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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29

229
눈을 감으면 라피스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라피스.’

나는 눈을 뜨며 현실을 눈에 담았다. 손수공업의 숙소가 보였다.

사실, 당장이라도 라피스의 공중차량이 추락한 장소로 달려가고 싶었다.

난 그 충동을 참으며 손수공업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추락 현장으로 달려간다고 바뀌는 건 없다. 범인이 누구든 손수공업에 그 흔적이 있을 거야.’

나는 손수공업의 숙소로 들어가 텅 빈 방을 가만히 보았다.

여긴 두 번째 용의자의 방이었다.

‘라피스와 크게 대립하던 직원의 방. 내가 본 것 말고도 라피스와 계속 다퉜다고 했어.’

직원의 방에는 짐을 챙겨 떠난 흔적이 있었다. 서랍이 군데군데 열려 있었고, 옷가지도 험악하게 널브러졌다.

나는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힌 채로 방 안을 조사했다.

기잉, 기이잉.

응급치료를 마친 손석재가 내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부러진 다리를 지탱하려고 외골격 형식의 보행보조 장치를 한쪽에 달고 있었다.

“……짜릿할 정도로 살벌한 폭행과 협박이었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15살 이후로 오줌을 지린 적은 처음이기도 합니다.”

손석재는 내 곁에 서며 말했다. 그라켄 부트에 찔린 옆구리에는 붕대를 동여매고 있었다.

진통제를 맞았겠지만 저런 부상으로 움직이는 근성이 꽤 대단하긴 했다. 손석재는 군인이 아니다. 통증에 민감할 터다.

“사과할 생각은 없다. 누가 범인이든 간에 손수공업 부지 내에서 일어난 일이야. 널 추궁하는 건 합리적 의심이었지.”

라피스 라줄리가 탄 공중차량이 폭발했다. 폭탄이 설치됐다면 손수공업에 있을 때일 것이다.

“제가 의심받을 만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제가 범인이 아니라면…….”

“네 직원 중 하나가 사라졌어. 유력한 용의자지. 놈이 범인이라면 책임소재는 여전히 너와 손수공업에 있는 셈이다.”

“제 부하들은 제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 하긴 하죠.”

손석재도 확신이 없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내게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도 내 옆에 서 있었다.

‘이 정도 인물을 상대로 협박과 추궁이 늦어지면 진의를 알아내기 힘들다. 때를 놓쳤다면, 난 손석재를 계속 의심했을 거다.’

여유를 가진 손석재가 작정하고 기만한다면 그 속내를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난 사고가 터지자마자 일말의 여유도 두지 않고 즉각 손석재를 폭력을 동반해 협박했다. 덕분에 나도 손석재가 범인이 아니라 바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봐, 오 대리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이 있나? 본 사람은?”

손석재가 직원 3명과 비서를 향해 말했다. 그들이 손석재의 측근인 듯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들은 손석재의 지시에 따라 여기저기 연락을 취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 대리라는 놈의 신상정보를 넘겨. 내가 찾아보도록 하지.”

“제가 아는 오 대리는 이런 짓을 저지를 자는 아닙니다. 입은 거칠어도 의외로 여린 부분이…….”

난 손석재의 말을 잘랐다.

“사람은 타인의 믿음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 네가 그렇게 믿는다고 그자가 정말로 그런 사람일 거란 보장은 없지.”

그러나, 솔직히 나도 오 대리가 범인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배후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범이 오 대리를 납치해 이미 죽였을지도 모르지.’

라피스가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다면 그건 무쉬르 알 카슈라의 데이터 때문일 터다.

“우리 쪽도 오 대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손석재는 내게 호되게 당하고도 악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만치 내가 자신에게 유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손석재는 이미 나를 통해 무쉬르 알 카슈라의 잔해를 얻어냈다.

‘그런데도 호의와 친절을 유지하고 있어. 내게 얻어낼 게 더 있다는 거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삑.

내 단말기가 울렸다. 쟈파의 연락이었다.

……아마도, 곧 라피스의 생사를 알 수 있겠지.

* * *

삐, 삐, 삐.

