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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쟈파의 병실을 찾아갔다. 그는 전신 재생 치료를 받고 있기에 상시 잠들어있다.
하지만 쟈파가 의식불명이라고 세상이 멈추진 않는다. 그 때문에 쟈파는 주기적으로 깨어나 보고를 받고 회사의 방침을 결정했다. 회사의 경영자는 반죽음에 이르러서도 쉬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쨌건, 오늘은 쟈파가 일시적으로 깨어나는 날이었다.
-웬일로 얼굴을 들이민 거지?
병실 앞에는 엔이 팔짱을 낀 채로 있었다. 그도 내장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어느새 회복해 복귀했다.
‘엔은 그림자 레기온을 한 기 파괴할 정도의 실력자다.’
저번에 확인한 사실이었다. 엔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수준의 전사였다.
“쟈파와 이야기할 게 있다.”
-한동안 찾아오지도 않고, 그 새끼 고양이도 빼돌리길래 우리와 연을 끊는 줄 알았는데?
엔의 말투는 통역의 기계음인데도 차갑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온도가 낮았다.
“저번 전투에서 네 활약은 잘 봤다. 실력이 좋더군. 하지만 레기온이나 전투의체는 뇌가 파괴되어도 잔류 신호로 인해 움직이곤 해. 알고 있었으면 네가 당할 공격은 아니었지. 다음부턴 헛된 일격에 당하지 마라.”
난 차분히 말했다. 엔은 전투 헬멧을 쓴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이, 갑자기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냐?
“내가 싸가지가 없긴 해도, 존중과 감사를 모르는 사이코는 아니거든.”
헌신적인 에퀘시안 용병들 덕분에 난 보더시티에 남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감정적으로 굴거나 불성실한 용병이었다면, 난 지금쯤 제국에 끌려갔을 터다.
삐걱.
엔은 민망한 듯이 머리를 돌려 시선을 옆으로 두더니 헬멧을 긁적였다.
-지금은 회의 중이다. 5분 정도면 끝나겠지.
웃는 얼굴에 침 뱉기가 힘들 듯, 칭찬을 듣고 악담하기도 힘든 법이다.
나는 복도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서 쟈파 상사의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쟈파는 대단한 수완가이고, 너도 제법 능력이 있는 인간이지. 그런 쟈파와 네가 전력을 다해 쫓아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꽤 난 인물인가 보지?
엔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내 스승이니까. 보통 사람은 아니지.”
-‘소년은 아비를 죽여야 어른이 되고, 제자는 스승을 죽여야 전사가 된다.’ 오랜 격언이지.
“살벌한 격언이로군.”
-아주 오래전에는 정말로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하더군. 어쨌든, 자식이건 제자건 자신을 키워주고 가르친 사람을 넘어서야 한 사람의 몫을 다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집단 전체가 점점 발전하지. 이런 면에서 보자면 넌 미숙한 전사로군, 스승을 넘지 못했으니 말이야.
날 조롱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름의 조언일 것이다.
‘나는 키누안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뛰어넘으려 했으나, 내 안의 키누안은 번번이 날 가로막았다.
아직도 난 결단을 내리거나 행동할 때, 키누안과 헤일라스를 번갈아 생각했다.
키누안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헤일라스라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내겐 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내 행실들은 키누안과 헤일라스와 흡사했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도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뭐, 내 행동들은 헤일라스보다 키누안에 훨씬 더 가까웠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내가 제국에 남아있었다면 헤일라스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겠지.’
난 엔의 말을 곱씹었다.
-또 다른 말을 해주지. ‘집단보다 유능한 개인은 없다.’ 혼자선 한계가 있다. 혼자서 다니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집단에 속하지 못한 개인의 끝은 언제나 파멸이다. 그 역량이 얼마나 대단하건 말건 중요치 않아. 모든 변수와 상황에 대응할 능력을 갖춘 개인은 없다. 우린 늘 서로를 보완해야 하지.
에퀘시안은 집단을 중시하는 본능이 인간보다 크다. 그러나 인간 역시 집단을 이루는 건 마찬가지다.
엔이 명백하게 날 가리키는 말을 내뱉었다. 스승의 그늘에 벗어나지 못했으며, 난 여전히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안다. 혼자선 해낼 수 있는 게 많이 없다.
‘나도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폭풍기에도 그랬었다. 내 힘만으론 부족해서 타인의 손을 몇 번이고 빌려야 했다.
“조언은 머릿속에 잘 담아두도록 하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담아둬라. 너도 일류니 잘 알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행동을 결정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심장의 결단이니까.
엔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짚었다가 가슴을 가리켰다.
