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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광예도로 건물의 벽을 자르며 통로를 만들었다.
치이이익!
플라즈마 현상으로 화광예도의 외날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금속 타일과 콘크리트 벽은 열선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부드럽게 갈라졌다.
외팔이 된 진가우는 흥미롭다는 듯이 내 등 뒤에서 화광예도의 절삭력을 구경했다.
“위력은 굉장해도 여전히 무기로서 결함은 심하군. 냉매 카트리지로 방열체계를 보완할 수 있겠지만, 그건 장인의 미학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진가우도 라피스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화광 시리즈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존중을 표했다.
‘기술의 낭만을 가지고 있다.’
진가우와 라피스의 공통점이었다.
‘제국 과학기술의 첨단에 서 있는 진가우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 면모는 도덕과 윤리적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 욕망이었다.
진가우의 나이, 지위, 직업을 따져보면, 제국 특유의 무기질적인 기계 인간이 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가우는 효율보다 비합리성을 추구하는 불순물이 있었다.
“그보다 자넨 화광 시리즈를 어디서 얻은 거지?”
진가우의 물음이 내 잡념을 깨뜨렸다.
“임무 수행 중에 얻은 전리품입니다.”
난 짧게 대답했다.
“나중에 돈이 궁하면 내게 연락하게. 값을 잘 쳐주지.”
“장난감을 구매할 예산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즘 제국은 횡령이 예전보다 쉬워졌거든.”
난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덜컹!
난 바깥과 연결된 외벽을 적당히 자른 뒤, 안으로 당겨서 넘어뜨렸다. 사람 하나가 지나갈 구멍이 완성됐다.
휘이잉.
고층인지라 바람이 세찼다. 난 벽면을 잡으며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지금 제국은 보더시티에 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일탈은 삼가는 게 좋으실 겁니다.”
난 마지막까지 제국의 특임대를 연기했다.
“다음엔 가면 없이 자네와 마주하고 싶군. 꽤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나는 까칠하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았다. 대신 고개만 까딱이며 뒤로 뛰어내렸다.
후우우우웅.
세찬 공기가 내 몸을 감쌌다. 난 멀어지는 진가우를 쳐다보다가 건물 외벽을 손으로 긁으며 낙하 속도를 줄였다.
‘진가우는 시그마의 죽음을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시그마의 죽음은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마키나의 인간들은 자기네들끼리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 생산성이 없는 친목 교류는 무의미한 일로 생각하지. 처음에는 자존심 때문에 자네를 찾으려 하겠지만 나중엔 흐지부지될 거야.’
진가우의 말을 떠올렸다. 이건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를 찾으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종족과 협력하지 않으면 보더시티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더시티는 종족의 용광로다. 종족마다 전문 분야와 특기가 있었다. 보더시티의 종족들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구분하며 서로의 전문 영역에서 활동했고, 공존을 위해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나는 마키나의 경비 시스템이 나를 인식하기 전에 거리와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의 일은 끝났다. 난 필요한 정보와 기록을 얻었다.
난 호흡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뒤늦게 진가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절친한 친구의 뒤통수를 칠 때부터 크게 될 거라곤 생각했어.’
일레이의 성격에 절친한 친구가 둘이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진가우의 말에 따르면 일레이는 내 뒤통수를 쳤다. 어떤 뒤통수이고 사건인지 난 모른다.
‘그러나 진가우의 시선으로 볼 때 뒤통수인 거다. 실상은 아닐 수도 있어. 일레이는 남에게 오해를 곧잘 사는 편이니까.’
유하구나, 루카. 나름 일레이를 계속 믿고 싶은 거겠지.
진가우의 발언을 머릿속에 담아두되,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깊은 사고는 충분한 단서를 모았을 때는 도움이 되지만, 정작 그 단서를 찾아내는 시야는 좁게 만든다.
‘이대로 쟈파 상사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해가 지고 있었다. 밤이 온다. 머리가 뜨거워서 아직 돌아가기 싫었다.
‘지금 돌아간다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야.’
일레이의 언행을 반추하며 사고하느라 밤새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
스륵.
나는 일회용 단말기를 꺼냈다. 진짜로 일회용 단말기는 아니고 싸구려 중고 단말기다.
