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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50

250
휴식은 정말 중요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

휴식 없는 노력은 덧없이 증발한다. 근위대에서도 제대로 쉬는 법을 따로 가르칠 정도다.

균열 직전까지 달아오른 정신을 고요하게 식히고, 꼬여버릴 듯이 날뛰는 신경계를 바로 잡는다.

뇌리에선 연관이 없다는 듯이 흩어진 조각들이 희미한 실낱에 엮여 윤곽을 드러냈다.

‘……일레이는 황제를 축출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

수많은 반제국주의 세력의 염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일레이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도 없어.’

난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일레이가 날 위해서 움직이는 건 맞아. 하지만 그건 일레이의 자의적 판단이고, 녀석은 자신의 목적과 내 안전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일레이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이번에 일레이를 만나고 나는 깨달았다.

‘일레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곧다면 곧고, 굳다면 굳은 의지였다. 그리고 섬뜩하리만큼 오만하다.

‘길다는 협상에 들어갔어. 적당한 기업과 합작하겠지.’

길다와 더 만나는 건 위험하다. 내게도 그렇고, 길다에게도 그러했다.

‘황제는 날 주시하고 있다.’

내게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장 가장 큰 의문은 하나였다.

‘누가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암습을 경고한 것인가?’

바로 떠오른 인물은 한 명이다.

‘마녀 바바라.’

바바라는 지젤에게 집착하는 광인이다.

‘일레이 정도 되는 인물의 기밀 작전을 파악하고 움직였다.’

그런 역량을 가진 해커는, 내 인지 범위에선 바바라밖에 없었다.

‘바바라의 12년은 조사와 추적이 불가능하다. 제국의 첩자이자, 네메시스의 조직원이니까.’

바바라는 지젤 납치의 용의자 중 하나였다.

‘바바라의 집착이 여전하다면, 지젤을 그냥 놔둘 리가 없으니까.’

내가 먼저 바바라에게 접촉할 방법은 없다. 그녀는 신출귀몰하다. 자신을 숨기는데도 능했다.

바바라는 물리적 전투력이 없을 뿐이지, 괴물에 속하는 여자였다. 내 상식 범주 밖에 있다.

삑.

나는 벽면 통신기에서 울린 호출음에 눈을 찌푸렸다.

흩어진 사고가 몽글몽글하게 형태를 갖추며 굳어가고 있었는데, 그게 일시적으로 흐트러졌다.

벽면 통신기의 호출은 처음이었다. 날 아는 사람은 전부 내 단말기로 연락한다.

난 의식을 정돈하며 현실로 감각을 끌어올렸다.

벽면 통신기의 화면에선 의외면서도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야나카 본드레드. 보얀의 친구이자, 연방의 공식 MAU 파일럿.’

야나카가 사옥 1층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쓴 채로 자켓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있었다.

내게 얻어맞은 뺨은 아직도 부어있는지 거즈를 덧대고 있었다.

‘영락없는 불량아의 모습이군.’

저 모습만 보면 연방의 공식 파일럿 같지가 않았다.

‘방문 거절.’

나는 벽면 통신기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굳이 야나카를 만날 이유는 없다. 난 애들 상담하기엔 아직 덜 늙었다.

거절을 누르니 화면이 꺼졌다.

삑!

통신기가 재차 울리며 야나카의 모습이 화면에 떠올랐다. 야나카는 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입술 모양으로도 난 그 말을 알아먹을 수 있었다.

‘보얀을 보러 왔다?’

보얀이 야나카의 방문을 연거푸 거절한 모양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방문 허가를 눌렀다.

“……귀찮군.”

이렇게 일이 많아질 줄 알았으면 보얀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보다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갔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흠.

나는 벽에 걸린 외투를 챙기고선 사옥 1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이 보였다.

우두머리가 중상이지만, 쟈파 상사는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었다. 쟈파는 어디까지나 결정권자다. 실질적인 시스템은 자동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회사는 일종의 군집생물이었다.

야나카는 1층 라운지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꾸벅.

야나카가 날 보자마자 일어서더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뺨을 맞더니 예절 주입이 좀 된 건가?’

난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야나카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용무만 군인처럼 간결하고 빠르게 말해.”

내가 턱짓하며 말했다. 야나카는 주변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보얀을 만나러 왔어.”

