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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문실과도 같은 방에 갇혀 있다.
윙윙.
벽걸이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다. 날조차 금속인 선풍기에는 청소도 하지 않는지 시커먼 먼지가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후덥하군.’
나는 미지근한 물잔의 테두리를 톡톡 두드리며 벽을 응시했다. 저 벽 너머에선 연방의 관계자와 관료들이 날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가치를 재단하고 있겠지.’
지루한 시간이다. 나는 누군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제국의 황제가 날 원하고 있다.’
날 이반에게 넘기면, 제국은 연방에게 꽤 많은 걸 양보할 터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 제국의 어둠을 파헤칠 수도 있어.’
연방은 나의 처우를 선택해야 한다.
나를 영입해 주도적 교섭을 할 것인가, 나를 팔아넘겨 타성적 이득을 얻을 것인가.
내가 후자를 부정적 단어로 일컫는 건 당연하다. 내 입장에선 후자의 선택이 더 나쁘니까.
제국에 끌려가는 순간, 나는 이반 크라치아의 전리품이자 장식품이 된다. 내 자유의지는 두 번 다시 작동하지 않겠지.
현재 연방은 제국과의 교섭도 진행 중일 것이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나와 접촉할 것이다.
‘젠장, 나도 참 거하게 저질렀네.’
이젠 명백한 제국의 적이 되었다. 여러 사정이 있다고 한들, 시답잖은 변명은 집어치우자. 어쨌든 난 제국을 배신했다.
‘이건 도박이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이건 내 특기니까.
‘연방이 날 제국에 넘기려고 한다면…….’
아무리 가망이 없어도 발버둥은 쳐봐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나는 눈을 감으며 가수면을 취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이스마엘 차관이 혼자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경호원을 곁에 두지 않음으로, 나를 신뢰하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이스마엘 라.’
연방에선 내 전담으로 그를 지정한 모양이다. 안면도 그나마 있고, 정황상 이스마엘은 유능한 관료였다.
“일단은 축하드립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씨.”
“상황이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루카 씨의 마음이지만요.”
“믿지 않을 이유는 없죠. 단지, 항상 조심할 뿐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그런 성격이시니,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만 맞닥뜨려도 무너질 만한 일들을 수없이 넘어오신 거겠죠.”
이스마엘은 내 기량을 칭찬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질 뻔했다.
“저에 대한 조사가 대충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사할수록 의문이 생기는 이력이더군요. 하지만 그만큼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죠. 저희가 정리한 서류를 검토해 보시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이스마엘이 내 앞에 서류뭉치를 내놓았다. 나에 대한 기록이었다.
난 천천히 서류를 넘기며 글자를 읽어나갔다.
‘부족한 부분은 있어도 틀린 건 없다.’
하층 구역의 보육원 출신. 선별검사에서 근위대 생도로 차출. 우수한 성적과 기량으로 눈에 띔. 쿠스토리아 가문의 양자로 입적. 프란세크 황태자의 눈에 띄어 정치적 상징으로…….
‘대외적인 내용은 상세해. 조사를 열심히 했군.’
내가 서류를 다 읽고선 이스마엘에게 내밀었다.
이스마엘은 서류의 막바지를 가리켰다.
“모두가 당신이 재기불능이거나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왜 보더시티에 있는 것이죠?”
어려운 질문이로군. 신중하게 답변하자.
“자세한 건 쟈파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저도 이리저리 사건에 휘말린 입장이니까요. 차관님의 말대로, 저는 뇌사에 가까운 재기불능 상태였습니다. 제 기억도 아크바란의 폭풍기에서 끊어졌죠. 의식을 회복하니 이미 전 보더시티에 있었습니다.”
적당한 답변인 것 같다. 현재 쟈파는 중상이며 의식불명이다. 핵심적인 부분을 얼버무리며 시간을 벌기 좋았다.
“흠, 보더시티에서 꽤 오랫동안 활동하신 듯합니다. 아무런 목적이 없으시진 않으셨겠죠.”
“당장은 쟈파의 의뢰를 받아 활동했습니다. 쟈파의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사람을 찾고 있었죠. 전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입니다. 훌륭한 탐정이자 추적자라는 뜻이죠”
“결국은 쟈파 씨가 깨어나야 상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대해선 쟈파의 답변이 더 명확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차관님에게 중요한 건 제가 어떤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가 아닙니까? 폭풍기에서 제국의 혼란이 있었다는 건 그쪽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내막은 몹시 복잡하죠.”
난 이스마엘 차관의 눈빛이 변하는 걸 느꼈다.
‘감각을 집중하자.’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벽 뒤에 군중들의 미세한 동요가 느껴진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작은 단서들을 통해서.
“현 황제 이반 크라치아와…… 유폐된 황태자 프란세크는 상당히 복잡한 관계입니다. 애초에 이반 크라치아는 대외적인 후계자가 아니었죠.”
“그 내막을 루카 씨가 아신다는 이야기입니까?”
“구차하게 떠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행보를 보시면 관련자라는 걸 아셨겠죠. 그러니 절 제국으로부터 보호하셨을 거고요.”
이스마엘도 의자를 뒤로 당기더니 내 앞에 앉았다.
딱.
이스마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방 내부에 있던 기계의 잡음이 순간적으로 일었다.
“방금 모든 통신과 기록 장치를 껐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서로의 입을 제외하고선 그 어디에도 새어 나가지 않습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이스마엘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가 흡연자라는 걸 방금 알았다.
“전 비흡연자입니다.”
“의외로군요.”
이스마엘이 나를 훑어봤다. 난 저런 시선에 익숙하다.
“그런 말을 자주 듣죠.”
