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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62

262
‘지젤 쿠스토리아.’

난 그 이름을 되도록 내 안에서 언급하기 싫었다. 지젤을 떠올릴 때마다 최악의 가정이 머릿속에 맴돌았으니까.

행방불명된 지젤의 생존 가능성은……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말하자면,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지젤이 현실에 와닿는 것 같았다.

동요하지 말자. 감정을 가둬라. 감정 표현을 자극하는 호르몬이 날뛰기 전에 사고를 전환하자.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고는 길었으나 현실은 찰나다.

‘랑테, 전 근위대원이며 현재는 제국의 칼 간부.’

랑테가 내 눈앞에 있다. 그의 허름한 의체와 산화한 인공 피부가 보였다.

‘저 초라한 행색은 위장이다.’

랑테는 때가 되면 과거처럼 멋들어지게 자신을 정비할 터다.

“지젤 쿠스토리아가 칼의 수장이라는 소리입니까?”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부디 내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이길 바란다.

“제국의 칼은 네메시스의 조직도를 모방했네. 누가 수장인지는 나 같은 간부조차 모르지. 그 덕분에 어느 한쪽이 물려도 머리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어. 다만, 제국의 칼을 조직하기 위해 자금을 대고 사람을 모은 자가 지젤이라는 건 확실해. 나도 그 아이에게 설득을 당해 조직에 합류했으니까.”

거짓말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내 머릿속의 그림에서 비어있던 조각이 차올랐고, 그림의 전체 형태도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헤일라스의 측근에게 지젤은 존경하는 상관의 딸이다. 조카와도 같은 존재지. 신뢰할 이유도 충분하고, 지젤에겐 조직을 만들고 지원할 자금줄이 있었어.’

지젤이 제국의 칼을 조직했다. 발상 자체가 어려울 뿐이지, 그럴 만한 동기와 능력은 전부 맞아떨어졌다.

‘지젤이 길다와 거리를 두고, 일레이에게 자신의 목적을 감춘 이유도…….’

친우인 나조차도 일레이를 완전히 믿기 힘들다. 지젤이 보기엔 일레이는 무척이나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친했던 의붓동생을 찾는 시늉을 해야 한다. 지나친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 근위대는 대체로 고지식하다.

“행방불명은 지젤의 자작극이며 위장이었던 겁니까?”

랑테는 처음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아이의 행방불명이 위장인지 아니면 제국의 공작으로 잡혔는지…… 나도 모르네. 어느 쪽이든 간에 나를 비롯해 대원들에겐 말하지 않는 게 나을 테니까.”

내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다. 기대가 얼어붙고 있었다.

행방불명이 위장을 위한 자작극이라면, 비밀 유지를 위해 진실을 감춰야 한다. 외부 세력에게 납치를 당한 거라도 다른 사람에겐 알리지 않는 게 정답이다.

“전 지젤의 ‘현재’ 행방이 궁금한 겁니다.”

내가 재차 강조했다.

“조직 초창기를 제외하고선 만난 적이 없네. 우린 결기의 날만 기다리며 점 조직형태로 흩어져 개별적으로 힘을 키우고 있을 뿐이지. 사실상 목적만 같은 별개의 집단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로 모아둔 형태야. 하지만 자네의 합류가 기정사실이 된다면…… ‘머리’와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지젤이 아직도 조직의 머리에 있다면 당장 접촉할 수 있을 거네. 자네는 우리에게 중요한 인물이니까.”

랑테가 조건을 내밀었다. 저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러나 거짓이라도 난 삼켜야 했다. 단서를 놓치긴 싫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궐기의 때가 오면 사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말뿐인 약속이다. 그러나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 심장을 꺼내서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거면 충분하네. 어차피 세상에 확실한 건 없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심장에 새긴 명예의 칼뿐이니.”

근위대가 고성능 전투의체를 다루기 위한 인간성의 근간은 명예다. 명예를 잃은 근위대원은 편집증적인 살육 기계에 불과하다.

“감사합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를 표했다.

“머리와의 정기 연락까지 시간이 필요하니 열흘만 기다려 주게. 우리가 처음 만난 곳에서 적당히 배회하고 있으면 내가 찾아가도록 하지.”

