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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더시티의 노을이 가라앉고 어둠이 드리우고 있다. 오늘은 달조차 없는 밤이었다. 꽤 음침하군.
보더시티의 부유층 거리는 건물 밀도가 낮지만, 하나하나가 초고층이라 색다른 분위기였다. 잘 포장된 넓은 거리에는 보더시티에서 보기 힘든 경찰과 순찰 드론이 오가고 있었다.
우우웅.
나와 이스마엘이 탄 공중차량은 어느 초고층 건물 옥상에 착륙했다.
“밀회가 끝나면, 제가 윗선에 내밀 만한 결과를 가져오셔야 할 겁니다.”
이스마엘이 날 배웅하며 말했다.
“안심해도 좋습니다. 차관님의 노력과 호의를 배신하진 않을 테니까요.”
나는 그리 말하며 공중차량에서 내렸다. 이스마엘의 미소가 내 눈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윗사람의 신뢰에 답하는 건 내 특기다. 나는 상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적이 드물다.
‘안정감이 있다.’
나는 조직에 속하는 걸 좋아한다. 그간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쟈파 상사는 날 통제할 힘이 없는 일개 회사였기 때문이지.
그러나 이스마엘과 연방 정부는 국가의 힘을 가지고 있다. 내 목줄을 쥐고 잡아당길 수 있었다.
‘결국, 나도 잘 훈련받은 개라는 건가.’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씁쓸했다. 나 역시, 불안한 자유보다 통제와 목줄을 좋아했다.
‘이스마엘과 연방 정부의 기대만 충족시키면 된다.’
내 쓸모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저들의 비호가 내 배후에 머물 것이다.
저벅, 저벅.
난 옥상에 돌출된 승강기 앞에 섰다. 승강기가 열리면서 도착 층이 저절로 설정됐다.
달그락.
나는 승강기로 들어가며 장비를 점검했다.
‘자동추적 권총.’
문제가 없다. 망막 디스플레이의 연동도 정상이다. 배터리 충전도 되어있고, 탄도 넉넉했다.
‘화광자검과 파이.’
파이는 화광 무기를 보조하는 라피스의 작품이다. 예열과 냉각 기능이 있다.
‘화광자검은 외날의 화광예도보단 날이 짧지만, 절삭력은 동급이다. 양날에다가 직검이니 찌르기도 쉽고, 빠르게 휘두를 수 있어.’
화광자검으로 훈련해본 적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굴려보니 사용법이 뻔히 보였다.
화광자검은 내 전투 방식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다. 나는 까다롭고 복합적인 전술과 움직임으로 적의 인지 감각을 뒤흔든다. 무기술 자체가 현란하진 않다.
‘예나 지금이나 내 무기는 언제나 일격필살이었지.’
화광자검의 성능을 내려면, 검술 자체에서 창의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다. 유념해 두자.
‘화광의 이그니움 칼날로 만든 비수, 불나방 세 자루.’
비수 두 자루는 좌우로 나눠서 코트 안쪽에 수납했다.
‘남은 한 자루는 오른쪽 발목.’
불나방은 비장의 수다. 나보다 ‘강자’를 만나면 불나방으로 허를 찔러야 이길 수 있다.
‘어떤 자세와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게 배치했다.’
내가 장비를 인지하는 사이에 승강기가 멈췄다. 42층이었다.
위이이잉.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작은 진동과 함께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라, 라라, 라라.
층 내부에선 노래가 흘러나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천장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눈으로 보일 정도로 허술한 감시는 없을 것이다.
벽의 재질과 공간에 따라 소리가 저마다 다르듯, 집중하면 사방으로 튕기는 반사음의 이질감도 느낄 수 있다.
스으으으.
입을 살짝 벌리며 후각을 예민하게 가다듬었다. 나는 냄새의 덩어리를 날고기 해체하듯 섬세하게 분리했다.
카펫을 밟을 때마다 오래된 먼지가 일며 과거의 냄새가 떠올랐고, 카펫이 없는 바닥과 벽에선 알싸한 청소 세제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저 안쪽에서 향수와 화장품 냄새가 기분 좋게 한 줄기로 뻗어 나왔다.
스스스.
환풍기가 만드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 내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공기의 흐름을 읽어라.
나와 길다 말고 누군가가 더 있다면, 만일 그자가 움직인다면, 일정했던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실내라면 이것만으로도 타인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감각 정보가 내 뇌로 치밀었다. 뇌는 뜨겁게 달아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했다.
‘감각 정보의 분석 결과, 이물감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인기척이지.’
직감과 육감은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정보를 뇌가 읽어낸 것뿐이다.
그리고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는 직감과 육감조차 무의식 영역으로 놔두지 않고, 표층의식에 가깝게 끌어 올린다.
“루카.”
내 의식과 청각 영역은 저 목소리를 잡아채듯 매섭게 질주했다. 짜릿하다.
내 기억 속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였다. 변함이 없었다.
‘루카.’
저 말 한마디로도 온갖 감정과 정보가 휘몰아쳤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긴장하며 탐색하는 내가…… 갑자기 초라하고 한심했다.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다, 빌어먹을.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눈을 떴다. 창문이 없는 밀실에는 은은한 조명이 아늑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길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길다를 관찰하듯 훑었다. 그녀를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머리가 길었네요. 몸도 많이 컸고요. 이젠 소년이라는 느낌이 없어요.”
“길다도요. 많이…… 예뻐졌네요.”
정확히 말하면 세련됐다.
길다는 더는 기름 냄새가 나는 작업복을 입지 않았다. 제국의 상류층 귀족처럼 빳빳한 의복을 입었고, 화장한 입술과 눈매는 붉고 짙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가 반짝였다. 술잔을 든 손가락의 손톱은 보랏빛이었고 노동에서 벗어난 듯이 곱게 자라있었다.
