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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고의 초점을 파올로 콴에게 맞춰보자.
파올로 콴은 쟈파의 전 남편이다. 사실혼 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파올로 콴의 딸이 앙귀스 레지나이다.
‘키누안에게 심리 장악을 당한 앙귀스 레지나는 자신의 손으로 부친인 파올로 콴을 죽였다.’
그게 앙귀스 레지나의 강렬한 트라우마이자 뒤틀림의 근원이다.
‘하지만 쟈파는 앙귀스 레지나를 친딸처럼 보살피며 보호하고 있어. 존속 살인이라는 과거를 삭제하고 보더시티의 아이돌로 만들었지.’
앙귀스 레지나는 쟈파라는 타지룬 계모를 싫어한다. 당연한 일이다. 생모를 그리워할 사춘기에, 인간도 아닌 타지룬이 아버지와 동거했으니 말이다.
‘심리 장악에 능한 키누안에게 앙귀스 레지나는 좋은 먹잇감이었겠지.’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키누안은 왜 파올로 콴을 죽였는가?’
키누안은 파올로 콴의 유산을 뒤늦게 노리고 있고, 파올로 콴의 유산과 지젤의 행방을 맞바꾸자는 제안까지 했다.
‘키누안 정도의 인물이 파올로 콴의 유산을 챙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유가 뭐지?’
키누안은 제국의 혼란조차 이용한 인물이다. 파올로 콴이나 쟈파의 심계에 밀려 원하는 걸 쟁취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니면…… 쟈파가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타지룬이라는 소리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 쟈파가 키누안과 대립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나다? 그랬다면 메노아 가문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터다. 혼자서 복수하고도 남았지.
‘파올로 콴의 유산이 뒤늦게야 필요했던 거야. 쟈파는 그걸 꼭꼭 숨겨뒀고.’
이게 합리적 추론이었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쟈파가 아무리 잘 숨겨도…… 내가 아는 키누안이라면 어떻게든 찾아냈을 거야. 키누안은 쟈파에 대해 잘 알고 있어.’
키누안은 아키에스 빅티마의 달인이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무에서 유를 추론하진 못하지만, 쟈파는 키누안의 손아귀에 있던 인물이었다. 쟈파의 심리를 통찰해 유산을 빼돌리는 건 일도 아닐 터다.
‘키누안은 쟈파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래, 생각을 일단 끊자. 나머지 사고는 파올로 콴의 유산이 뭔지 보고 나서 이어가면 된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사고의 초점을 흐리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
딸깍.
사옥 복도를 걷던 나는 벤치에 앉아서 차가 담긴 보온병을 꺼냈다.
‘차 마시기.’
키누안을 따라한 사고 중지 루틴이다. 차의 성분이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키누안이나 내겐 차가 지닌 휴식의 상징성을 뇌가 인지하는 게 중요했다.
“간만이네요, 루카.”
모퉁이를 지난 앙귀스 레지나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난 눈을 옅게 뜨며 앙귀스 레지나의 동작을 보았다. 그녀의 옷은 화려하면서도 펑퍼짐했고, 발걸음은 평소보다 묵직했다.
“아, 우리의 아이돌께서 오셨군. 덕분에 네 계모를 열받게 만들 수 있었어.”
나는 보온병에 입을 대며 적당한 온도의 차를 홀짝였다.
“빈정거리지 마세요. 그리고 전 쟈파를 화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었죠.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고요. 모순적이지만…… 쟈파도 남에게 알리기 싫은 사실을 끝까지 파헤칠 사람을 여태 찾은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모순이다.
쟈파는 내가 자기 과거의 비밀을 파헤치는 걸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 기다린 거다.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꾸역꾸역하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만이 키누안을 찾을 수 있지.’
쟈파가 기다린 건 얌전한 사냥개가 아니다. 수틀리면 밥을 주는 사람의 목덜미조차 물어뜯는 들개다.
쟈파는 자신을 위협하는 들개를 싫어하지만, 목적을 위해선 그 정도로 사나운 들개가 필요하다. 감정과 목적의 괴리인 셈이었다.
“뭐, 좋아. 날 찾아온 이유는?”
“저도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어요. 파올로 콴이라는 인간에 대해서요. 당신이라면 쟈파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겠죠. 이미 뜯어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날이 오늘인가요?”
앙귀스 레지나는 감각이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직감도 우수하다는 뜻이다.
