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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근위대원은 찬란했다. 특히 헤일라스의 측근이나 간부들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초인들이었다.
그런 초인이 초라한 행색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탈영한 근위대원은 제대로 된 정비도 오랫동안 받지 않은 듯했다.
임시방편으로 거칠게 보수한 흔적이 팔다리에서 보였고, 얼굴을 제외하곤 인공 피부가 없다시피 했다.
‘엉망이로군…….’
다르게 보자면, 내구성과 신뢰성이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다. 정비보수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나와 잠시 겨룰 정도로 의체가 기능했다.
“자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몇 번인가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
“저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대장님 곁에 종종 있으셨죠.”
“난 제국 북부를 거점으로 활동했지. 그 때문에 아크바란엔 오래 머문 적이 없어. 자네가 날 기억하니 다행이로군. 내 이름은 랑테……. 그래, 그저 랑테라고 불러주게.”
뒤의 이름은 버린 모양이었다.
“일부 전 근위대원들은 연방에 망명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모습은 망명자가 아니라 도망자시군요.”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빙빙 돌려 말할 생각은 없다. 랑테도 그걸 바라진 않을 것이고.
“망명한 이들은 근위대에서도 말단이네. 연방 정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망명하는 순간부터 평생 감시 대상이 되네. 자유로이 활동할 수가 없지. 이미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난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맹렬하게 요동쳤고, 지금의 상황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인과를 추론했다.
턱을 매만지던 내가 입을 열었다.
“흐음, 망명한 근위대원은 연방 정부 내부에서 정보 수집 역할을 하고 있군요. 선배님도 제 소식을 그쪽 사람들에게 들으셨을 거고요.”
랑테의 동공 테두리에서 빛이 났다. 그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소문대로 총명하기 그지없군. 그러니 대장도 자넬 양자로 받아들였겠지만. 자네의 생각대로, 옛 근위대원들 상당수가 지하조직처럼 얽혀 있네.”
이 때문에, 일레이 같은 이들이 전 근위대원을 찾아서 죽이고 다녔다.
‘그렇다는 건…… 이들은 제국에 반기, 정확히 말하면 황실에 반기를 든 세력이라는 거지.’
황제에겐 몹시 꺼림칙한 존재들이다.
“절 찾아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네라면 이미 내 목적을 알겠지…….”
랑테는 잠시 골목길 너머의 거리를 보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일부는 우리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오려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나와 랑테가 풍기는 흉흉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를 보던 랑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구심점이 필요하네. 마침 적당한 사람이 나타났어. 상징적인 소년이 어느덧 걸출한 사내가 되었지.”
“황제를 축출해 공화정이라도 세우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경계하듯 차갑게 말했다.
“아니, 우린 정당한 상속자에게 제국을 돌려주고 싶은 거네. 프란세크 전하께서 유폐되었으나 여전히 살아계시지.”
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들의 뜻대로 된다면 제국은 공화국이 된다.
일레이의 말에 따르면, 일레이와 프란세크는 공화정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아는 프란세크라면, 자신의 권력을 이양해 체제를 공화정으로 바꿀 거다.’
제국에 있던 시절이 자꾸만 떠오른다. 얽힌 계획과 사람들. 누가 누구에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를 만큼 촘촘한 계략과 음모. 가슴이 서늘하다 못해 깨질 정도로 찌릿한 악의의 비수들.
‘제국은 여전하군.’
난 새어 나오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전하께서 유폐당한 지 오래됐습니다. 황위에 오를 정신 상태가 아닐 수도 있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전하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제국 내부에도 랑테의 입김이 닿는 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랑테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탈영한 근위대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있다. ‘제국의 칼’이라는 거창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현 황제 이반 크라치아를 축출하고, 정당한 계승자인 프란세크를 황위로 올리는 것이다.