“네 방문을 무시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강제로 만나서 뭘 하려고?”

“내 쪽 주치의에게 부탁해서 크롤러가 쓸 만한 약을 준비했어. 연방의 최고 엘리트가 배합한 물건이니 길거리 약물이나 병원의 처방약보다 훨씬 나을걸.”

야나카가 주머니에서 앰풀이 담긴 상자를 꺼냈다.

“……이렇게까지 보얀을 챙기는 이유는?”

“추궁하듯 말하지 마. 난 단지 보얀을 돕고 싶을 뿐이야.”

“보얀과 친해져서 네가 얻을 건 없으니 하는 말이다. 넌 앞날이 창창한 연방의 공식 파일럿이고, 보얀은 별종 크롤러에 불과해.”

야나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친구를 돕는데 하나하나의 이유와 명확한 이익이 필요해?”

나도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짜증 날 정도로 순수한 발언이었다.

“으흠, 정말로 그게 이유의 전부라면, 보얀에게 데려다주마. 따라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나카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나를 따라 승강기에 탑승했다.

우우웅.

승강기의 기동음이 울렸다.

야나카는 내겐 낯선 부류의 사람이었다.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다, 특히 또래 아이들에게. 인망도 두텁겠지.’

그러니까 인기가 많은 것이리라. 싸움도 잘하고 지위도 높다. 연방의 공식 파일럿은 꽤 상당한 엘리트일 것이다.

“차관님이 당신 이야기를 자주 해. 상당히 우수한 장기말이 들어왔다고 하더군.”

야나카가 승강기의 어색한 침묵을 깼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제국의 유명인사였다면서? 제국 근위대장의 양아들이라고…….”

내가 야나카의 말을 잘랐다.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지?”

“파일럿 훈련을 맡은 교관 중 하나가 제국 근위대 출신이야. 강화 신경계 활용한 근접전투체계를 가르치지. 그 교관이 당신을 알고 있었어.”

“제국 근위대에게 배운 것치곤 근접전투 실력이 영 아니던걸.”

야나카는 자존심이 긁혔는지 발끈하며 나를 쳐다봤다.

“난 파일럿이야. 근접전투는 부차적인 교양 같은 거지.”

“혈세로 만든 포탄을 무의미하게 쏟아붓는 꼴이 대단하긴 했지. 연방도 고생이 많군.”

팔짱을 낀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승강기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그, 그건 그 레기온들이 이상했어. 알려진 것보다 기동성도 우수하고 방호력도 높았다고. 원래라면…….”

“이 세상이 게임도 아니고, 실전에서 적들이 네가 원하는 수준의 성능과 전투력만 딱 갖추고 나올 거라 생각해?”

“아니, 그렇,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으음, 은근히 놀리는 게 꽤 재밌었다. 승강기가 좀 더 느리게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파일럿도 전부 너 같다면 신병기의 미래도 암담하겠네.”

“……이번 실전으로 배운 게 많아. 더 나아질 수 있어.”

난 속으로 우습다는 생각까지 했다. 야나카는 실전에서 매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제국의 방식이…… 정예군인 양성에선 옳다.’

근위대 생도는 한없이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받으며, 생도 수료 이전에도 실전 임무를 다수 맡는다.

‘유약해.’

야나카는 살인 경험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심리검사에서 군인 적성이 있다고 한들, 실전에 들어가면 검사로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법이다.

‘연방도 모르는 건 아닐 터다. 더군다나 근위대 출신도 파일럿 훈련을 돕고 있다고 하니, 내 생각과 똑같은 지적이 있었겠지.’

하지만 연방에서도 나름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연방은 야나카 같은 파일럿을 전쟁 영웅으로 키울 생각이다. 대중에게 지지를 받을 정도의 인품과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겠지.’

연방에서 야나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놔두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죽으면 의미가 없다. 전장에선 힘이 모든 걸 합리화하고 증명하지. 인격적 결함 따윈 전장에서 이긴 뒤에 따질 일이고.’

뭐, 내가 저들의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결국, 누가 옳은지는 전쟁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뱀, 뱀, 뱀…….

승강기에서 쟈파 버거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굳이 이 사실을 언급하는 까닭은…….

“뱀, 뱀……, 아, 음.”