앙귀스 레지나는 자신의 사고 구조를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굉장히 똑똑한 여자였다. 그녀가 멍청했다면 빛나는 아이돌의 삶과 구질구질할 정도로 망가진 인간의 면모가 공존하지 못했을 터다.
“네 아버지잖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항상 몽롱하고 흐릿해요. 사건의 충격 때문일 수도 있죠. 쟈파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지 않고요. 아버지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쟈파예요.”
앙귀스 레지나가 내게 정보를 흘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도 파올로 콴의 유산을 보고 싶어 했다.
‘파올로 콴은 생각보다 복잡한 인간이겠군.’
키누안이 파올로 콴의 유산을 노리고 있다.
쟈파는 파올로 콴의 유산을 꼭꼭 숨겼고, 앙귀스 레지나는 아버지인 파올로 콴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파올로 콴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한 요리사이자, 가난한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내가 파올로 콴에 대한 정보를 가졌다고 치자, 쟈파는 네게 파올로 콴에 대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굳이 쟈파의 반감을 사면서 네게 정보를 알려줄 까닭이 없지.”
“자식이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죠. 숨기는 건 정당하지 못해요.”
“타당성이 없으니 정당성을 논하는군. 스스로 생각해도 어설픈 투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옷자락 사이론 무기를 챙기고선 말이야. 그런 무기는 의미가 없어. 누굴 협박하고 싶은 거지? 나? 아니면 쟈파?”
난 앙귀스 레지나가 무장 상태라는 걸 알고 있다. 펑퍼짐한 소매 안쪽에는 휴대하기 좋은 권총이 있었고, 방탄 소재의 내복이 힐끗힐끗 보였다.
“……저도 몰라요. 그저 뭔가 준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앙귀스 레지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감이 뛰어난 사람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쟈파 상사의 미묘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준비란 어느 날 갑자기 무장하는 게 아니야. 언젠가 다가올 재앙에 대비해 매일매일 쌓아 올리는 게 준비지. 그게 폭력이든 재력이든 뭐든 간에 말이야. 앙귀스 레지나, 네 특기는 전투가 아니야. 대중을 선동하는 게 네 진짜 무기지.”
선동은 개인의 어설픈 폭력보다 더 무서운 무기다.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있는 척할 뿐이지, 실상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거짓 정보를 더 좋아한다. 불편한 진실은 거북한 법이니까.
“조언인가요?”
“사실을 말한 거다. 네 아버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대가로 내놔. 다른 사람에겐 네 명성과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와 언행이 ‘대가’로 충분했겠지. 하지만 난 다르다는 걸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거다.”
앙귀스 레지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그녀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내 앞에 섰다.
“그야…… 당신은 남자를 좋아하니까요. 풍만한 가슴은 있으나 막대기가 없는 게 지금만큼 원통한 적이 없네요.”
예전에 내가 던진 농이 이렇게 돌아오는군.
“뭐, 맘대로 생각해.”
앙귀스 레지나의 눈동자는 별빛을 담은 듯이 반짝였다.
“억울하다면, 남자라는 걸 잠자리에서 제대로 증명해 보시던가요. 혹시 잠자리에서 여자 역할을 좋아……”
흠, 이건 제법 자극적이군. 가라앉았던 공격성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내뱉었으면 방금 안면이 뭉개졌을 거다. 반반한 얼굴이 네 유일한 장점이니 밥벌이 수단을 남겨두는 거야.”
“후후…….”
앙귀스 레지나는 웃었다. 그녀가 나와 멀어지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저도 이제 알 것 같아요. 아무리 이성이 단단하다지만 보더시티의 환락과 제 유혹에도 당신은 넘어가지 않았죠. 그건 키누안과 다른 이유였네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해.”
“당신의 강단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죠. 당신의 마음에 박혀있는 여자가 누군지 몰라도 참 부럽네요.”
여자의 감은 이런 면에서는 참 예리한 법이지.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정곡에 찔려 당황한 것처럼 보일 터다.
“나름 순애보거든.”
젠장, 이런 멍청한 대답이 최선이었나, 루카. 아키에스 빅티마가 아깝군.
“그럴 것 같았어요. 여자 경험도 얼마 없죠? 아마 그 여자가 당신의 전부겠죠. 귀엽네요. 퇴폐적인 척하며 나쁜 건 전부 할 것처럼 굴면서 순애보라니요.”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이쪽 방면은 내가 약하다.
