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물리 법칙에서 삶과 죽음은 거창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삶은 동이며, 죽음은 정이다.
그저 움직임과 멈춤일 뿐.
쟈파가 사랑했던 소년은 황무지에서 멈춰 섰고, 그 시신은 썩어 문드러졌다.
쟈파는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나아가야 했다.
이날, 쟈파 내면에서 온갖 격정이 치밀었을 터다.
“카토…….”
쟈파는 소년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그는 몸을 깊게 가리는 천을 칭칭 감은 채로 뙤약볕을 걸었다.
소년이 죽고 나서, 쟈파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졌다. 뇌리에 깊게 남은 사건들만이 시뮬레이션 기억으로 나타났다.
황무지는 어느덧 끝났고, 정착지와 마을이 일정 거리마다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쟈파가 타지룬인 걸 알곤 적대적으로 대했다. 타지룬 종족의 평판이 나쁘기 때문이었다.
“카토가 있을 땐…….”
쟈파가 혼잣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 소년이 곁에 있을 땐 이보단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고립된 타지룬은 나약했다. 추방령이 왜 끔찍한 형벌인지도 알 수 있었다. 타지룬 종족이 저지른 죄악과 부도덕을 감당하는 건 추방자들이었다.
쟈파는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괴악한 과일을 먹고 사흘 밤낮으로 뒹굴기도 했고, 노바스 행성의 야수에게 쫓겨 급류로 뛰어들기도 했다.
줄곧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다. 밤이면 가문의 추격을 두려워하며 선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보, 더시티…….”
마침내 목적지가 저 멀리서 보였다. 지금보단 규모가 작았지만, 여전히 마천루와 빛기둥이 요란스러운 도시였다.
쟈파는 보더시티를 향해 걸어갔다.
내 시야에 보이는 쟈파의 손은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걸음도 현저히 느렸다.
당연하게도, 보더시티는 낙원이 아니었다. 도망갈 곳이 여기밖에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는 도시.’
목적지에 도착한 쟈파는 탈진했다. 그는 골목길의 벽을 짚으며 몇 걸음 더 걷다가 주저앉았다.
‘쟈파는 여기서 한계와 맞닥뜨렸어. 최후의 의지마저 흩어졌겠지.’
기력으로 움직이는 것도 끝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탈력감이 들었을 거고, 육체를 지탱하던 마음의 끈도 풀렸을 터다.
지금까진 막연하게 목표가 있기에 기계적으로 버틴 것뿐이다.
‘목적지에 오고 나서야 허무함을 깨달은 거지, 의미가 없다는 걸.’
애초에 쟈파는 연인과 여기에 오고 싶었던 것뿐이다.
보더시티엔 그 어떤 희망도 없었다.
쟈파는 세상을 향한 저항조차 그만두고 정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륵.
쟈파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노숙자들이 쟈파의 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퉤엣! 뭐 이런 거지새끼가 다 있어?”
누런 가래침이 쟈파의 머리에 떨어졌다.
노숙자들은 쟈파에게서 훔칠 물건조차 없다는 걸 깨닫곤 사라졌다.
쟈파는 골목길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굶주림조차 느껴지지 않을 무렵이었다. 생존본능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쏴아아.
비가 오고 있었다. 쟈파의 체온이 내려가면서 숨결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추방당한 타지룬인가? 아직 성체는 아닌 것 같은데, 암컷, 아니, 아니, 여성이로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통역기의 기계음은 빗소리와도 같은 잡음이 났다.
쟈파는 흐릿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서 사내를 식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사내가 누군지는 뻔했다.
‘파올로 콴.’
파올로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는 우산을 뻗어서 쟈파의 머리를 가렸다.
부스럭.
파올로는 허리 가방에서 포장지로 싼 샌드위치를 꺼냈다.
“내 점심 식사다. 먹어도 돼. 이상한 건 들어가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파올로는 자신이 먼저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다.
“……어째서?”
“어린애가 굶주리고 있으니까. 난 나름대로 요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야. 못 본 척하며 지나치기 어렵더군.”
그 이후에도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쟈파는 머뭇거리다가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느릿하던 쟈파의 식사가 점차 빨라졌다. 두 번째 샌드위치는 통째로 삼키다시피 했다.
