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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레이 카르티카가 친구라고 생각한다.
내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친구’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이는 역시 일레이다.
일레이는 내 부하나 아랫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 상관인 것도 아니었다.
나와 일레이는 예전부터 대등했다. 사소하게 엎치락뒤치락하긴 했으나 서로를 압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린 하나의 목적을 가진 동지도 아니었다. 가끔 손을 잡긴 했으나 추구하는 바가 늘 달랐다.
상하 관계도 아니고, 꿈과 목표가 일치하는 동지도 아니다.
이해득실이 없어도, 다른 길을 걷더라도,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말은 쉬워도 무척이나 성립이 힘든 관계다.
‘일레이는 날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나는 무쉬르 알 카슈라와 일레이의 대치를 보았다. 둘 다 전갑의체를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성을 앗아가는 기계 갑주를 입은 채로 마음의 칼을 뽑아 들었다.
일레이는 홀로 무쉬르 알 카슈라와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지원이나 부하는 없는 듯했다.
“제 은신처를 찾아낸 건 둘째 치고, 우직하게 절 기다렸군요. 살았을지도 죽었을지도 모를 친구를 위해서 말이죠.”
-루카가 죽었든 살았든, 네가 내 손에 죽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루카가 죽었다면 복수를 하는 것이고, 살아있다면 구출을 할 뿐이지.
일레이의 목소리는 카슈라보다 기계적이었다. 레기온의 음성 기능은 실제 인간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까지 온 당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군요. 아마 적잖은 대가를 감수해야 했겠죠. 그러니 말해드리죠.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제 등 뒤의 우주선 안에 있죠. 지금 모니터로 우릴 보고 있을 겁니다.”
일레이가 여우 형상을 본뜬 머리를 들어서 우주선을 보았다. 찢어진 안광이 일렁거렸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이 은신처는 상당히 불안정하더군. 화기를 사용하지 않겠다. 너도 여기가 쑥대밭이 되는 걸 원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자칫하면 루카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고전적인 결투를 제안하겠습니다. 당신도 바라는 바겠죠.”
무쉬르 알 카슈라가 고화력 무장을 해제했다. 그의 전갑의체에 부착된 자질구레한 중화기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철컹, 캉, 쿵.
묵직한 소리가 퍼졌다.
일레이도 준비해둔 총기를 옆으로 내던졌다.
일레이의 레기온과 카슈라가 화력전을 여기서 벌인다면 공멸할 가망이 높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공멸을 피하는 방책을 택했다.
‘적대적인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건 나란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카슈라도 일레이도 내가 다치길 원하지 않는다.
“당신도 합일 후보 중 하나였죠. 하지만 고작 기계에 패배하는 뇌엔 관심이 없습니다. 전 압니다. 당신은, 레기온에게 먹히고 있죠.”
카슈라가 검지를 들어 일레이를 가리켰다.
기이잉.
일레이의 안광이 음산하게 흔들리더니 초점을 잡듯이 중심부터 빛났다.
-기계에 먹힐 마음이라도 있는 게 다행인 거지. 너 같은 괴물들은 자신의 정신이 남들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날 때부터 인간의 마음이 없었던 거야. 그저 인간 껍데기로 태어났을 뿐인 이형의 괴물인 주제에, 사람의 흉내를 내며 타인을 나약하다 비웃지.
일레이가 등에 손을 대더니 수납된 칼자루를 잡고선 들어 올렸다.
끼이이이이.
일레이의 칼날은 폭은 평범했으나 그 길이가 무척이나 길었다. 레기온의 키만 한 외날의 장검이었다.
기형적인 장검은 일레이의 레기온 전용무기였다.
“‘카타스트로피’라니, 참 거창한 이름이군요.”
카슈라가 일레이의 칼날에 새겨진 글자를 읽으며 말했다.
카슈라와 일레이가 서로에게 다가갔다. 카슈라는 등에서 보조 팔을 둘이나 꺼내서 네 자루의 근접 무기를 쥐었다.
철커덩, 쿵.
카슈라의 외갑 일부가 떨어졌다. 그는 근접전에 앞서서 몸을 가볍게 하려는 듯했다.
‘일레이의 레기온은 경량형, 아킬레우스 기반이다. 카슈라도 속도에서 뒤처지고 싶지 않겠지.’
일레이는 카슈라의 상태를 알고 있는 걸까?
카슈라는 즈벨리의 뇌가 없다. 예전과도 같은 초월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난번의 전투력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던 거고, 즈벨리의 뇌가 없어도 카슈라는 충분히 강해.’