“얼굴은 뭉개기 힘들지만 그 다리를 한 번 더 못 쓰게 분질러 버릴 순 있어.”
“아아, 무서워라.”
앙귀스 레지나가 무서운 척하며 뒤로 총총 물러났다.
앙귀스 레지나가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로 마지막 말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여자도 당신과 똑같은 마음일 거란 보장은 없죠. 타인은 기대를 언제나 쉽게 배신하는 법이니까요. 만약 그 여자가 당신의 마음을 배신한다면 절 찾아오세요. 전 상처 입어 약해진 남자를 보듬는 걸 좋아하거든요.”
난 헛웃음을 흘렸다.
“꿈도 야무지군. 내가 아는 앙귀스 레지나는 불안정하다 못해 무너지기 직전인 여자야. 그런 네게 의존할 정도로 내가 약해진다?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지.”
“그런 말을 진심으로 내뱉는 당신이기에 약해진 모습이 보고 싶은 거예요.”
이건 좀 간담이 서늘하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앙귀스 레지나는 피학적이면서도 가학적이었다.
그러니까…… 앙귀스 레지나는 변태라는 소리다. 뭐, 이것도 새삼스러운 말이로군.
* * *
나는 앙귀스 레지나와 대면이 끝나자마자 쟈파의 집무실로 향했다.
앙귀스 레지나의 감은 정확했다. 그녀도 꽤 비범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파올로 콴의 유산을 확인하는 날이다.
앙귀스 레지나가 유산을 꺼내는 날짜와 시간까지 알 리가 없다. 어렴풋한 흐름과 분위기로 알아챈 것이다.
기이잉.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쟈파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가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다.
그리고…… 복도의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에퀘시안 용병들.’
무장한 에퀘시안이 살벌한 전투 헬멧을 쓴 채로 좌우로 사열하듯 서 있었다. 그 숫자는 복도에만 스무 명이었다.
끼릭, 끼릭.
에퀘시안의 전투 헬멧에 박힌 광학 렌즈가 수시로 날 훑어보고 있었다.
‘적의로 가득 찬 관찰.’
거참, 더럽게 재밌군.
난 흥분되는 걸 느꼈다. 이 에퀘시안들이 동시에 날 덮친다고 생각해 보자.
중대한 위기로군! 과연 난 어떻게 이걸 헤쳐나갈 수 있지? 방법은 있나?
전투 사고가 저절로 작동한다. 흥분이 멈추지 않았고, 내 안의 샘에서 전투 호르몬이 빠듯하게 흘러나왔다.
세상의 색감이 또렷해진다. 난 목구멍 뒤로 묘한 맛을 느꼈다. 고양감으로 인해 후각과 미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끼이익.
난 쟈파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호요오오! 오셨군요, 루카 씨.”
쟈파가 창문을 등진 채로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엔을 비롯해 에퀘시안의 상급 용병 다섯 명이 서 있었다.
‘에퀘시안들은 평소보다도 더 중무장이야, 전쟁이라도 치를 듯이 구는군.’
걸어 나간 나는 소파에 등을 파묻으며 앉았다. 내 머리 한쪽에선 ‘최악의 상황’을 끊임없이 가정하고 있었다.
흠, 벌써 코피가 터질 것 같군.
코피가 터지는 건 이제 일상이다. 나는 미리 손으로 코를 살짝 가리며 훔쳤다.
주륵.
역시 피가 터졌다. 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세차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이젠 제법 친해졌으니 의례적인 긴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 준비한 거나 꺼내 봐, 쟈파.”
“호욧, 호욧.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파올로의 유산은 키누안의 추적과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전 지금이라도 당신이 돌아가길 바랍니다. 당신이 이것들을 본 순간부터…… 저와 공동운명체가 돼야 하니까요. 참고로 거절은 불가능합니다.”
명확한 협박이었다.
난 깐족거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지금은 미치광이 호르몬이 내 정신과 몸을 바짝 지배하고 있었다.
“타지룬 암컷의 청혼이라면 거절하고 싶군.”
쟈파가 혀를 날름거리더니 평소보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호욧, 루카 씨의 상상력은 빈약하군요. 제가 방금 말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는 그것도 포함입니다만…….”
난 움찔했다. 쟈파는 말을 이어갔다.
“……농담입니다. 연장자를 놀리면 못 쓴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흠, 다음부턴 이쪽 주제로는 깐족거리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