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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는 일레이가 서 있었다. 날 발견한 그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튕겨 버렸다.
“왔구나, 루카. 오늘까지 네가 오지 않으면 보더시티를 벗어나려 했어. 체류 기한이 아슬아슬했거든.”
일레이가 풍성한 머플러를 코까지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는 전투복이 아니라 연갈색 여행복이었는데 실용적인 주머니가 군데군데 달려 있었다.
“그 복장은 뭐야? 어디 탐험이라도 떠나려고?”
“내 통행증엔 고고학자라고 쓰여 있거든. 적당히 복장을 맞춰야 설득력이 있지.”
“내 경험상 이 동네에 통행증이라는 게 필요하진 않은 것 같더라고.”
“보더시티 말고도 돌아다녀야 하니까.”
일레이는 아케인 문명에 대한 지식이 많으니 고고학자로 위장이 쉽긴 할 터다.
“뭐, 좋아. 바깥에서 이야기할 건 아니잖아. 장소는?”
이 골목길은 인적이 드문 접선 장소이지만 떠들만한 곳은 아니었다.
“따라와.”
일레이가 어둠을 휘감듯이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개발 탓에 건물이 엉망진창으로 치솟아서 조각난 빛만이 간간이 바닥에 닿고 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날 만나러 왔어.”
내가 따라가며 말했다. 일레이는 앞만 본 채로 대답했다.
“그 건은 미안하게 됐어. 놈이 먼저 널 찾아 움직일 줄은 몰랐어.”
“탓하는 건 아니다. 여러모로 불가항력이지.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거든.”
이건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예상치 못한 장소와 시간에 등장했다.
“루카, 혹시나 해서 묻는데 사이버네틱이나 전자식 감각 기관을 달고 있는 건 없지?”
“없어.”
일레이는 품에서 조그마한 기계장치를 꺼냈다. 기계장치에서 짧은 작동음이 났고, 공기가 살짝 들뜨는가 싶더니 묘한 멀미가 났다.
‘휴대용 전파방해장치.’
휴대용치고는 출력이 상당했다. 생체 감각으로도 자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일레이는 전파방해장치를 켜둔 채로 걸었다. 머지않아 간판이 없는 가게 하나가 나왔다.
위이잉.
가게 입구에는 카메라와 자동총탑이 달려 있었는데 전파방해장치 때문에 우릴 감지하지 못했다.
“내가 처리할 테니까. 입만 다물고 있으면 돼.”
“무슨 일인지 몰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 임무야. 대화 장소도 만들 겸해서 처리하는 거지.”
일레이가 심부름이라도 처리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장갑을 벗으며 전자식 잠금장치가 달린 문고리를 잡았다.
치익.
일레이의 손에서 전류가 흐르면서 해킹이 끝났다.
철컹, 캉.
전자식 잠금장치는 허무하게 열렸다. 이래서 기계식을 써야 하는 거다.
‘하기야 원래 이런 동네에선 저 정도 보안이면 충분하지. 전자식이 더 편하기도 하고.’
장갑을 다시 낀 일레이가 문을 열었다.
벽에는 총기와 기계장치가 전시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묵직한 도검이나 의수와 의족이 걸려 있었다.
‘총포상? 아니, 잡다한 물건이 많아. 의체도 있군.’
내부를 훑어본 내가 가게의 정체를 파악했다.
‘장물을 취급하는 전당포.’
뭐, 보더시티의 전당포에서 장물 취급 안 하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들 터다.
“……불청객인 줄 알았는데 저승사자가 왔군.”
가게 내부에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기잉, 기잉.
나는 가게 주인을 응시했다. 아크바란의 하층 구역에서나 볼 법한 얼치기 전신의체를 가진 사이보그 사내였다.
사내의 팔다리 제품은 규격이 서로 달랐다. 그 때문에 걸음걸이가 어색했고, 부품도 노쇠한 탓에 소음이 컸다.
사내의 얼굴 반쪽은 인공 피부를 비롯해 복잡한 안면 근육을 흉내 낸 감정표현기도 없었다. 로봇처럼 무심한 쇠만 드러났고, 그마저도 눈물 자국처럼 녹슬어 있었다.
끼이익.
사내가 가판대에 서며 우리를 보았다. 그는 얼굴 반쪽에만 남은 감정표현기와 인공 피부로 비릿한 미소를 내보였다.
“하하, 일레이. 넌 요즘 카르티카의 여우라고 불린다지? 그리고…….”
사내의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
끼릭.