제국의 칼은 그 규모가 크지 않지만, 소수정예의 근위대원 출신이 다수였다. 그 장점을 살려서 제국과 연방만이 아니라 노바스 행성 전역에서 활동하는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좋은 구심점이다. 저들 입장에선 놓치기 싫은 사람이지.’
난 근위대장의 양자이며, 프란세크가 곁에 두고 아끼던 생도였다. 그런 내가 전면에 나서면 중요한 순간에 세력을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합류한다면…… 우리의 행보를 부정적으로 보던 형제들조차 움직이겠지.”
여기서 형제란 중립을 유지하는 근위대원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당분간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 생각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군. 이쪽도 필사적이네. 아주 필사적이지.”
랑테가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그는 뒷걸음으로 골목길을 나가더니 두건을 쓰며 인파와 섞였다. 그의 기척이 흐릿하게 녹아들며 사라졌다.
“……웃기는군.”
다시 무언가가 오고 있다.
* * *
오늘은 일레이 카르티카와 정기 접선이 있는 날이었다.
‘길다 암살 시도 이후로 처음 보는 거로군.’
난 일레이를 통해 아키에스 도미니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이반에게 전달했다.
그 답변을 일레이가 가져올 것이다.
저벅, 저벅.
난 단말기를 꺼내 암호화된 메시지를 보며 약속 장소를 확인했다. 몇 번을 보아도 여기가 맞았다.
“흠.”
나는 알록달록한 조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여인과 사내들이 교태를 부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사창가.’
여긴 사창가였다. 민망할 정도로 헐벗은 창부들이 당당하게 걸어다니고 있었다.
보더시티답게 종족도 다양했는데, 동족이 아닌 자의 손을 잡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난 사창가 입구에 들어서며 수많은 호객 행위를 쳐냈다. 누군가는 내 뒷덜미에 대고 욕을 쏟아붓기도 했다.
스스스.
난 감각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미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이번 접선 장소는 사창가다. 일레이가 고를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딸깍.
난 지정된 가게로 들어갔다.
점멸하는 조명 피어싱을 얼굴에 수십 개나 박아넣은 사내가 날 힐끗 보았다.
사내는 험악한 피어싱과 달리 친절한 미소와 말투로 날 맞이했다.
“아, 예약하신…… 헤일라스 씨이신가요?”
예약명도 참 악취미로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먼저 복도를 걸어가며 방으로 날 안내했다.
“이번에 새로 온 여자입니다. 용케도 첫 손님으로 예약하셨네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사내가 방문을 열며 물러났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며 모든 걸 감각으로 훑었다.
‘단, 한 명.’
한 명만이 방 내부에 있었다. 다른 기척은 일절 없었다. 적어도, 내 감각에선 그러했다.
끼익, 쿵.
문이 닫혔다. 어두운 내부에선 붉은 간접등이 작동했다.
침대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다리를 꼰 채로 나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보라색 머리카락은 등골까지 늘어져 있었다. 얼핏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중성적인 외모였다.
기이잉.
의체의 기동음이 나면서 허리는 좀 더 잘록해졌고, 가슴은 풍만하게 튀어나왔다. 아주 정교하고도 비싼 가변의체였다.
“안녕, 루카.”
달콤한 미성이 울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이반 크라치아가 날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 현재, 그는 소년기보다 두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의체를 쓰고 있었다.
‘공식 석상에서 근엄한 청년의 의체를 쓰고 있지만, 이반의 실제 정신과 맞는 의체는 지금의 모습이겠지.’
이반은 발끝을 까딱거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딱딱한 호칭은 집어치워. 이반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벌써 까먹었어?”
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반은 형형색색의 이채를 담은 눈동자로 날 내려보았다.
‘반응도 빠르고 무척 자연스럽지만, 아마 원격 조종 의체일 거야. 뇌가 담긴 본체가 아니겠지.’
황제는 제국의 정점이고, 이반도 온갖 신기술을 두르고 다니고 있다. 내 이해를 벗어난 기술도 사용하고 있을 터다.