쟈파의 병실이 열리면서 쟈파 사옥의 간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화는 즐거웠다, 에퀘시안 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곤 쟈파의 병실로 들어갔다. 각성 상태인 쟈파가 날 발견하더니 세로 동공을 얇게 떴다.
“호욧.”
흠, 놀랍게도, 저 웃음이 나름 그리웠는지 반갑게 들렸다.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쟈파가 혀를 날름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는 재생 캡슐에 몸을 담근 채로 머리만 바깥으로 내밀고 있었다.
“……15분 정도입니다.”
여기도 15분이로군.
“그 정도면 충분해.”
“이야기하시지요. 그간 루카 씨의 행보에 대해선 보고로 들었습니다. 이젠 당신이 절 떠나더라도 통제하거나 막을 방법이 없죠.”
“가브리엘과 라그나타도 떠났고, 나와 보얀도 이스마엘 차관의 소관이 됐지. 날 비열한 배신자로 여겨도 된다.”
“비열하긴 하죠. 단물만 쏙 빼먹고 절 버렸으니까요. 호요오옷, 조금 가슴이 아플지도요.”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려고 왔다. 난 키누안을 찾는 걸 그만둘 수도 있어.”
“지젤 쿠스토리아 때문인가요?”
쟈파는 평온하게 말했다. 그는 나와 지젤의 사이를 알고 있다. 저번에 넌지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래, 내겐 키누안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 지젤만 찾을 수 있다면, 키누안 따윈 어디서 뭘 하든 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쟈파의 얼굴이 미묘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이해가 되기도 할 터다. 쟈파는 배려심이 많은 타지룬이니까.
나는 쟈파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라고 주변에서 착각하게 행동해라, 쟈파. 내가 키누안 추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말이야. 키누안은 내가 자신을 계속 추적하길 원하고 있어. 추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며 나타날 거다.”
내가 날카롭게 말했다. 쟈파의 입과 눈이 가늘어졌다.
“호요옷.”
나와 쟈파는 짧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웠다.
* * *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난 바바라와 다시 접촉했다. 방식은 저번과 같았다.
랑테는 저번처럼 내 뒤에 서 있었고, 난 고물이나 다름없는 시뮬레이션 기기를 통해 가상 현실로 들어갔다.
기이잉.
감각이 흐릿해졌다.
하얀 공간이 나오고, 주황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뭉글뭉글한 머리카락 주변으로 팔다리가 생겨나더니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까득, 까득.
바바라는 집게 모양의 호두까기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호두를 꺼내더니 하나씩 깨서 먹고 있었다.
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벌써 아랫도리가 쪼그라드는 것 같다.
“보더시티를 떠날 준비는 끝났어?”
바바라가 물었다. 난 애써 호두까기에서 눈을 뗐다.
“떠나기 전에 정리할 일이 있다, 바바라. 내게 협조해라.”
“협조? 세상이 우스워?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면 세상 모든 일이 다 네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바바라가 견과류를 하나 더 꺼내더니 호두까기 집게 사이에 넣으며 말했다.
파직!
호두가 잔혹하게 으스러졌고, 부서진 껍질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너야말로 네트워크와 시뮬레이션에서만 살다 보니 현실 감각이 맛이 간 거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와 키누안이 움직이고 있어. 연방에서도 촉을 곤두세우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잠적한다고 네 계획이 술술 풀릴 거라 생각해?”
바바라가 돌변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나와 지젤에겐 사랑스러운 계획이 있어. 넌 입 닥치고 내 말을 따르면 돼! 지젤을 좋아한다면서? 내 말이 곧 지젤의 말이야. 난 지젤의 대행자라고!”
바바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등 뒤가 일렁거렸고, 지젤의 형상을 한 데이터 쪼가리가 나타나 바바라를 뒤에서 껴안았다.
“쟈파를 이용해 날 깨운 건 키누안이다. 키누안이 어디서 어디까지 알고 움직이는지 넌 모르고 있지. 알았다면 내가 깨어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키누안을 잡지 못하면 너와 지젤의 계획도 결국 무너질 거다.”
“키누안은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나와 지젤은 놈에게 한 방 먹였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지젤의 행방을 몰라. 그것조차 지젤의 계획이라고 말하지만…… 난 키누안을 제거하지 않고선 안심할 수 없다. 너도 속으로는 나와 똑같이 생각하겠지. 키누안의 목적이 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놈은 날 끌어내기 위해선 지젤이든 뭐든 다 이용할 거다. 내가 이대로 잠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젤을 찾아낼 놈이야. 키누안의 손에서 행방도 묘연한 지젤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정말 있다면 어디 대답해 봐라, 바바라. 적어도 지젤을 생각하는 네 마음만큼은 진짜라고 믿고 있으니까.”