사내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가판대를 벌떡 넘었다.
휙!
누더기 의체치고는 동작이 깔끔했다. 생긴 것과 달리 의체 사용이 능한 자였다.
“맙소사, 살아있었던 거냐? 전신의체가 아니라 생체로군. 그래, 잊을 수가 없지.”
사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안광이 반짝이며 내 전신을 훑고 있었다.
난 침묵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선배님, 이쪽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입니다.”
일레이가 날 소개했다.
‘선배님.’
난 그 말을 곱씹었다. 즉, 눈앞의 누더기 의체 사용자가 전 근위대원이라는 소리다.
난 저 근위대원을 모른다. 나라고 모든 근위대원을 외우고 있던 건 아니니까. 그러나 근위대는 모두 나를 알고 있다.
“이상하다 했어. 재기불능이라도 그런 유명인이 공석에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고, 죽었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사내가 중얼거렸다.
“일레이, 지금 상황은?”
나는 다소 짜증스레 말했다.
“폭풍기 이후, 근위대원 상당수가 탈영했어. 난 그 사람들을 찾고 있었고.”
일레이가 설명했다. 사내의 반쪽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하, 하하하, 그런 거였군. 과연! 일레이, 네가 루카우스와 절친한 사이라는 말은 들었어. 흠, 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건가. 그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사내는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
‘이건 제국의 음모와 관련된 일이다.’
그리고 일레이는 나를 여기에 굳이 끼워 넣었다. 내 이름이 필요한 거겠지.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주시면 됩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가 살아있으며 재기에도 성공했다고 말입니다.”
일레이가 계속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하다.
“안타깝지만, 우린 만일을 대비해 연락을 서로 전부 끊었네.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레이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처형 권총을 꺼냈다.
난 눈을 찌푸렸다. 대응하기엔 늦었다.
일레이가 사내의 후두부에 총구를 대고선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총구에서 뾰족한 말뚝이 솟구치더니 사내의 후두부부터 이마까지 관통했다. 말뚝이 멈추니 뿔이라도 난 것 같았다.
철컹!
곧 말뚝이 빠지면서 사내의 조각난 뇌가 덕지덕지 흘러내렸다.
스륵.
허리를 숙인 일레이는 뇌 파편을 챙기더니 유리 용기에 넣었다. 임무 보고를 위한 증거품일 터다.
“불쾌하다, 일레이.”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 앞에서 전 근위대원이 죽었다.
“불쾌하라고 저지른 일이야.”
“내 이름을 팔아서 다른 탈영병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거로군.”
일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뇌 파편이 담긴 용기를 챙겼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굳이 이래야 했나? 미리 말할 수도 있었잖아.”
일레이는 처형 권총의 말뚝을 재장전하더니 집어넣었다.
“미리 말했으면, 넌 바깥에서 기다렸겠지.”
맞는 말이다. 난 이딴 짓거리에 내 이름과 얼굴을 내밀지 않을 터다.
“내 반감을 사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나? 참으로 충성스럽구나, 일레이 카르티카. 뭐, 별명이 여우라고? 비열하다는 말을 고상하게도 표현했군.”
“네 비난이 정겹긴 하다만, 너무 비꼬진 마. 난 너와 계속 손을 잡고 싶다. 황제의 눈을 가릴 공물이 필요해. 그리고…….”
일레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는 머플러를 코까지 끌어 올려서 하관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알기 어려운 감정 신호가 더 희미했다.
기잉.
푸른 안광만이 차갑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네게 지금의 나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었어. 난 이보다 더 역한 짓거리도 수없이 했다. 바뀐 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우리의 동맹도 여기서 끝이야. 이런 일 따위로 지리멸렬하게 말싸움하며 너와 감정을 소모할 생각도 없고, 이미 닳아버려서 감흥도 없으니까. 내가 네게 내미는 선택지는 단 하나다. 내 악취에 익숙해져라, 루카.”
일레이는 건조하게 말했다. 슬픔이나 분노, 증오도 없어 보였다. 객관적인 사실만 담담하게 나열하는 듯했다.
“12년은 길군.”
나는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나도 마음 같아선 12년간 잠만 잔 왕자님을 배려해 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어.”
일레이는 아크레시아 제국기를 꺼내서 펼쳤다.
스륵.
제국기가 가라앉으며 전 근위대원의 시신을 덮었다.
우린 전 근위대원의 시신을 옆에 둔 채로 대화를 나누었다.