생명의 신호음이 간헐적으로 병실에 퍼졌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병상의 라피스를 응시했다.

라피스는 푸른 피부가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붕대에 감겨 있었고, 다리와 팔도 하나씩 절단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에퀘시안들 덕분이죠. 필사적으로 보호한 모양입니다.”

쟈파가 내 곁에서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는 온데간데없었다. 딱딱한 분노가 쟈파의 말에 스며들어 있었다.

“필사적으로 보호한 것치고는 에퀘시안들은 멀쩡하군.”

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라피스와 같이 탑승한 에퀘시안 두 명은 ‘멀쩡히’ 서 있었다.

물론, 내가 말하는 ‘멀쩡하다’의 뜻은 걸어 다닐 수 있는 수준이라는 소리다.

에퀘시안들도 부상을 크게 입었다. 특히 시뻘건 화상이 피부를 길게 훑고 지나가 있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중상이긴 했다.

에퀘시안은 통증 내성이 강하고 생명력이 끈질긴 덕분에 중상에도 활동할 수 있었다.

“방금 말씀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루카 씨, 저들이 멀쩡해 보이십니까? 폭발이 하필이면 라피스가 탄 자리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육체 내구성이 약한 타르파가 폭발에 정면으로 휘말렸으니 성하기 힘들죠.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라피스가 앉은 자리가 폭발과 가까웠단 말이지?”

내가 병실만 응시하며 고요히 말했다. 라피스는 중태에 빠진 채로 연명하고 있었다. 호흡기를 떼면 죽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둘러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별건 없어. 난 모두를 의심하고 있다. 그건 쟈파, 너도 마찬가지야. 라피스가 사고를 당하면 너도 얻는 이득이 있지.”

“이득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군요.”

쟈파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난 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손수공업에서 출발하자마자 공중차량이 폭발했다. 당연히 난 그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손수공업과 손석재를 의심하며 용의자로 여겼지. 내 성격상 과격한 행동을 했을 거란 건 너도 잘 알 거야. 내가 손수공업을 범인이라 확정한다면 네 입장에서 최고일 거고, 그 정돈 아니라도 나와 손수공업과의 사이가 벌어지겠지.”

라피스가 당한 사고는 나와 손수공업 사이에 쐐기 하나를 박아 넣을 수 있다. 쟈파의 짓이라면 그게 동기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제가 라피스 라줄리를 중태에 빠뜨릴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말로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데이터를 노린 거라면 이보다 확실한 수를 썼을 거야. 어쨌든 라피스는 생존했고, 데이터는 쟈파 상사의 손에 들어가긴 하겠지. 아, 데이터를 노린 거면 추가적 습격이 있을 수도 있어. 경비를 단단히 강화하고, 엔을 배치하는 게 좋겠군.”

“경비는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당신이 손수공업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놈들은 질이 나쁘다고 제가 분명히 경고했죠. 이번 사고가 손 사장의 짓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적어도 내가 보기엔 손석재의 짓이 아니야.”

난 단호하게 대답했다.

“호욧, 호욧, 우습군요, 루카 씨. 손석재의 짓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 절 의심하는 겁니까?”

쟈파가 내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중요한 정보를 숨기며 신뢰를 먼저 어긴 건 너다, 쟈파. 그래서 파올로 콴의 유산은 언제 볼 수 있는 거지? 미리 말하자면, 키누안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아. 네가 제대로 협조했다면 일이 훨씬 수월했겠지.”

“여기서 절 의심한 채로 파올로 콴의 이야기로 옮기는 겁니까? 제 머리의 뇌를 꺼내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군요. 이번 사고의 용의자로 저를 집어넣다니 말이죠.”

쟈파는 몹시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연기일 수도 있지.

‘손석재는 머리 굴릴 틈도 없이 내가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쟈파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닫을 시간이 충분했어. 라피스 건에선 손석재보다 쟈파를 더 신뢰하기 힘들다.’

소거법으로 인한 합리적 판단이다.

난 직관으로 손석재의 무고를 확신했다. 손석재가 무고하지 않다면? 그럼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머저리니까, 쟈파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사죄할 생각이 있다.