쟈파의 미각은 살아나고, 위장에선 소화액이 새어 나올 것이다. 멈춰가던 삶이 다시 가속하는 느낌이겠지.
“……맛있어.”
쟈파가 고개를 들었다. 파올로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지극히 평범하고도 평온한 사내였다.
“요리는 내 몇 안 되는 재능이지. 난 미각이 섬세하거든. 요리를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사례할게.”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해도 돼. 마침 식당에 일손이 필요하거든. 타지룬 종족도 미각이 예민하지? 간을 잘 보겠군. 음식은 간 보기가 5할이거든.”
“타지룬이 일하면 손님이 아무도 오지 않을걸.”
“어차피 넌 주방에서만 일하면 돼. 나르는 일은 내 딸이 할 테니까. 숙식도 제공할 테니 두어 달만 일하고 가.”
“당신, 친절하네. 이상할 정도로.”
쟈파가 세로 동공을 얇게 뜨며 의심했고, 파올로는 어깨를 으쓱했다.
“타지룬은 똑똑하잖아. 두어 달이면 보더시티 돌아가는 꼴도 파악할 거고, 푼돈만 있어도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겠지.”
내 직관은 묘한 이물감을 감지했다.
난 파올로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싶었지만, 이건 쟈파의 기억이다. 쟈파의 주관적인 왜곡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파올로는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남성이었다.
쟈파는 고뇌하듯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고작 음식을 먹었다고, 금세 생존을 갈구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 모양이었다.
“……잠시만 신세를 질게.”
“이제 내가 고용주니까, 공손히 말해야지.”
“……지겠습니다.”
“좋아, 이름은?”
“‘쟈파’.”
“좋은 이름이네.”
파올로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감동적인 장면일 터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 어떤 훈훈함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뒤틀린 인간이라지만 이 정도 감수성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
* * *
“다른 종족을 직원으로 쓴 적이 있어서 부엌이 불편하진 않을 거야. 개수대도 높이 조절이 가능하고. 아직 네겐 조절이 필요 없겠군.”
파올로가 식당의 시설을 안내했다.
그 이후로, 쟈파는 파올로의 식당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앙귀스 레지나?’
어린 시절의 앙귀스 레지나도 쟈파의 기억에 나왔다. 성형을 거친 지금과는 생김새가 크게 달랐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파올로가 음식 접시를 밖으로 내며 앙귀스 레지나를 불렀다.
“엘리제, 여기 음식 나왔다. 서둘러.”
이 시기의 앙귀스 레지나의 이름은 엘리제 콴이다.
10살 남짓한 앙귀스 레지나는 저녁이면 식당에서 음식을 날랐다.
“여, 여기, 음, 음식 나왔어요.”
앙귀스 레지나는 말을 더듬으며 소심하게 행동했다. 음침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로군.’
다정다감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였다.
“남은 재료가 있어서 창작했습니다, 엘리제.”
쟈파가 인간의 언어로 서툴게 말했다. 일이 끝날 즈음에 그는 간식거리를 만들어서 앙귀스 레지나에게 건네곤 했다.
“창, 창작이 아니라 만, 만들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해요.”
“아, 그렇군요. 남은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쟈파가 재차 말하며 단어를 교정했다.
그 사이에, 앙귀스 레지나는 간식을 훔치듯 낚아채더니 쟈파와 거리를 두었다.
“딸내미가 버릇이 없어서 미안해, 쟈파. 부인을 일찍 보내서 내가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거든.”
“좋습니다.”
“이럴 땐 ‘괜찮습니다.’라고 하는 게 좋아.”
“괜찮습니다.”
파올로는 부엌을 정리하며 쟈파를 아래부터 위까지 훑어보았다.
쟈파는 움찔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마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젠장.
“쟈파, 살이 많이 붙었네. 보기가 좋아.”
“덕분입니다.”
“성장기라서 금방 커지겠어. 그간 밀린 성장이 한 번에 올라오는 것 같군. 곧 성체인가…….”
파올로는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식당을 나갔다.
영업 종료 직전이기에, 식당에는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 단둘이 있었다.
으적, 으적.
앙귀스 레지나가 간식을 먹다가 쟈파에게 다가왔다.
“더 만들어줄까요?”
쟈파의 말에 앙귀스 레지나가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식, 식당. 직, 직원들, 전부, 두 달, 길어야, 세 달이면, 사라져.”