나는 지하기지를 벗어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젤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가슴과 머리에서 자꾸만 차올랐다.

‘만약, 지젤을 여기서 찾는다면…….’

난 그녀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도망갈 것이다. 이 엿 같은 세상이 어찌 되든 이젠 내 알 바 아니다.

* * *

내게 짐 덩어리는 보얀이었다.

짐 덩어리는 표현이 너무할 순 있으나 사실이었다. 다른 짐이었던 가브리엘은 라그나타에게 맡겼다. 라그나타라면 의리를 지킬 것이다.

훗날, 나와 라그나타가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있다면…… 난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터다.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주겠지.

‘그러나 이스마엘은 라그나타와 다르다.’

이스마엘은 계산적인 관료다. 보얀을 떠맡는 건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내가 당장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보얀도 끝장이다.’

난 여기서 보얀을 못 본 척할 수 있었다. 녀석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욕심만 챙기며 움직이면 된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핑계로 말이지.’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보얀을 거두지도 않았을 터다. 찰나의 충동이 내 발목을 끌어 잡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특이한 일도 아니다. 세상사가 전부 그러하다. 대체로 합리성이 아니라 욕망과 충동으로 사건과 갈등이 생긴다.

내게 거센 욕망과 충동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제국 군부의 유망한 군인으로 창창한 삶을 살고 있었겠지.

‘지금의 나는 보얀을 거둔 것을 후회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면 레고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후회한다고 내 판단과 선택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아.’

그 때문에, 앞길에 장애가 늘어나더라도 내가 감당해야 한다.

보얀은 쟈파, 앙귀스 레지나, 라피스 같은 부류와 다르다. 녀석은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못하며, 매사가 어설프고 허술하다. 내가 보기엔 어리석은 짓을 매번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른이 아니라 아이인 거지.’

나는 나 자신을 다독이며 전략무기연구부의 보더시티 지부로 향했다.

“아, 루카 씨. 잘 오셨습니다. 마침 잠시 쉬려고 했거든요.”

이스마엘은 바쁜 시간을 내서 마중을 나왔다. 그는 커피를 들고선 안쪽으로 날 안내했다.

나는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일하고 있는 보얀을 보았다. 잔심부름과 서류 정리가 주된 업무였다.

“처음에는 크롤러가 온다는 소리에 다들 긴장했습니다. 성인은 아니라지만 크롤러가 사무직으로 들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자질구레하게 몸 쓰는 일도 도맡고 매사에 적극적이라 지금은 평가가 좋습니다.”

나는 보얀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은 각성제를 투여하지 않았는지 서류 정리에서 헤매는 모습이 은연중 드러났다.

“일하다가 공격성은 드러내지 않습니까?”

난 터놓고 이야기했다. 충동성은 크롤러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특히 공격성 제어에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욱하는 성향이 지나치다.

“루카 씨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기미는 없습니다. 심지어 누가 혼쭐을 내도 주눅 든 채로 있더군요. 처음에는 다들 지시 내리길 어려워했지만, 지금은 서슴없이 굴고 있죠.”

주기적인 대련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본능적인 욕구를 참는 게 아니라 적당히 해소하면 평시에도 쉽게 제어할 수 있다.

“잠시 보얀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본관과 별관 사이의 정원에 있겠습니다.”

나는 저번 방문에서 봤던 야외 정원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스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사이에 본관을 걸어서 별관으로 가는 통로로 향했다.

후우웅.

잘 마련된 정원에는 바람이 솔솔 불었다. 공기 방향도 계산해서 설계했을 터다.

나는 정원 너머를 응시했다. 보더시티의 다른 공공기관 건물이 보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이었다.

이종족은 간혹 타르파나 배가분더스가 보일 뿐이었다. 인간의 가슴팍 정도 오는 타르파와 인간보다 두 배 가까이 큰 배가분더스가 이야기하고 있으니 풍경이 묘했다.

초록 피부의 배가분더스는 무릎과 허리까지 굽히며 타르파와 시선을 맞췄다. 연방이 추구하는 공존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타르파와 배가분더스는 인류의 입맛에 맞는 종족이다. 처음부터 인류에게 호의적인 종족이었으니까.’

인류와 맞지 않는 종족은 공공기관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 보기 힘들었다.