“넌 중요한 정보를 번번이 숨기며 날 시험했어. 그리고 원수라지만, 자기 가문의 뒤통수를 쳐서 통째로 집어삼켰지. 객관적으로 보면, 넌 믿음직한 후원자가 아니야. 언제든 내 목을 칠 수 있는 자지. 실제로도 넌 내 전임자들을 죽였고.”

나도 감정적으로는 쟈파에게 끌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이게 쌓아온 유대로 인한 끌림인지, 아니면 사업가 쟈파의 카리스마에 끌리는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쟈파의 독특한 카리스마에 내가 끌리는 거라면, 난 쟈파에게 이용당하다가 죽을 거야.’

쟈파도 세로 동공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평소처럼 손톱을 부딪치며 혀를 날름거렸다.

“루카 씨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라피스 때문에 저도 감정적으로 변한 모양입니다. 지금부터 이성적으로 굽시다, 서로 말이죠.”

난 비꼬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여기서 쟈파를 더 자극할 이유가 없다.

“……정리하자고, 쟈파. 데이터를 노린 공격이라면 추가 습격이 올 수도 있어. 아까 말했다시피 경비를 강화해라.”

“엔을 배치할 겁니다.”

“내 원래 임무와 무관하지만…… 난 공중차량에 폭탄을 설치한 사람을 찾아낼 거다. 파올로 콴의 유산은 그 이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준비는 해둬.”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이번 건을 이대로 묵혀둔 채로 다음 일로 넘어간다면, 우리 사이는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삐걱거릴 겁니다.”

나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매번 듣고 있다. 삐걱거리는 건 괜찮다. 적당한 유격은 오히려 어긋난 균형과 균열을 바로잡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가 아예 비틀리는 건 나도 곤란하긴 하다.

“널 의심한 건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싫어서다. 네가 범인일 확률이 낮은 건 나도 알고 있어. 다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손석재가 무고했기에 널 추궁한 거다.”

내가 한 발자국 물러나듯 말했다. 쟈파도 내 화해 요청을 받아들이듯 훨씬 부드러워진 태도를 내보였다.

“저도 오늘 당신이 보여준 거친 품행을 무작정 나쁘게 보진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라피스를 위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시는 걸 보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요. 당신은…… 키누안과 닮았으나 다른 사람입니다.”

난 키누안과 다르다.

그렇긴 하다. 그래, 명백히 다르다.

키누안이라면 이렇게 분노하며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며 더 큰 혼돈을 위해 움직이겠지. 그는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더 헷갈리게 만들 거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키누안에게 더 의존할 것이다.

“라피스는 유능한 의체 정비사야. 보더시티에서 라피스만 한 정비사를 찾기 힘들지. 내 의체를 제작한 당사자이기도 하고. 라피스의 안녕은 전투시의 내 생사와도 연관된 문제다. 범인을 찾는 건 당연해.”

내가 차갑게 대답했다.

내 못된 습관이다. 동정심과 연민 같은 감정은 약점이라는 강박관념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난 남들이 나를 친절한 사람으로 보길 바라지 않는다. 거칠고 포악한…… 부류의 사람으로 여기길 바란다.

난 때때로 친절보단 미움을 받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게 내 정신이 불건강하다는 증거겠지.

나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루카 씨.”

쟈파가 혀를 날름거리다가 나를 불렀다. 나는 뒤돌아서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이 파올로 콴의 유산과 접촉하면…… 제 모든 걸 알게 됩니다. 저는 당신을 줄곧 시험한 것에 대해 사죄하며, 앞으로 이견 없는 지지와 신뢰를 보내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도 제게 비밀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러 가지로요.”

흠, 비밀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게 있다. 얼마 전에 키누안과 접촉했다던가, 일레이와 주기적으로 연락한다던가 하는 일들 말이다.

“……노력해 보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전 당신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으로서 꽤 좋아합니다.”

난 순간 섬뜩했다.

“그…….”

“……호요오옷, 오해 마시죠. 그런 의미는 아니니 안심해도 됩니다. 루카 씨가 절 여성으로 여기지 않는 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난 덜컹거리는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느끼며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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