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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귀스 레지나는 복잡한 인물이다. 이성과 비이성이 공존하며, 고고한 성녀 같으면서도 때론 거리의 창부처럼 천박했다.
성격과 감정의 격차가 크다는 건 그만큼 불안정한 인간이란 뜻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는 앙귀스 레지나가 광기 어린 집착을 가진 여자라 생각했다.
그 판단과 평가는 틀렸다.
앙귀스 레지나는 유약하고도 가냘픈 자아를 지키기 위해 뒤틀린 가면을 뒤집어쓴 여자였을 뿐이다. 자신이 약하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가면을 붙잡고 있었다.
‘앙귀스 레지나…….’
그녀의 발버둥이 내겐 낯설지 않았다. 나도 그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동질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동정과 동질감은 사랑과 별개의 감정이다. 사랑의 매개가 될 순 있어도 그 자체는 아니다.
‘그리고 지젤…….’
나는 지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며 움직였다.
지젤의 존재가 있는 한, 나는 다른 화학 반응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만약, 내가 앙귀스 레지나를 안는다면…….’
그로 인해 내 머릿속의 화학 물질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 지젤을 향한 동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나마저 포기한다면, 지젤은 미궁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한다.
스르르르.
이 장소에 없는 지젤이 느껴진다. 그녀의 체취가 온기가 내 등에 닿는 듯했다.
내 의식에 깊게 각인된 지젤은 쇠사슬을 늘어뜨리며 내 목을 껴안고 있었다. 사슬이 살아있는 것처럼 얽히며 나를 죄고 있었다. 그녀의 팔을 잡아 뜯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속박이었다.
“루카?”
앙귀스 레지나가 어깨를 기대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멍하니 앞을 보았다. 상담실은 편안하고 고요하다.
내 피가 식어가고 있다.
“앙귀스 레지나, 이건 네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야. 오롯이 내 문제지. 내겐 저주가 걸려 있어. 네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날 흥분시키지 못할 거다. 그 저주가 풀리기 전까진…… 난 여자를 안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앙귀스 레지나가 당황하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내 말을 확인했다.
“확인했으면 손을 치워. 가야가 오고 있다.”
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앙귀스 레지나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저주가 풀리면 제게도 가망이 있다는 건가요?”
“글쎄.”
난 어깨를 으쓱했다. 앙귀스 레지나도 내 확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물러나며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복도의 발걸음이 문 앞에 멈췄다. 나는 시선을 문에 두었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가야가 얼굴을 내밀었다.
“루카 씨,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난 머리를 까닥이며 앙귀스 레지나를 내버려둔 채로 방을 나갔다.
가야는 상담실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지더니 벽에 등을 기댔다.
“흔한 배합의 각성제입니다. 순도는 길거리 물건치곤 나쁘지 않고요.”
“전투 자극제로 효용이 없다는 뜻이지?”
“네, 각성제 특유의 고양감 정돈 생기겠지만…… 폭력성과 공격성을 강화할 요소는 전무합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예상대로다.
‘보얀은 애꿎은 마약상에게 시비를 걸고 죽인 거다.’
더군다나 보얀은 자신의 공격성이 약물 탓이라고 믿고 있다.
‘보얀은 다른 크롤러처럼 무작정 싸우고 싶었던 거다. 무의식 영역이라 자신조차 모르고 있는 거야.’
보얀은 자신의 폭력과 공격성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나아가 그 공격성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정한다고 본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공격성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해.’
나는 입술을 씰룩였다. 귀찮은 일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난 상담실 문을 슬쩍 보았다. 저 안에는 앙귀스 레지나가 있다.
“날 앙귀스 레지나와 단둘이 둔 이유는?”
“치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아서였습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따분한 오판이로군. 그보다 앙귀스 레지나는 과거의 기억을 바로잡고자 하는데, 쟈파가 그걸 반길까?”
가야도 드물게 놀란 기색을 내보였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별로 아는 건 없어. 너와 쟈파가 엘리제를 지우고 앙귀스 레지나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만 알지.”
“그 정도면 대단히 많이 아시는 거라 생각합니다만…….”
“앙귀스 레지나의 기억을 바로잡는 걸 쟈파가 좋아하진 않을 거야. 특히나 자신의 공백을 틈타서 저지르는 짓이라면 더 그렇겠지.”
“쟈파 씨의 의도는 제 치료 행위와 무관합니다. 전 환자의 요청에 따라 필요한 일을 할 뿐이죠. 전 쟈파 상사의 직원도 아니고, 쟈파 씨의 부하는 더더욱 아닙니다.”
가야는 평소처럼 고요하게 말했다. 그의 팔다리에서 장신구가 찰랑거렸다.
“선생의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가야가 정중히 고개를 까닥였다.
“지금의 엘리제 씨는 과거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작별 인사로 손만 들었다.
저벅, 저벅.
난 가야의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이튿날, 난 보얀을 데리고 쟈파 상사 사옥의 훈련실로 들어갔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르겠다.
콰직!
난 보얀의 팔을 잡은 채로 벽을 향해 던졌다.
훈련실의 벽은 단단해서 보얀과 부딪혀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금이 가는 건 보얀의 뼈이고, 뭉개지는 것도 놈의 피부와 살이다.
“카악, 컥, 커억, 헉.”
보얀은 등을 세게 부딪힌 탓에 숨을 헐떡였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땅을 짚은 채로 헛구역질을 해댔다.
“벌써 무릎을 땅에 대고 있는 거야? 넌 이 정도로 쓰러지는 놈이 아니잖아.”
내가 빈정거리며 몸을 풀었다. 목을 좌우로 뻐근하게 비틀었고, 어깨도 한 번씩 빙빙 돌렸다.
