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일레이와 헤어진 나는 밤거리를 걸었다. 조금 빙 둘러서 갈 생각이었다. 술기운도 올랐고 생각할 게 많아서 찬바람을 맞고 싶었다.
‘지젤, 일레이, 키누안, 이반 크라치아, 무쉬르 알 카슈라, 발렉…… 쟈파, 앙귀스 레지나.’
키누안을 중심으로 모든 게 엮여 있었다.
‘지젤.’
당장이라도 길다를 찾아가 지젤에 대해 묻고 싶었다. 지젤의 변모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길다였다.
으득.
이가 갈리고 의수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들끓는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침착해라, 루카. 일에는 순서가 있다. 발렉부터 찾아야 해.’
나는 훈련을 받은 군인이다. 공격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안다. 물론, 찔리는 게 없진 않다. 특히 근래는 충동에 몸을 맡긴 적이 많긴 하지.
기잉, 기잉.
거리를 걷던 나는 잡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후면 외골격을 착용한 남성이 위협적으로 걷고 있었다. 외골격은 사내의 움직임을 보조하며 거친 기계음을 내고 있었다. 험악한 문신이 피부에 빼곡한 걸 보니 갱인 듯했다.
‘벨라토 연방에선 의체를 선호하지 않아. 외골격 같은 다양한 장비를 이용해 자신을 강화하지.’
정확히 말하면, 아크레시아 제국을 제외하고선 의체는 비선호 방식이다. 특히 멀쩡한 신체를 의체로 교환하는 짓이 지탄받았다. 사고로 신체를 잃은 자들이나 상이군인들이나 의체를 사용했다.
‘생각해 보면 의체의 과도한 보급도 제국의 통제 수단이다. 전신의체 정도가 되면 제국 바깥에서 생활하긴 힘들어. 제국은 하층 구역조차 어딜 가도 의체 시술 전문가가 존재할 정도로 보편적이지만, 바깥은 그렇지 않아. 의체 비율이 높을수록 제국민은 반강제로 제국에 묶이는 셈이지.’
전신의체, 그것도 고성능 전투의체는 제국 바깥에서 구하기 힘들다. 관련 기술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발렉은 고성능 전투의체를 버렸다. 바바라 같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혼자서 전신의체를 교환하는 건 불가능해.’
더군다나 바바라는 일회성으로 신체를 바꿔대는 여자였다. 조율이 맞지 않아도 쓰다가 버리는 식으로 몸을 바꿨다.
그러나 전투의체는 고도로 섬세한 조율이 필요했다.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보더시티의 전신의체 기술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야. 고성능 전투의체 조율이 가능한 사람은 더욱 적을 거고.’
쟈파에게 요청하면 금방 명단이 나올 것이다.
‘……이런 내 판단 또한 키누안의 예상범주에 있을 터.’
내 안의 키누안은 전지전능한 괴물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게 키누안은 무적이다. 뭐든 할 수 있고 모든 걸 알고 있지.’
난 키누안을 경외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키누안의 예상을 깨며 허를 찌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를 이겨 먹는 내 모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강자를 상대론 몇 번이나 승리를 상상했다. 그러나 키누안을 상대로는 그런 심상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난 싸우기도 전에 지고 있어.’
약한 마음을 떨쳐내야 한다. 그러나 키누안이 내게 심어둔 쐐기는 깊숙했다. 만약 내가 키누안의 입장이었으면 제국에서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다. 난 주변인 몇 명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나는 키누안보다 못하다.’
몇 번이나 다르게 생각해 봐도 도달하는 결론은 같았다. 라그나타에게 아키에스 빅티마의 약점을 물어본 것도 이런 무의식의 발로다.
“……염병.”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 * *
다음날, 나는 쟈파에게 필요한 정보를 요청했다. 쟈파는 의체 기술자와 공학자 명단 요청을 보고선 내 의도를 알아챘다.
“호욧, 무쉬르 알 카슈라를 만나는 게 아니라 발렉을 추적하는 게 우선입니까?”