일레이는 카슈라의 전투력이 떨어졌다는 걸 모를 것이다. 설사 예상하더라도 확신은 못 하겠지. 최악을 가정하는 게 우리의 방식이다. 일레이는 카슈라의 전투력이 이전과 비슷하다고 감안하고 싸우는 걸 터.
‘좁은 장소에서 조건을 걸고 화력을 제한한 것도 승산을 어떻게든 높이려는 방책이겠지.’
카슈라의 안광도 일레이에게 모여들었다. 그도 일레이가 강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터다. 금속 상자의 뇌를 전부 활용해 상대할 것이다.
카슈라가 오른팔에 든 도끼창을 크게 휘둘렀다. 금속 창대가 휠 정도로 무지막지한 내려치기였다.
일레이는 도끼창을 피하지 않고 날렵한 장검으로 받아냈다.
카-아아아아앙!
내가 있는 우주선까지 실제의 굉음이 일었다.
전갑의체의 전투는 사납고도 묵직했다. 단단한 갑주만큼이나 휘두르는 무기들도 파괴적이었다.
‘일레이의 특기는 총기를 이용한 중거리 전투다. 레기온 상태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야.’
전갑의체에 손상을 줄 정도의 총화기는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쏴댔다간 은신처가 박살 날 수도 있었다.
‘일레이는 특기를 봉인한 채로 싸워야 한다.’
일레이는 필사적으로 ‘카타스트로피’라는 이름의 장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했다. 요령도 없는 우직한 정면승부였다.
‘넌 원래 이렇게 싸우지 않잖아. 더 교활하고 영악하게…….’
카르티카의 여우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닐 것이다.
콰직!
고출력의 전갑의체끼리 부딪히니 정박장은 엉망이었다. 금속 타일조차 경질의 암석처럼 쉽게 갈라지며 쪼개졌다.
일레이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설 무렵이었다.
우웅!
일시적으로 은신처 내부의 중력이 사라졌다.
‘카슈라가 중력 제어기를 껐다가 켰다.’
카슈라는 은신처의 설비가 연동된 상태일 터다. 중력 제어도 마음대로일 것이고, 여차하면 정박장의 외문을 열어서 기압 차를 만들 수도 있었다.
중력의 상실 때문에 일레이는 공세의 흐름을 놓쳤다.
“비겁하다고 말씀하실 겁니까?”
카슈라가 가슴팍의 추진체를 작동해서 거리를 벌리며 무중력 공간을 유영했다.
끼이잉!
불쾌한 소음과 함께 중력이 회복됐다. 무게감을 되찾은 카슈라와 일레이는 바닥에 발을 댔다.
-천만에, 나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야지.
일레이는 무릎과 허리를 구부린 채로 칼을 늘어뜨렸다.
‘일레이도 긴가민가할 거다. 카슈라가 봐주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전투력이 온전하지 않은 건지 헷갈리겠지.’
나는 밖으로 나가서 소리를 치고 싶었다. 카슈라는 불완전한 상태이니 가망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주선의 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난 무기력하게 모니터로만 상황을 봐야 했다.
치익, 치지지직, 칙, 칙.
귀가 아플 정도의 잡음이 일었다. 카슈라와 일레이를 비추던 모니터도 꺼졌다.
-루, 루, 루…….
스피커로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직, 칙.
모니터가 다시 작동했고, 거기엔 복슬복슬한 주황 머리의 소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바라?’
가상공간에서 바바라의 아바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모니터로 날 바라봤다.
-아, 아, 아아, 들려? 히, 히, 네 꼴을 보니, 정말 웃기네, 웃겨. 천하의 루카가 인간 지렁이가 될 줄이야.
바바라는 어색할 정도로 과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입가에 주름이 섬뜩하게 파였다.
“비꼬는 건 나중에 실컷 해라. 날 도와주러 온 거라면 본론부터 꺼내.”
침울하게 굳어있던 내 머리로 피가 치솟는 것 같았다.
‘바바라가 여기에 왔다.’
일레이와 바바라가 손을 잡은 것이다. 이게 일레이의 노림수인 건가?
‘카슈라는 일레이라는 강적과 싸우고 있어. 거기다가 은신처 시스템과 뇌를 연동한 상태지. 뇌가 여럿이라도 지금은 우주선에 신경 쓰지 못할 거다. 그 틈을 타서 바바라가 여길 해킹한 거야. 바바라의 본체는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
모니터 속의 바바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곧 그녀의 주황빛 머리카락이 끝없이 길어졌다. 어느새 모니터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치익, 칙.