“근위대 내부에서 탈영이 제법 있나 봐? 대외적으론 없는 것처럼 보이던데.”
“납득 못 할 상황이 많았으니까. 제국의 대외적 발표야, 너도 알다시피 늘 무결한 척하지.”
난 제국기가 덮인 시신을 힐끗 보았다.
“근위대의 능력과 경력을 살리면 어디서든 좋은 대우받을 수 있어. 그러나 이 사내는 허름하게 살며 은거한 애국자야. 제국에게 받은 걸 고스란히 놔두고 나왔으니까.”
황실에 충성하지 않은 게 문제였을 뿐. 불온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모든 탈영병이 이랬다면 괜찮겠지. 하지만 나쁜 선례도 있어.”
나는 나쁜 선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우선이다.
무쉬르 알 카슈라에 대한 말이 우리 입을 오갔다.
“……레기온급 전갑의체 사양이야. 심지어 뇌의 위치도 머리가 아니라 등의 상자였고.”
일레이는 내가 레기온급 전갑의체를 제압했다는 말에 놀란 기색을 미미하게 드러냈다.
“놈이 무슨 원리로 전갑의체를 통제하는 건지 알아?”
제국의 기술력으로도 레기온은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다.
“글쎄, 내가 기술자는 아니니까.”
짚이는 바가 있지만, 뒷말을 삼켰다.
무쉬르 알 카슈라의 도주 때문에 키누안을 향한 길이 잠시 끊어졌다.
‘……그러나 무쉬르 알 카슈라는 분명히 날 다시 찾아올 거야.’
이건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다. 놈은 내게 어떤 목적이 있어서 온 거다. 머지않아 다시 나타날 것이다.
“루카, 지앤지 사이버네틱스 대표…… 그러니까 길다가 보더시티를 방문할 거다. 길다의 일정을 빼뒀으니까 찾아가 봐. 너라면 가능하겠지.”
나는 눈이 흔들릴 뻔한 걸 참았다. 길다는 그 누구보다 지젤의 12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길다가 보더시티를?”
“보더시티를 거점으로 벨라토에 사업 진출을 하려는 모양이야. 제국 내수로는 성장이 멈췄거든. 단독 진출은 아무래도 요즘 분위기상 힘들어서 합작회사 형태로 하려는 모양이야. 합작회사 후보도 같이 넣어뒀어.”
일레이가 종이로 된 서류를 내밀었다. 난 서류를 접어서 챙겼다.
우린 나머지 사안에 대해서도 말을 끝냈다.
“……루카, 네 활동이 보더시티의 주목을 받고 있어. 네 활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지. 두서너 달 정도야. 그때까지 키누안을 찾지 못하면 일단 잠적해라.”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조언이었다. 여전히 훌륭하구나, 일레이.
“알고 있어.”
난 자리에서 일어서서 출입구 옆에 섰다.
스륵.
일레이는 자리를 뜨기 전에 제국기 위로 기름을 뿌렸다.
찰칵.
일레이의 라이터가 바닥에 떨어진다. 불이 빠르게 번져갔다.
밖으로 나간 우린 열기에서 도망치듯 다른 골목길로 흩어졌다.
난 고개만 돌려 잠시 일레이가 걸어간 방향을 보았다.
기이잉.
일레이도 날 보고 있었다. 푸른 안광만이 도깨비불처럼 둥둥 떠 있었다.
녀석의 안광이 흐느적거리며 깜빡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길을 꼬아서 쟈파 상사의 사옥으로 향했다.
‘길다의 방문 일정을 검토하고…….’
지젤에 대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숨결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집중이 힘들다. 추억이 빛날수록 내 불안감도 커졌다. 그녀의 12년이 일레이만큼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쟈파 상사의 사옥에 가까워질수록 인파가 늘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저 멀리 보이는 사옥을 응시했다.
우뚝.
난 걸음을 멈췄다. 인지보다 행동과 반응이 먼저였다. 아키에스 빅티마가 날 잡아끌었다.
내 동공이 인파 사이에서 멈췄다.
요동치는 사람의 물결 사이에서 반석처럼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쏴아아아아.
내 감각은 불필요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인지는 한 점으로 모였다.
……세상이 고요하다.
난 지금 이 세상에서 단둘이 있다는 듯이 한 명의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때론 격정이 아니라 공백이 된다.
모든 걸 이해할 수가 없다.
‘키누안.’
키누안도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오랜 지인을 만난 듯한 인사였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나도 얼떨결에 머리를 까닥여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