“키누안의 의도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어. 발렉을 통해 키누안을 바로 찾아낼 거다.”
난 일레이가 무쉬르 알 카슈라와 접촉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쟈파도 내게 숨기는 게 많으니 딱히 켕길 것도 없다.
“그럼 혹시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으니 제가 무쉬르 알 카슈라를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원체 비밀스러운 인물인지라 막상 찾으려면 접촉이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 카슈라라는 용병은 전신의체인 걸 감안해도 생물학적 수명을 진즉 넘었어. 아마 단일 인물이 아닐 거야. 후계자가 장비와 이름을 이어받으며 활동하고 있겠지.”
“호요요오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명성을 부풀리는 건 용병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죠. 그럼 다른 보고나 진척 사안은 없습니까?”
쟈파가 혀를 날름거리며 날 보았다.
딱, 딱, 딱.
쟈파의 손톱이 마주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졌다.
타지룬은 혀로 공기 중의 체취를 낚아채 타인의 감정을 읽는다. 나는 모공을 좁히는 심상을 그리며 감정 신호를 차단했다.
“없어.”
“여러모로 당신을 고용한 보람이 있네요. 루카 씨는 제가 고용한 그 누구보다 빠르게 키누안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 외의 문제 해결 능력도 우수하고요.”
“날 칭찬한다고 뭐 더 나올 건 없어, 쟈파.”
“아뇨. 훗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키누안 추적이 끝나더라도, 당신이 쟈파 상사에 남아서 해결사 역할을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전 인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돈은 단순한 결과물이고, 인재는 돈을 버는 수단이죠.”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으면 고려해 보지.”
“당장은 그 정도의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쟈파가 웃었다. 그토록 낯설었던 타지룬의 표정과 감정 신호가 익숙했다.
쟈파는 자리에 앉더니 통신으로 직원들에게 지시사항을 내렸다. 머지않아 내 단말기로 의체 기술자 명단이 전송될 것이다.
저벅, 저벅.
난 쟈파의 집무실을 나가서 라그나타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라그나타는 쟈파 상사의 손님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군.’
더 웃기는 일은 라그나타와 앙귀스 레지나가 제법 친하게 지낸다는 점이었다.
나나 라그나타가 머무는 층은 보안 등급이 높아서 쟈파의 측근만 오갈 수 있었다. 복도는 한적했고 멀리서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앙귀스와 라그나타, 두 사람 사이에서 통하는 게 있는 건가?’
난 앙귀스 레지나와 라그나타가 떠드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봤다. 그들은 보더시티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바에 앉아서 술을 나눠 마셨다. 벌건 대낮인데도 얼굴에는 술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 루카. 여기 와서 한잔해요.”
앙귀스 레지나가 날 발견하더니 손짓했다. 난 바에서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넉살도 좋네. 널 죽이려고 했던 여자와 술을 마셔?”
“지난 일이잖아요. 그리고 라그나타도 일 때문에 그런 거죠.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잖아요. 라그나타도 그렇게 생각하죠?”
앙귀스 레지나는 라그나타를 보며 방긋 웃었다. 라그나타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프로는 일에 감정을 섞지 않아. 하물며 실패자를 이렇게 대우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노릇이지.”
“구차한 암살자의 말로로군.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어.”
내가 빈정거렸다. 라그나타는 내 도발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단단한 인간이다.
“날 죽이지 않고 데려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라그나타와 나 사이에 험한 기류를 본 앙귀스 레지나가 일어섰다.
“에이, 둘 다 싸우지 마세요. 사이좋게 지내자고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전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앙귀스 레지나는 흐물거리는 옷깃을 끌고선 일어섰다. 빛의 방향에 따라 옷감이 반투명하게 변하면서 몸의 선이 드러나곤 했다.
난 앙귀스 레지나가 자리를 뜬 걸 보고선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앙귀스 레지나와 교류하는 거야?”