“자, 자, 그 뭐더라, 아, 자립한 거겠죠.”
“아니야. 쟈, 쟈파는 착하니까. 가, 가르쳐주는 거야. 아, 아빠한테는 비밀.”
앙귀스 레지나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거리를 두었다.
쟈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온 그조차 아직 세상 밑바닥의 악취를 모르고 있었다.
인간, 아니, 지성체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역겨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염병…….’
나는 여기서 알아챘다.
쟈파가 불필요하게 보이는 과거사까지 길게 풀어내며 보여주는 까닭도 알 것 같았다.
첫 만남부터 파올로 콴은 이상했다.
‘나조차도 타지룬 종족의 성별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몹시 어려운 일이야.’
파올로는 쟈파가 여성이며 성체가 아니라는 것도 바로 알아챘다. 성적 취향이 타지룬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역한 상상이 치민다. 차라리 이종족 성애라면 나도 제법 익숙하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가끔, 파올로는 쟈파를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그 눈은…… 고깃덩이를 보는 요리사의 시선이었다.
파올로는 쟈파의 급격한 성장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부분 종족은 어린 암컷일수록…… 진미인 법이니까.
‘앙귀스 레지나는 감이 묘하게 좋은 여자야.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직원들이 험한 꼴을 당했으리라고 짐작한 거겠지.’
쟈파의 친절한 태도를 본 앙귀스 레지나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쟈파는 그 언질을 빠르게 해석하지 못했다.
파올로의 실행은 빨랐다. 두 달을 채우기도 전에 그는 움직였다.
쟈파는 여느 때처럼 식당 구석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던 날이었다.
스륵.
낮은 기척이 쟈파의 의식을 흔들었다. 타지룬의 감각은 예민하다. 그걸 안다는 듯이 소리가 무척이나 낮았다.
덥썩!
파올로가 쟈파를 덮쳤다.
쟈파도 처음에는 어떤 성적 의미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쟈파도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철컥, 철컹.
어느새 쟈파는 수갑과 족갑 때문에 옴짝달싹 못 했다.
“몇 번이나 해본 솜씨네요. 당황스러울 땐 어, 어떻게 웃지요?”
쟈파는 반쯤 헐벗은 상태로 말했다. 내가 지금 쟈파의 시선인 게 다행이다. 타지룬의 나신은 그다지 보고 싶지가 않다.
“생각보다 당황하진 않는군.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은 덕분이겠지.”
파올로가 단말기를 작동하더니 일정을 확인했다. 타지룬, 암컷, 고기, 출하, 이런 단어들이 드문드문 스쳐 갔다.
“파올로, 지금 설마, 호, 호요오욧…….”
쟈파도 그제야 파올로의 목적을 알아채더니 동요했다. 그가 빠르게 혀를 날름거렸다.
“유감이야, 쟈파. 하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을 내가 연장해준 셈이니 너무 원망은 마라. 나도 도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사정은 설명해 주지. 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연구가 있어. 그러나 연구에는 늘 돈이 필요하지.”
“같은 사람을…… 도축하시는 겁니까?”
“아직 같은 인간을 도축한 적은 없어. 우린 엄연히 다른 종족이니 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파올로가 고요한 미소를 유지했다.
“타지룬 고기가 맛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쟈파는 시간을 벌기 위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세상엔 희귀하고도 색다른 진미를 탐하는 사람이 많아. 타지룬 고기를 먹어보고 싶어 하는 타락한 부자들은 얼마든지 돈을 낼 거야. 그게 맛있든 맛없든 간에. 어린 암컷이라면 돈이 더 되겠지.”
쟈파는 질문을 더 던졌으나, 파올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올로가 능숙하게 촬영을 시작하더니 도축용 칼을 차례대로 꺼내서 늘어놓았다.
쟈파는 미래에 멀쩡히 살아있다. 절체절명의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나갔다는 것이지.
“돈, 돈이 필요하시다면…… 저, 저를 살려두는 게 이, 이득일 겁니다.”
쟈파가 힘겹게 말했다.
파올로가 돈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그가 웃으면서 칼과 연마봉을 들었다.
“칼갈이가 끝나기 전에 날 설득해 봐.”
파올로가 연마봉 좌우로 칼날을 번갈아 긁으며 말했다.
캉, 캉.
소리가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