.
난 무엄하게도 이반의 손목을 잡아서 제지했다. 대신에 내 팔뚝으로 피를 닦아냈다.
“키누안 이야기나 하시죠. 저는 키누안을 잡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아마 다음번엔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키누안도 바닥을 드러냈으니까요.”
이반은 내 행동에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썹이 아래로 휘었다.
저 얼굴을 보고 애처롭게 여기지 마라, 모든 게 연기이니.
“……그래, 키누안을 잡아야지.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대론 안 돼. 분명히 넌 도망갈 테니까.”
이반은 언제 쓸쓸했냐는 듯이 입꼬리를 바짝 올리며 웃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목을 바짝 죄는 금속 목걸이였다.
“개목줄을 준비하셨군요.”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찰나라도 이반을 동정할 뻔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모든 걸 듣고 싶다면 이걸 목에 걸어. 넌 몇 번이나 내 신뢰에서 도망가려 했지. 이런 수단까지 쓰게 만든 네가 나쁜 거야, 루카.”
이반이 내 손에 목걸이를 건네며 말했다. 목걸이라기보다 목갑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터다.
이반이 건넨 목갑은 무척이나 정교한 전자장비였다. 금속의 질감도 특이했다. 금속인데도 연성이 있고 질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고무 같은 물성이었다.
이반은 네 걸음 물러나며 목갑을 어서 착용하라는 시늉을 했다.
‘내 머리를 열어서 인형으로 만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난 헛웃음을 흘렸다. 이반은 목갑에 대해 그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이반의 구속을 받아들여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목갑을 들어서 목덜미에 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군요, 폐하.”
“자비심 넘치는 통제 수단이지. 널 전신의체에 집어넣을 수도 있고, 머릿속에 칩을 심을 수도 있지만 존중해준 거야.”
흠, 생각해보니 이반 입장에선 정말로 가장 온건한 방식이었다.
나도 한동안 제국을 떠나있다 보니 감이 흐려진 모양이다. 제국과 황실이 얼마나 냉혹하고 어두운지 말이다.
철컥.
난 목갑을 둘러서 착용했다. 잠금장치가 맞물리면서 회로에서 푸른빛이 점멸했다. 뭔지는 몰라도 이걸 자력으론 해제하긴 힘들겠지.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닐 것이다.
차가운 감촉이 내 목덜미를 휘어감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뭐, 곧 익숙해지겠지.
짝!
이반이 내 꼴이 마음에 드는지 손뼉을 세게 한 번 쳤다. 뒷짐을 진 그는 시시덕 웃으며 내 주변을 돌았다.
“잘 어울리는걸. 이제…… 키누안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됐어, 놈이 훔쳐간 물건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