“재미있는 아가씨니까. 불구가 됐다지만,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날 두려워하지 않지. 군인이나 전사도 아닌데 말이야. 하기야 보더시티를 주름잡는 연예인이니 그런 건가?”
“그냥 제정신이 아닌 거지. 저 여자도 미치광이야.”
난 앙귀스 레지나의 어두운 일면을 본 적이 있었다.
라그나타는 주름진 손가락으로 술잔을 들더니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그녀의 휠체어는 높낮이 조절이 돼서 바의 높이에 맞게 올라가 있었다.
“사실은 너와 쟈파 상사, 그리고 키누안이라는 존재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그러나 좀처럼 키누안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더군. 앙귀스 레지나도 키누안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이건 나도 궁금한 사안이었다.
“……뭐, 상당히 복잡한 관계겠지.”
“네가 앙귀스 레지나와 잠자리를 가져. 그러면 알 수 있을 거다. 침대에선 심리적 장벽이 허물어지니까. 보아하니 네게 호감이 있는 것 같더군. 좋다고 다가오는 여자를 너무 내치는 것도 남자가 할 일은 아니야. 저번에도 쳐냈다면서?”
둘이서 별별 이야기를 다 하는 모양이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난 저런 부류의 여자는 질색이야.”
라그나타가 나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흐응, 그게 아니겠지. 보아하니 순정남이로군. 따로 좋아하는 여자가, 그래, 이름이 지젤이었나? 지금은 곁에 없는 여자를 위해서…….”
난 눈을 부릅뜨며 라그나타를 노려봤다. 온몸의 핏줄이 바짝 서는 느낌이었다.
“그 아가리, 박살 내기 전에 닥쳐.”
“……이게 네 역린이었군.”
역시 너무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다.
나는 일어서며 손을 크게 휘두르듯 뻗었다.
콰직!
난 라그나타의 관자놀이를 잡으며 바에 처박았다. 원목으로 된 바가 갈라지면서 나무 조각이 라그나타의 뺨에 박혔다.
“내 호의를 유약함으로 착각하지 마라. 나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거니까. 너도, 쟈파도, 앙귀스 레지나도…… 쳐 죽이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어. 왜 안 죽이는지 알아? 내게 쓸모가 있으니까 놔두는 거다. 우린 친구가 아니야. 알아먹었으면 대답해. 지금 여기서 허튼 말을 지껄이며 심리적 우위에 있는 척한다면, 난 그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네 비명과 절규를 들을 거다.”
나는 손아귀의 힘을 풀며 라그나타의 말을 기다렸다.
“사과하겠네, 루카. 자네의 말이 맞아. 내 처지를 망각하고, 자네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겼지. 이런 실수는 다신 없을 거야.”
침착한 대답이었다.
“정답이다, 라그나타.”
내가 라그나타의 머리를 놓았다.
퓻.
라그나타가 뺨에 박힌 나뭇조각을 빼며 턱짓하며 뒤를 가리켰다.
“루카, 하지만 앙귀스 레지나는 흥미로운 여자야. 친해지면 비밀이 나오겠지. 아, 이건 조언이네.”
나도 아까부터 앙귀스 레지나의 시선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스륵.
난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앙귀스 레지나는 홍조를 띤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내가 라그나타의 머리를 처박을 때부터 앙귀스 레지나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착한 척하던 앙귀스 레지나는 내 폭력을 보고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흥분했다는 듯이 허벅지를 오므리며 비볐다.
난 기분이 잡쳐서 옷깃을 가다듬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후후, 루카…….”
앙귀스 레지나가 야릇하게 웃으면서 나를 계속 보았다. 난 그녀의 목을 조르며 벽까지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난 앙귀스 레지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앙귀스 레지나는 그런 나를 잡아끌 듯이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키누안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요.”
침을 머금어서 끈적거리는 목소리였다. 더 듣고 싶으면 자신에게 오라는 듯이 그녀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 그래? 유감이로군.”
난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떴다.
내 등 뒤에서 앙귀스 레지나가 뭐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타지룬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