난 진가우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준 칩을 내 주 단말기에 꽂을 생각은 없었다.
삑.
나는 마키나의 전신의체 시술 기록을 확인했다. 보더시티에는 전신의체 시술이 드물다. 마키나도 반년 동안 시술한 사례는 두 건이 전부였다.
위이잉.
해상도가 낮은 단말기 화면에서 시술한 의체의 모델과 외형이 보였다. 밑에는 자세한 사양이 나왔다.
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두 건 모두 여성형 의체.’
거기다가 전투형도 아니었다. 남자인 데다가 우수한 전사인 발렉이 비전투형 여성 의체를 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에 조사해야 한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들은 인식의 허점을 노리는 걸 좋아한다.
* * *
딸깍.
가면을 벗으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맺힌 땀이 보더시티의 밤바람에 식어갔다.
나는 조사한 의체의 모델과 외형을 쟈파에게 전송했다.
쟈파는 보더시티 전역에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 가게마다 감시 장치와 카메라가 달려 있었고, 연 단위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보더시티에 살면서 쟈파 상사의 가게를 이용하지 않기란 힘들다. 음식 장사부터 시작해서 온갖 생필품과 식품 같은 공산품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누안이 지금까지 걸리지 않은 것처럼, 발렉도 마음만 먹으면 쟈파의 감시망을 피해 갈 수 있겠지.’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간혹 실수한다.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들도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일레이는 나를 배신…….’
난 눈을 찌푸렸다. 집중할 일이 없어지니 부정적 사고가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좋지 않다. 이건 나쁜 신호다.
난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 진가우가 던진 돌 때문에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일레이에 대한 불안이 커져만 갔다.
이건 차를 마시는 정도로 멈출 수 있는 사고가 아니었다. 진가우의 말을 흘릴 정도의 시간적 거리가 생길 때까지 사고의 초점을 아예 돌려야 한다.
난 강제로 할 일을 찾았다.
‘가브리엘을 방문할 때가 됐지.’
나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가야의 병원으로 향했다.
가야의 병원은 예나 지금이나 허름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펑퍼지다 못해 나풀거리는 백의를 입은 가야가 나왔다. 검은 피부와 백의의 대비가 여전히 독특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치료가 거의 끝나가지 않나?”
“원래라면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몇 번이나 가브리엘 씨의 트라우마를 들쑤셔 벌렸죠.”
“간만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다.”
내가 용무를 밝혔다.
“그 이유가 전부라면, 면회는 주치의 권한으로 거절하겠습니다. 또 폭력으로 돌파하실 겁니까?”
가야가 문틀에 어깨를 기대며 나를 보았다.
“이번엔 강제로 만날 생각은 없어. 혹시 싶어서 온 거니까.”
내가 미련 없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가야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보다 먼저 가브리엘 씨를 면회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앙귀스 레지나 님이죠.”
“왜 님인 거야?”
“앙귀스 레지나는 뱀의 여왕이라는 뜻입니다. 씨라고 붙이면 이상하니까요.”
앙귀스 레지나가 가브리엘의 면회를 올 줄은 몰랐다. 그녀와 가브리엘은 나라는 접점 말곤 무관한 사이였다.
“난 면회가 안 되고 그 여자는 돼?”
“앙귀스 레지나 님은 존재 자체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니까요. 당신과 가브리엘 씨를 마주하게 하는 건 반대입니다만, 떨어져서 보는 건 괜찮습니다. 보고 가시겠습니까?”
가야 나름의 양보였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야는 코라 출신답게 느긋하면서도 종교적 색채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코 부드럽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댁은 코라에서도 꽤 고위직이었지?”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가야와 나란히 걸었다.
“이젠 제 과거사 탐문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포스 능력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잖아. 포스 사용자는 코라에서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있어서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어. 그걸 박차고 보더시티에 있는 걸 보니 꽤 사연이 있는 모양이로군.”
“타인의 과거를 멋대로 짚는 건 무례한 행동입니다.”
“난 이미 그쪽에게 무뢰배 같은 행동을 몇 번이나 했지. 더 떨어질 평판도 없잖아.”