“제, 제가 사고를 쳤다고 벌을 주시는 건가요? 사람을 죽였다고요?”
보얀의 눈빛에서 야성이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을 죽였다고 벌을 줘?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놈 같아?”
나는 웃으면서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전신의 신경계가 반응하며 호응했고, 내 의족과 의수는 피와 살보다 더 밀접하게 뇌와 들러붙었다.
“……그리고 보얀, 넌 사람을 죽이고도 잠을 잘 잤을 거다. 어제는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지? 그간 쌓인 욕구가 사뿐히 해소됐을 테니까.”
“저는…….”
보얀은 뭐라 변명하려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각성제의 성분을 조사해 봤다. 네가 주장하던 전투 자극 성분은 없었어. 넌 무고한, 아니, 뭐, 그런 놈들이 무고하진 않지만, 어쨌든 네겐 죄를 저지르지 않은 마약상에게 시비를 걸고 쳐 죽인 거지.”
보얀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루카 씨, 그런 거짓말을…….”
난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세차게 땅을 밀며 나아갔다. 순식간에 접근한 내가 보얀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발로 짓눌렀다.
콰- 앙!
보얀은 본능적으로 내 짓누르기를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야말로 짐승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지금,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여? 내가 이딴 거짓말로 애새끼를 속이는 놈이라고 생각해?”
나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애새끼의 자기부정을 타이르듯 설득하고 싶진 않았다.
“그 각성제가 전투용이 아니라면, 제, 제가 그럴 리가 없어요.”
“넌 크롤러야.”
“전 다른 크롤러와 다르다고요!”
보얀이 소리를 질렀다. 저음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날 뒤덮으며 지나갔다.
“네 유전자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지. 내가 아무리 잘나 봐야 인간에 불과하듯, 너도 크롤러에 불과해.”
“루, 루카 씨는 절 도와주신다고 했잖아요. 다른 크롤러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요.”
“그래서 널 가르칠 생각이다. 네 살육 본능은 억누른다고 사라질 성질이 아니야. 네 의지와 무관하게 터지고 말 거다. 사소한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때론 가까운 이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지.”
“전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겁니다.”
“하하, 본능과 야성을 억누르는 게 그토록 쉬웠다면, 네 동족들이 그렇게 고생할까!”
나는 저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한다. 나도 인간으로 태어나 극단적인 공격성을 갖추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인간이고, 전투 자극과 반응에 민감하도록 생물학적 개조 시술조차 받았다.
‘나조차도 때때로 충동을 이겨내기 힘들다.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지.’
크롤러는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건 무의미한 짓…… 카악, 컥!”
나는 손바닥으로 보얀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쳤다.
푸핫!
보얀의 입안에서 피가 터졌다. 그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내숭 떨건 없다. 전력으로 네 본능을 쏟아내. 거기서부터 통제는 시작한다. 그릇을 어디까지 키울지는 넘쳐봐야만 알 수 있지.”
“저는 약, 약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왜 제 말을 믿지 않는 거죠! 왜! 루카 씨조차 절 믿지 않는다면, 저는!”
보얀이 울부짖었다.
나는 웃고 말았다. 정말로 진정성이 넘치는 외침이었다. 자칫하면 믿을 뻔했다.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사람은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으니까.
“넌 적당한 핑계가 생길 때마다, 사람을 죽이겠지. 죄의식이나 자책감도 느끼지 않을 거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라 생각할 테니까. 내가 보기에…… 넌 다른 동족들보다도 더 끔찍한 괴물이다, 비열하기까지 하지.”
“저, 저는 루카 씨와 싸우기 싫어요. 이, 이런 훈련도 받을 이유가 없고요.”
“보얀…….”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보얀과 만난 이후로, 녀석의 얼굴이 이토록 꼴 보기 싫었던 적이 없었다.
“……넌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후회와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어. 다른 종족은 몰라도, 대부분의 훈련받지 못한 인간은 첫 살인을 그렇게 쉽게 저지르지 못해. 우발적인 사고라도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 경우가 대다수지. 이게 무슨 의미인지 크롤러인 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다.”
내뱉은 말이 무겁다. 난 농담을 섞지도 않았다.
기이잉, 기잉.
내 의수와 의족의 출력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었다. 난 진동조차 감추지 않았다.
“루카 씨?”
“이대로라면, 넌 최악의 괴물이 된다. 난 그 꼴을 보기 싫어. 그러니…… 여기서 널 죽여버릴 생각이다.”
“농…….”
내 발이 움직였다.
콰- 지직!
내 발끝에 얻어맞은 보얀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는 천장에 철퍼덕 부딪혔고, 눈동자는 의식이 사라지듯 뒤집혔다.
철퍼덕!
천장까지 날아갔던 보얀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 살의는 거짓이 아니다. 보얀의 본능이라면 그걸 진심이라고 느낄 것이다. 방금의 일격도 충분한 살의를 담은 것이다.
‘만약…….’
보얀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도, 나와 싸우길 거부하며 이성을 유지한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겠지.’
어쩌면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크륵.”
쿨럭이는 듯한 울음이 보얀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난 뒷덜미가 섬뜩한 걸 느꼈다. 누군가가 얼음으로 만든 송곳으로 내 척추를 꾹꾹 찌르는 느낌이다.
“크르륵, 크륵.”
보얀이 피를 뚝뚝 흘리며 일어섰다. 덩치가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놈의 근육에 피가 들어간 탓이겠지.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루카, 씨.”
일어선 보얀은 자신의 의지로 내게 살의를 내뿜었고, 손톱은 칼날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