길다는 회사의 대표이고 기업인이다. 변한 외형을 보니 그 사실이 절실히 느껴졌다.
“예전엔 예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고요. 더 예뻐졌다는 뜻이죠.”
길다가 맑게 웃었다. 내 기억 속의 웃음과 다르지 않았다. 외형은 달라도 속은 같다는 듯이 말이다.
“농담이에요. 편하게 앉아요.”
길다는 차분하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제게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물어봐도 됩니다.”
난 아주 드물게 선공을 양보했다.
“글쎄요. 전 이렇게 루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루카에게 그다지 떳떳한 입장이 아니고요.”
나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떳떳한 입장이 아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전 의식을 회복할 때부터 보더시티에 있었습니다…….”
난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말했다. 보더시티에서 깨어나 쟈파 상사 밑에서 일한 것. 키누안이나 일레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잘 지내고 있나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제 곁에 있는 것보단 낫겠죠.”
길다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은 멋대로 저와 연락을 끊고 사라졌어요. 보더시티에서 숨어버리니 찾을 방도가 없었죠. 아크바란에서 보더시티까지 영향력을 미치긴 힘드니까요. 변명처럼 들리겠죠?”
나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뇨. 믿습니다.”
사실은 믿지 않는다. 적당한 자금과 행동력만 있었으면 가브리엘을 찾아서 챙길 수 있다.
“루카가 궁금한 건 지젤에 대한 거겠죠.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 잔 마시지 않고선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루카는요?”
길다가 술병을 내 쪽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빈 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잔만이라면요.”
내 눈앞의 사람이 길다가 아니었다면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재회를, 기념하며.”
길다가 짧게 말하며 술을 마셨다.
나도 머리를 젖히며 술을 들이켰다. 이 술이 함정이고 독약이라면 길다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나도 죽을 생각이다.
딱.
내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젠 지젤에 대해 말해주시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큰 흐름은 대충 알고 있죠? 내막이 궁금한 걸 테고요.”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해도,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대립하며 싸우는 모습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고, 길다는 눈물이 찔끔 맺힐 정도로 웃었다.
“하핫, 사람은 변해요. 적당한 시간과 동기만 있으면 누구나 변하죠. 루카는 누가 변했을 것 같아요?”
나는 술병을 내 앞에 가져와서 잔을 채웠다. 그리곤 단번에 들이켰다.
“둘 다.”
한 명만 변하고, 다른 하나가 여전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12년은 긴 시간이다.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어요. 지젤과 저는 죽이 잘 맞았거든요. 루카도 기억하다시피요. 지젤은 절 존중했어요. 저도 지젤을 좋아했고요.”
“그러니 더 상상이 어렵습니다.”
“우리 회사는 빠르게 커졌어요. 직원도 많아졌고요. 여기서부터 견해 차이가 생겼어요.”
“견해 차이?”
“지젤은 저보다 어렸어요. 전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죠.”
지젤에겐 어린애 같은 면모가 있긴 하다.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속은 유약하며…… 때론 쉽게 무너진다.
아아, 그랬군.
나는 여기까지만 듣고도 마지막 조각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난 아랫입술을 튕기듯 깨물었다.
‘나 때문이다.’
길다는 내 추측과 예상을 증명하듯 말을 이어갔다.
“지젤은 경영에 사적 감정을 집어넣었어요. 회사의 성장과 번영은 관심이 없었죠. 처음에는 용납 가능한 수준이었어요. 사실상 2인 기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직원이 수백 명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그 ‘사적 감정’이 저와 관련된 거로군요.”
“그렇겠죠. 저도 눈이 달려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어요. 갑작스러운 보더시티 진출 선언도…… 루카를 제국 밖으로 빼돌리기 위한 핑계였죠. 당시 지앤지는 제국 내에서 경쟁 회사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어요. 산업 스파이로 인한 기술 유출도 있었고요. 내수 시장 점유율도 빼앗길 판국이었거든요.”
지젤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최우선 순위로 삼고 만사를 처리했다.
“그래서 길다가 제게 떳떳하지 않다고 말한 거군요.”
“당시, 저는 루카보다 우선해야 할 게 있었거든요. 회사가 무너지면 절 믿고 따라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요. 그리고 지젤은 선을 넘었어요.”
“횡령입니까?”
“지젤은 장부까지 다년간 조작했어요. 횡령한 금액은 다른 현물로 전부 바꿔서 추적조차 불가능했죠. 지앤지 사이버네틱스의 사운이 흔들리는 규모의 횡령이었어요. 전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어요. 그 과정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여기서 말하기 싫을 정도죠.”
길다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는 미간을 누르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제가 버려야 했던 건 가브리엘만이 아니에요. 절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직장을 잃은 채로 밑바닥으로 추락했어요. 자살이든 타살이든 죽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렸죠. 횡령, 기술 유출 등등 아니, 그 기술 유출조차 아마도 지젤이…… 당장 돈이 필요해서 경쟁 기업들에게 넘긴 거겠죠.”
길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젤을 미워하고 있었다.
날 빼돌리고 치료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젤은 회사를 부수고 그 잔해를 팔아 자금을 충당한 셈이었다.
그렇게 부서지는 회사를 필사적으로 지탱하며 재건한 건 길다였다.
“지젤은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 필요했나 봐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거금이었어요. 제 추측과 예상을 훨씬 벗어났죠. 아무리 생각해도 루카를 빼돌리고 치료하는데 그 정도의 돈이 들 것 같진 않았거든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어요.”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내가 맥을 찔렀다.
“그래서 직접 손을 쓴 겁니까? 지젤을 제거하려고?”
이야기를 멈춘 길다가 고요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이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업가의 가면은 딱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