“하핫, 날 관찰하고 있구나, 루카. 역시 넌 재밌어.”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끈한 나신은 여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기잉.
이반이 파티션 너머로 걸어서 나왔다. 그는 어느덧 중성적인 소년의 모습을 취했다. 옷이라도 갈아입는 듯한 전환이었다.
“일레이를 통해 제 의사를 전달받으셨을 겁니다.”
난 이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제국에선 상상도 못 할 무례한 언행이다.
“네가 아키에스 도미니로 자진해서 복귀할 줄은 몰랐어. 정말로 놀랐다고! 그날 밤은 가슴이 뛰어서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지!”
생리현상조차 뜻대로 통제하는 전신의체이면서…… 잘도 저딴 말을 지껄인다.
이반은 오랜 친우를 만난 것처럼 날 정겹게 맞이했다.
난 감정 신호를 철저하게 숨겼다. 상대는 제국의 수장이다. 사소한 것 하나로도 무수히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자다.
‘인간이 아닌 기계처럼.’
나는 무척이나 건조한 태도로 일어서며 이반과 마주했다.
“흐응, 그래도 너도 나도 바보는 아니잖아? 루카의 아키에스 도미니 복귀는 내게 독약이나 다름없지. 날 싫어하는 사람을 측근으로 두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반은 저란 독을 기꺼이 삼키겠죠. 당신은 저보다도 더 극악한 독을 품고 있으니까요.”
“이래서 즐겁단 말이지. 넌 언제나 도전적이고 창의적이야. 제국에서 연방으로 도망친 망명자가 사실은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종사이자 이중 첩자라……. 내가 이렇게 재밌는 걸 먹지 않을 리가 없잖아. 구미가 당겨.”
이반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곧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더니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너와 다시 게임을 할 생각을 하니 흥미진진한걸.”
“이건 게임이 아닙니다, 이반.”
난 경멸을 담아 눈을 찌푸렸다.
“아니, 게임이야. 이 자리에 올라서니 더 잘 알겠어. 우린 모두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난 이반의 말에 집중했다. 무의미한 듯이 던지는 말 중에서 어떤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제 목적은…….”
“지젤 쿠스토리아를 찾는 거지? 그 애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하하, 순진해.”
흔들리지 마라, 루카.
그저 날 자극하는 말이다. 이반이 지젤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협상 카드로 진작 내밀었을 것이다. 그게 끔찍한 진실, 지젤의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뭐라 생각하시든 간에, 지금 저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이 황제로 있는 제국보다 연방에서 제국의 첩자로 활동하는 게 더 안전할 것이고요.”
웃기는 말이지만 사실이다. 제국, 특히 아크바란에서 나는 이반에게 대항하지도 못하고 당할 것이다.
그러나 연방의 보더시티라면 이반도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루카, 지금 내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반응도 좋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을까? 어쩌면 원격 조종으로 의체를 움직이는 게 아니지 않을까? 이 안에 뇌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절호의 기회이지 않을까?”
이반은 알몸으로 춤을 췄다. 소년의 팔다리가 만드는 곡선은…… 표현이 좀 머쓱하지만, 꽤 상당히 아름다웠다.
“같이 추자, 루카. 넌 인간 여자를 좋아하지?”
이반이 다가오더니 어느덧 여인의 몸을 갖추었다. 그는 내 팔을 잡아끌며 움직였다.
나도 그와 춤을 추고 싶은 건 아니다. 알아보고 싶은 게 있었다.
‘단순히 춤이라면, 미리 입력해 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추는 춤은 실시간으로 움직임을 맞춰야 한다. 원격 조종으로 이런 섬세한 움직임을 소화할 수 있을까? 그 정도의 기술을 황실은 가지고 있는 건가? 원격이니 데이터만 끊어지면 의체가 주저앉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순간을 즐기자고.”
이반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가 달다. 이것 또한 제국의 기술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