크롤러 종족은 재건축 중인 건물이나 화물 운송 차량에서나 간혹 보였다. 보얀처럼 사무직 차림새의 크롤러는 없었다.

‘제국이나 연방이나…….’

모순을 품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국가란 조직은 언제나 그러했다.

라그나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세상을 나보다 많이 경험했다.

‘옳고 그른 건 없어.’

라그나타는 그리 말했고, 난 내겐 옳고 그름이 있다고 대답했다.

노련하고 똑똑한 라그나타는 세상에 초연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정의라고 주장하기엔 너무나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렵군.”

나는 중얼거렸다. 내 시야가 넓어질수록 내 정의를 주장하기 어렵다.

결국은 내 이기심과 욕구의 발로일 뿐이니, 거창하게 껍데기를 씌워봐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스륵.

난 고개를 돌렸다.

이스마엘과 보얀이 본관에서 나와 정원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얀은 하급자답게 이스마엘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실례지만, 보호자 상담 좀 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이후 루카 씨가 제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이스마엘이 보얀을 등을 밀어서 내세우더니 본관으로 돌아갔다.

보얀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 얼굴과 이스마엘의 등을 번갈아 보았다.

“차관님과 친한 사이였어요?”

“아니.”

내가 짧게 대답했다. 보얀은 민망하다는 듯이 목을 긁었다.

“으음.”

“쟈파 상사의 사옥에서 짐을 빼서 관사로 옮겨라. 이제부터 넌 연방 정부의 소속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쟈파 님이 회복하면 인사라도…….”

“그땐 그때 가서 찾아가면 돼. 이스마엘에게도 이야기해 둘 텐데, 언론사가 널 찾아올 거다. 놈들이 네게 무례한 질문을 해도 화내거나 공격성을 드러내지 마. 필요하면 감정 통제를 위한 각성제도 야나카에게 부탁해서 복용하고. 넌 이제부터 차별받는 이종족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을 거다. 아, 잘 나왔던 성적표도 준비해 둬. 크롤러도 할 수 있다는 증거니까.”

난 제국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조언했다.

일개 개인이 위정자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대중과 언론을 등에 업어야 한다.

내 장황한 말에 보얀이 당황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없어도, 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두라는 뜻이다. 넌 사실 중요한 인물이 아니야. 적당한 여론만 형성해도 이스마엘이 널 죽이거나 내치진 못할 거다.”

“네?”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난 되도록 이스마엘과 협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척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야. 하지만 이스마엘은 합리적인 사람이지. 네게 이용 가치가 있다면 내 부탁이 아니더라도 널 데리고 있을 거다. 다행히 연방 정부는 다양성과 공존을 중요하게 여겨. 넌 통치의 도구로서 제법 유용한 존재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이해가 힘들면 주머니에 든 각성제라도 털어 넣어라. 미안하지만 징징거리는 말을 들어줄 시간과 여유가 더는 없다.”

내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보얀도 주먹을 굳게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아버지가 절 떠날 때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보얀이 어색하게 웃으며 예리하게 말했다.

“당장 널 떠난다는 말은 아니야.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는 거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라. 내가 움직일 수 있다면 달려갈 테니까.”

난 보얀에게 내가 준비해둔 방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더시티에는 손석재 같은 차별주의자도 있지만, 그 반대 세력도 있었다. 차별반대주의 세력에게 보얀은 좋은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이스마엘이 본관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시계를 보더니 우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이스마엘이 오는군. 가 봐라, 보얀.”

보얀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의 자리는 이스마엘이 대체했다.

난 빠르게 선수를 쳤다.

“얼마 전에 ‘제국의 칼’과 접촉해 잠입했습니다, 차관님.”

난 이스마엘이 이것저것 묻기 전에 말했다.

움찔.

이스마엘의 눈동자는 커졌고, 그의 머릿속 초점이 좁아지는 게 내게도 보일 정도였다.

“……유능하시군요, 루카 씨.”

“황실의 첩보원이기도 했으니까요.”

이스마엘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오는 정보가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면 사람의 인지에는 공백이 온다. 즉, 잠시나마 바보가 된다는 뜻이다.

“네?”

언제나 이지적이던 이스마엘은 처음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멍청한 표정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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