내가 말을 쏟아냈다.
바바라는 처음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녀의 뒤틀림은 가라앉았다. 냉엄한 이성의 빛이 그녀의 동공에 서렸다.
“……확실히, 불안정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좋지.”
놀랍도록 빠르게, 바바라는 태도를 바꿨다.
“이미 난 깨어나서 보더시티를 활보했어. 너와 지젤의 계획은 흐트러진 거나 마찬가지지. 현실의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은 내가 너보다 뛰어날 거다.”
“르는, 그렇다면…….”
난 바바라의 말을 끊었다.
“뒷이야기는 만나서 해. 너도 보더시티에 있지? 네가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도, 물리적으로 떨어진 네트워크에 잠입하는 건 불가능해. 보더시티 어딘가에 있다는 것 정돈 알고 있다.”
“현실에서 너와 마주하라고? 하, 하, 하. 재밌네, 루카. 넌 날 죽이고 싶어 하잖아.”
“너도 날 증오하며 죽이고 싶어 하지. 잘 들어, 바바라. 우리에겐 신뢰가 필요하다. 넌 목숨을 걸고 날 마주해. 나도 현실의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게 너와 내가 협력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될 거다. 네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각자 갈 길을 갈 뿐이지. 알아서 지젤을 찾아보자고.”
“랑테가 네 뒤에 있다는 걸 까먹은 모양이지?”
나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현실의 내 손도 슬그머니 움직일 것이다.
움찔.
현실의 랑테가 내 움직임에 반응했다.
“랑테는 우수한 근위대 선배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제압할 수 있다. 궁금하면 시험해봐도 돼.”
도발을 하니 짜릿하군. 한기가 질척하게 내 발밑에서부터 들러붙는 것 같았다.
나는 가상 현실에서 빠져나오면서 랑테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전투 사고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며 결론을 내렸다.
‘……가능하다.’
바바라는 날 죽이라는 명령까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설사, 바바라가 살상 명령을 내리더라도 랑테는 명령을 거부할 거야. 누가 뭐래도 난 제국의 칼에겐 중요한 인물이다. 제압 정도로 끝내려고 하겠지.’
랑테는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내다. 그가 맹목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개였다면, 보더시티가 아니라 제국에 남아있었을 터다.
“난 랑테를 제압하고 나서, 네 존재에 대해 말할 거다. 그러면 랑테는 과연 네 말을 들을까? 아니면 내 말을 들을까?”
바바라는 호두까기 집게를 반복적으로 접었다가 펼쳤다. 그녀는 좌우로 왔다 갔다 걷더니 이윽고 날 보았다.
“경고하지. 날 속이지 마, 루카.”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그럼…….”
바바라가 입술을 움직여 장소를 속삭였다. 그 장소가 상당히 의외였기에 난 눈을 살짝 치켜떴다. 대범하기 그지없었다.
좋아, 이제 이 망할 시뮬레이션에서 벗어나자.
키이이잇!
난 장소를 듣자마자, 강제로 의식을 현실까지 끌어올려 각성했다. 귓가에서 거친 쇳소리가 났다.
강제 각성의 후유증으로 현기증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나 호두까기로 고환이 으스러지는 경험보단 낫다.
“음.”
난 신음하며 눈을 떴다.
‘랑테는 이미 갔군.’
랑테는 벌써 바바라의 지시를 듣고선 자리를 비웠다. 여러모로 전 근위대원다웠다. 철두철미하며 쏜살같이 움직인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스륵.
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며 일어섰다.
내가 앉아있던 의자에는 46번이라 적혀 있었다. 난 45번 좌석과 이어진 분리 벽에 팔을 걸치며 몸을 기댔다.
‘통신 가능한 시간이 15분이라는 것도 그럴싸한 거짓말이었군.’
바바라는 외부 개입이 없는 독립회선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45번 좌석에는 거지꼴 행색의 노인이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성인물을 보고 난 흔적이 질퍽하게 있었다.
난 한숨을 쉬며 분리 벽을 손등으로 톡톡 두드렸다.
“일어나라, 바바라.”
노인이 고글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누런 이빨 사이로 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겁해, 루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도망갈 줄이야.”
거지 노인의 모습을 한 바바라가 주먹을 쥐며 무언가를 으스러뜨리는 시늉을 했다.
“두 번 당하는 바보가 될 생각은 없거든. 너에게든 키누안에게든.”
“키킷, 히히.”
노인이 웃었다.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서 미소가 참으로 기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