“전 그저 보더시티의 의사입니다. 자격증도 없는 돌팔이죠. 애초에 자격증을 가진 의사가 보더시티에 몇이나 있겠냐 싶지만요.”
가야는 부드럽게 웃었다.
복도를 지난 우리는 불투명한 유리벽 앞에 섰다.
톡, 톡.
가야가 유리벽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유리벽이 투명하게 밝아지면서 내부가 보였다.
난 팔짱을 끼며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금 뭣 하는 거야? 소꿉놀이?”
“인지 개선 훈련입니다. 가브리엘 씨는 뇌의 처리 속도가 많이 저하된 상태입니다. 조금만 부하가 가해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겁니다.”
“그렇다고 애새끼처럼 저런 걸…… 뭐, 됐어. 치료를 일임했으니 군말 없이 맡겨야지.”
난 유리벽 너머의 가브리엘과 앙귀스 레지나를 바라봤다.
따각.
가브리엘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블록을 가지고 탑을 쌓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을 보니 영락없는 아동용이었다.
“풍부한 색감은 뇌를 자극합니다. 재활에 도움이 되죠. 정신 재활과 아동 교육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둘 다 인지 능력이 성인보다 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가야가 내 불만을 읽듯 말을 덧붙였다.
“믿고 맡긴다고 했잖아. 구구절절 설명할 건 없어.”
“그럼 얼굴에 써놓은 불만이나 지우고 말하시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참이나 가브리엘의 행동거지를 관찰했다.
가브리엘은 앙귀스 레지나의 도움을 받아 블록쌓기, 완구와 기계장치 조립 따위를 했다. 완강한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이 무색할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쩌면 가브리엘은 여기서 나오지 않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군.’
가브리엘이 가야의 병원에서 나와봐야 감당하기 힘든 어둠에 휘말리게 된다. 나와 같이 행동하면 폭력과 죽음만 그득한 길을 걸을 뿐이다.
“가브리엘, 이 블록은 색깔이 안 맞잖아요.”
“레지나 씨에게 자꾸 눈이 가서요. 어쩔 수가 없네요.”
“에이, 아부를 잘하시네.”
앙귀스 레지나는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가브리엘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다른 블록을 짚게 도왔다.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앙귀스 레지나의 가슴과 둔부에서 종종 멈췄다.
나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저 여자가 가브리엘의 재활에 도움이 되는 게 맞아? 정신 재활과 아동 교육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서?”
내가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밀접하다는 게 같다는 뜻은 아니까요. 적당한 성적 자극과 긴장은 성인의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됩니다. 더군다나 보더시티의 아이돌은 훌륭한 자극이 되죠.”
돌팔이 같은 발언이지만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블록 조립도 슬슬 지루한데 같이 춤이나 출까요?”
일어선 앙귀스 레지나가 블록과 장난감을 발로 밀었다. 그녀가 단말기로 음악을 재생했다. 뱀, 뱀, 뱀으로 시작하는 그 노래였다.
앙귀스 레지나는 부드러우면서도 과장된 춤사위를 뽐냈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강조한 춤이다.
들썩, 들썩.
신이 난 가브리엘도 앙귀스 레지나를 따라 춤을 췄다. 난 차마 그 꼴을 계속 보기 힘들어서 눈을 감았다.
뚝.
음악이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앙귀스 레지나가 방을 나왔다. 그녀는 날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떴다.
“아, 온 지 몰랐네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앙귀스 레지나는 언제 놀랐냐는 듯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달라붙었다. 그녀가 과감하게 내 팔짱을 꼈다.
탁.
내가 앙귀스 레지나를 내치듯 팔을 뺐다. 앙귀스 레지나는 개의치 않고 웃기만 했다.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묻고 싶겠죠? 듣고 싶으면 술이나 한잔해요.”
앙귀스 레지나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따각, 따각.
난 유리벽 너머의 가브리엘을 쳐다봤다.
가브리엘은 바닥에 떨어진 블록과 장난감을 들어서 원래 자리로 두고 있었다. 그는 가끔 블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헤매기도 했다. 선반에 색깔과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도 인지가 늦었다.
나는 입맛이 쓴 걸 느꼈다.
‘더는 이쪽으로 가브리엘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게 올바른 판단이다, 루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