이스마엘은 비흡연자라는 말에도 담뱃불을 붙였다. 난 저 담배를 빼앗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도 지금은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서요. 상황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생각보다 제국에서 거센 압박을 넣고 있거든요.”
“그만치 제 가치가 높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군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리 보존에 급급한 윗대가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이스마엘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정말로 기록과 통신 장치를 끄긴 한 모양이다.
“위쪽에선 겁을 먹은 겁니까?”
불 보듯 뻔했다.
“정확합니다. 삼국의 균형은 미묘하지만, 군사력만 따지면 제국이 우위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제국의 체제는 타국보다 전쟁 수행에 적합하니까요. 강경한 제국의 태도 때문에 당신을 보내자는 의견도 꽤 많습니다. 특히 아랫도리도 서지 않는 노인네들이요.”
나는 웃음을 참으며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제국은 저 하나 때문에 국지전을 벌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 사태가 커지길 바라진 않겠죠. 저는 제국의 하층민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인물입니다. 제가 망명해 연방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제국의 통치에도 바람직하지 않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망명을 받아들이되, 프로파간다 용도로 쓰지 않겠다고 말하면 제국도 얌전히 있을 겁니다. 막대한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황제가 달려들진 않겠죠. 협상해 볼 여지는 제가 봐도 많습니다.”
이스마엘은 분별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생각하지만, 죽은 니콜라오스 쿠스토리아가 떠올랐다. 능력이 좋은 관료는 다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양이다.
“그 정도면 겁도 많고 멍청한 노인네들도 알아먹을 겁니다. 본래 그 사람들도 똑똑한 청년이었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하지만 확실한 보증을 하나 더 들고 가고 싶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요.”
이스마엘이 주머니에서 휴대용 재떨이와 탈취제를 꺼냈다. 그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구겨 넣고선, 탈취제를 입과 몸에 뿌렸다.
‘영리하군, 이스마엘.’
솔직히 감탄이 나왔다. 상급자를 탓하고 욕하면서 실리를 챙기고 있었다.
‘확실하게 망명하고 싶으면, 괜찮은 정보를 내놔라.’
이스마엘의 말은 이런 의미다. 망명하기도 전에 정보를 뜯어내겠다는 심보가 보였다.
‘이럴 때, 키누안이라면…….’
키누안은 좋은 스승이다. 그가 나와 적대하든 말든 그건 중요치 않다. 적이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당황하지 마. 언제나 여유롭게 행동해. 설사 절벽 끄트머리에 있더라도 회심책이 있는 것처럼 굴어.’
여기서 이스마엘의 화술에 넘어가 정보를 뱉어낸다면 앞으로도 질질 끌려다닐 뿐이다.
헤일라스를 떠올려라. 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담력 하나만으로 위험한 다리를 수없이 건넜다. 내 자존심상 호부견자가 될 순 없는 노릇이다.
“정황상 증거로도 충분치 않다면 어쩔 수 없죠. 제국에 끌려가는 게 제겐 나쁜 일이지만, 최악까진 아닙니다. 연방이 절 버리더라도 전 죽지 않습니다. 제국에서도 저는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스마엘이 움찔했다. 그는 내가 순순히 비밀 하나 정돈 털어놓을 거라 생각했을 터다.
‘미안하지만, 그 무엇 하나라도 그냥 줄 생각은 없어. 난 절박하다.’
이스마엘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연기가 너울거렸다.
“루카 씨,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전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지금까진 차관님이 제 가치를 가늠하고 시험하셨죠. 저도 차관님의 역량을 시험해야겠습니다. 고작 이 정도로 윗선을 설득하지 못하고 휘둘릴 거면……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 뻔합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루카 씨, 제가 실패하면 제국으로 송환입니다.”
“제국으로 송환되든, 연방에서 쪽쪽 빨아먹히든 제겐 거기서 거기입니다. 혹여나 연방이 제국보다 더 양심적이니 뭐니 그런 개소리는 하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내가 팔짱과 다리를 꼬며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저들도 알 것이다. 근위대 수준의 인물이면 죽음을 불사하고도 자존심을 지키는 이들이 많다.
라그나타의 분류법에 따르면 난 명예 추구형이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인물로 딱 들어맞지.
‘날 지옥으로 보낼 테면 보내봐라. 웃으면서 죽어주마.’
단적으로 말해서, 협상은 배짱이다. 얼마나 잃을 각오가 되어있냐가 중요하다.
“루카 씨는 역시 단순한 군인이 아니셨군요. 지금 당신의 모습은 정치적 모략을 수없이 헤쳐 나온 자의 태도입니다.”
이스마엘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는 이번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
“타결입니까?”
“네, 타결입니다. 사실은 벌써 당신의 망명 처리가 진행 중입니다. 노인네를 구워삶는 설득은 진작 끝났죠. 실컷 욕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멍청한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하여튼 제 역량은 믿으셔도 됩니다.”
난 이스마엘이 내민 손을 잡았다.
“차관님과 좋은 관계가 되면 좋겠군요.”
나도 내가 이런 의례적인 말을 할 수 있는지 간만에 알았다. 뭐, 생각해보면 제국에선 존중해야 할 상관과 마주치는 게 일상이었다.
“새로운 신분증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로 만들면 됩니까?”
이스마엘이 문 앞에 서며 말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그것도 나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난 쿠스토리아 가문을 좋아한다. 헤일라스를 위해서라도 쿠스토리아 가문의 생존과 이익을 챙기고 싶었다.
그러나 난 쿠스토리아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다. 쿠스토리아라는 이름만으로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그냥 루카라고 적어주시면 됩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