야나카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선 입을 다물었다.

“앙귀스 레지나를 좋아하나 보지?”

“별, 별로.”

야나카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사인을 받아줄까?”

“안, 안 좋아한다니까!”

야냐카의 목청이 높아졌고, 승강기도 때마침 멈추면서 열렸다.

여기서부턴 쟈파의 측근만이 오가는 공간이었다. 일반 사원은 출입을 못 한다.

복도는 한결 고요했다. 나는 보얀의 방을 향해 걸었다.

‘앙귀스 레지나.’

난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앙귀스 레지나의 기척을 느꼈다. 특유의 화장품 냄새 덕분이다.

“아, 루카.”

앙귀스 레지나는 다소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쟈파의 중상 때문에 걱정이라도 한 듯했다.

우뚝.

날 따라오던 야나카도 걸음을 황급히 멈추고선 앙귀스 레지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륵.

앙귀스 레지나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내 팔을 스치듯 더듬었다.

“따로 할 말이 있어요.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해요.”

“지금 해도 돼.”

“지금은 귀여운 손님이 옆에 있잖아요. 안녕, 아가씨.”

앙귀스 레지나가 야나카를 힐끗 보더니 활짝 웃었다. 빛이 날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보얀의 손님이야.”

“어쨌든 그게 그거죠. 지금은 저도 좀 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가브리엘과 라그나타가 떠났더라고요. 인사도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어요.”

“아, 그래? 인사할 정도로 너와 각별하지 않았던 모양이지.”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할게요.”

앙귀스 레지나가 나와 야나카를 스치고 지나가려 했다.

야나카는 우물쭈물하더니 곧장 앙귀스 레지나를 쫓아갔다.

“저, 저기, 사, 사인, 아, 사인할 만한 게, 잠, 잠시…….”

“걱정 마. 팬을 위한 사인지는 항상 가지고 다녀. 아이돌의 소양이지.”

앙귀스 레지나는 연기하듯 다정다감하게 말했다.

야나카가 얼굴을 붉히며 앙귀스 레지나의 사인을 받아서 챙겼다. 앙귀스 레지나는 붉은 입술을 사인지에 포개는 서비스까지 했다.

야나카는 여느 10대 소녀처럼 웃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벅, 저벅.

이윽고, 볼일이 끝난 야나카가 앙귀스 레지나를 보내곤 내게 걸어왔다.

“사인이 필요 없다면서?”

내가 이죽거렸다.

“생각해보니, 아는 친구가 앙귀스 레지나의 팬이라서…….”

“퍽이나.”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앙귀스 레지나가 아이돌이 맞긴 한가 보다.

나는 야나카를 데리고 보얀의 방문 앞에 섰다.

똑, 똑.

난 초인종 대신에 문을 두드렸다. 나 혼자라면 그냥 열고 들어갔을 터다.

‘흐음.’

문 너머라지만 인기척이 너무 없었다. 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휘이이잉.

문을 열자마자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층의 창문이 활짝 열린 탓이었다.

“참나…….”

나는 안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납, 납치?”

“납치는 무슨…….”

창틀을 보니 크롤러의 손톱자국이 있었다. 보얀의 크기와 딱 맞았다.

‘외출 한번 거창하게 하는군.’

나는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람이 점처럼 보이는 높이다.

“크롤러란 참 대단해. 별다른 훈련 없이 타고난 본능과 신체 능력으로 여길 내려갈 수 있다니 말이야.”

내가 구시렁거리며 창틀을 붙잡아 넘었다.

휘릭.

창틀을 붙잡고 외벽에 매달린 나는 아래를 응시했다. 외벽의 틈새를 따라 보얀의 흔적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술래잡기.”

내가 그리 말하며 창틀을 놓았다. 야나카 눈에선 사람이 떨어지면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후우우우웅!

공기가 내 귓가로 퍼졌다. 자유낙하를 하니 온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느려지는 시간, 짜릿함, 전투 준비, 심장의 고동, 혈액이 흐르는 소리까지 귀에 들리는 듯한 감각의 확장. 뭐, 마약이 따로 없군.

키이이이이이잇!

난 떨어져서 뒈지기 전에 벽을 긁으며 제동을 걸었다.

슬쩍 위를 보니 야나카가 극심히 갈등하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배운 적이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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