통제실의 다른 모니터도 켜지더니 바바라의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우주선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듯했다.
-조금 까다롭긴 해도 문제는 없어. 더미 설치도 끝났고, 통제권도 내 쪽으로 넘어오고 있어. 루카. 너와 난 여길 이탈할 거야. 카슈라의 의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우주 비행 기능까진 넣지 못했겠지.
“일레이는?”
-딱 봐도 알잖아. 일레이 카르티카는 살아서 여길 나갈 생각이 없어. 카슈라와 함께 우주의 티끌이 되는 거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일레이의 계획이 전부 보였다.
‘일레이는 카슈라의 전투력이 자신을 한참이나 상회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만 벌려고 온 거야.’
통제실의 모니터가 바바라의 주황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루카, 네게 선택권은 없어. 상황도 딱 좋네. 넌 이제 내 소관이야. 너라도 팔다리가 없는 상태에선 설치지 못하겠지. 덕분에 난 지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어. 오늘은 좋은 날이야, 무척이나 아름다운 날이지.
바바라가 흥얼거렸다.
“일레이와 통신을 연결해 줘.”
-일레이는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듣지 말고 끌고 가라고 했어.
“카슈라는 약해졌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상황이다.”
-승산이 있든 없든, 나와는 상관없는데?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모니터를 노려봤다.
“카슈라에게 네 출생에 대해 들었다. 궁금하지 않아?”
바바라는 여전히 웃고 있으나 화면이 정지한 듯이 입꼬리의 미동은 없었다.
-꽤 재밌는 말을 하네. 내 출생이라고? 난 아크바란 하층 구역에서…….
“넌 타인의 의체와 육체에 대한 거부반응을 억누를 수 있지. 자아도 유지하면서 말이야. 세상에 그게 가능한 사람을 너 말고 본 적이 있어? 나도 제법 특이한 이레귤러지만, 나 같은 존재는 세상에 여럿 있다. 그러나 넌 정말로 특별한 존재지. 이레귤러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아.”
통제실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깜빡였다. 마치 바바라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 같았다.
-계속 말해봐.
“우주선 내부에 내 의체와 무장이 있을 거다. 드론이든 로봇이든 뭐든 이용해서 당장 가져와서 붙여줘. 없다면 아무 팔다리라도 좋아. 내가 움직일 수 있게만 해줘.”
-어처구니없는 소리 하지 마.
“움직이지 못하면 바로 포기할게. 아니면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기회와 시간을 계속 낭비할래?”
모니터 속의 바바라가 다른 모니터로 이동하며 움직였다. 그녀가 지나갔던 모니터는 차례대로 잡음만 남기다가 꺼졌다.
뚝.
통제실의 모니터가 전부 꺼졌다. 바바라의 의식은 통제실을 벗어나 다른 구역으로 간 것 같았다.
‘젠장, 일레이, 제발, 버텨.’
모니터가 꺼져서 바깥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들리는 굉음만으로 일레이와 카슈라가 싸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까마득하게 길게만 느껴졌다.
치이이익.
통제실의 문이 열렸다.
덜컹, 덜컹.
먼지가 잔뜩 쌓인 안드로이드가 엉거주춤하게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주선 창고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안드로이드인 것 같았다. 안면의 광학 렌즈도 수명이 다 되어가는지 희미했다.
끽, 끼익.
안드로이드는 비틀거리면서 바퀴가 달린 상자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 상자에는 내 장비와 의체가 담겨 있었다.
-기동에 실, 실패하면, 바, 바로, 가는, 거다.
안드로이드에 깃든 바바라가 말했다. 그녀는 내 어깨의 사이버네틱 접점부에 의수를 가져다 댔다.
“시작해.”
안드로이드의 검지가 접히더니 드릴이 나왔다.
치이익.
안드로이드는 의체 연결의 부품 수급을 위해 자신의 다리에서 나사를 차례대로 제거했다.
삐, 삐, 삐.
안드로이드가 빠진 나사를 바라보다가 내 어깨의 접점부를 응시했다.
-나사, 의 규, 규격이 완전히 맞지 않아. 굵기는 맞는데 길이가 달라. 새로 준비할 시간은 없어.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다.
‘하아, 젠장.’
난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사가 홈을 파고드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접점부의 폭을 넘어선 나사는…….
뿌드드득!
……내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
음, 아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