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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00

200
제국에서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은 여럿 있다. 그중 한 명이 ‘일레이 카르티카’다.

일레이는 군인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고 탁월한 재능까지 지녔다. 그러나 완벽한 조건을 타고난 소년은 불온한 시선으로 제국과 황실을 바라봤었다. 지금도 그러한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치이익.

일레이가 헬멧을 벗었다. 유압이 빠지면서 인조섬유로 만든 금발이 흘러내렸다. 감았다가 뜬 푸른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깨끗했고 속눈썹은 비정상적으로 탄력이 있었다. 그는 기밀성이 높은 전투복을 입었는데도 땀을 흘리지 않았다.

……전신의체구나, 일레이. 제국의 성인 귀족이자, 정예군인이니 당연한 거겠지.

나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일레이를 응시했다.

파직, 파직.

일레이의 손에 죽은 사내는 경련하고 있었다. 꿰뚫린 턱과 정수리에선 전류가 간헐적으로 일었다. 일레이와 같이 다닌 걸 보니 적어도 근위대급 정예군인일 것이다.

“살아있었구나, 루카. 그래, 당연하지. 너만큼 끈질긴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일레이가 싱긋 웃었다. 여전히 맑고 경쾌한 미소였다.

“난 발렉을 찾으러 왔다, 너는?”

담소를 나누며 회포를 풀기보다 빠르게 목적과 상황을 전달했다.

동료를 바로 죽인 것으로 봐선 일레이가 내 존재를 제국에 보고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발렉? 아, 그 녀석은 여기에 있지.”

일레이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걸쭉한 보존액에 담긴 발렉의 머리가 담겨있었다. 발렉은 눈만 크게 뜬 채로 죽어있었다. 밀도가 높은 보존액에 짓눌린 핏물이 안개처럼 일렁거렸다.

‘뇌가 망가지거나 썩지 않으면 어떻게든 정보를 빼낼 수 있겠지.’

제국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너도 발렉을 잡으러 왔나 보지?”

“루카, 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시간이 많이 없어. 머지않아 다른 팀원도 이쪽으로 올 거야. 내 부하를 전부 죽일 순 없어.”

난 화광예도를 계속 쥐고 있었다. 열광이 은은하게 동굴을 밝히고 있다.

“일레이. 프란세크는 유폐됐고, 지젤은 행방불명이다. 그리고 넌 제국 바깥에서 중요 임무를 수행하고 있군. 황제의 신임을 받는 모양이지? 난 네게 프란세크의 보좌를 맡겼어. 당연히 지젤도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프란세크를 이반에게 팔아넘긴 거냐?”

나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조용히 일레이를 관찰했다. 그러나 그 어떤 동요나 감정 신호도 드러나지 않았다.

일레이는 정지한 화면처럼 건조한 미소를 유지했다. 이내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열었다.

“루카, 여기서 말하기엔 상황이 복잡해. 오해가 생길 거야. 너도 제국의 거미줄을 잘 알잖아.”

“그러면 하나만 묻지. 최선을 다했다고 확신해?”

지금은 이걸로 넘어가야 한다. 칼을 들이밀고 묻고 싶지만, 그건 여기서 최선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레이를 내가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현명하게, 감정을 억눌러라. 지젤을 찾으려면 이게 최선이다. 일레이의 협조는 중요하다.

“너라면 더 잘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겐 최선이었어. 그보다 너와 발렉이 마주한 적이 있어? 최근에?”

“신나게 싸워댔지. 놈의 머리통에서 기억을 뽑아내면 내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걸.”

일레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꾹 눌렀다.

“젠장, 네가 멀쩡히 돌아다닌다는 걸 제국이 안다면 당장 붙잡으러 올 거야. 이반이 네게 묘하게 집착하고 있거든. 정말로 시간이 많이 없어, 루카. 지금 상황을 간략히 설명할게.”

난 일레이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칙명을 받아 특임대를 꾸려 키누안을 쫓고 있다. 네가 어떤 경로로 여기에 도달했는지는 모르지만, 너도 키누안을 쫓고 있겠지? 너와 여기서 마주친 게 우연은 아닐 테니까.”

또 키누안이로군. 도대체 무슨 염병할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나도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발렉의 머리를 네게 넘겨줄게. 보더시티에 머물고 있지? 거기라면 기억을 뽑아낼 방법이 여럿 있을 거야. 한 달 뒤에 다시 만나 그간의 흐름과 정보를 공유하자. 나도 네가 궁금해할 만한 걸 조사해서 올 테니까.”

일레이가 발렉의 머리 상자를 닫더니 내 쪽으로 던졌다. 우린 날짜와 장소를 빠르게 정했다.

철컥.

말을 마친 일레이는 총구를 들어 라그나타를 겨누려 했다. 나는 화광예도를 앞으로 뻗어서 총구를 가로막았다.

“일레이,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총 내려놔.”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널 못 본 척하는 거야.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해. 저 노파가 네게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내 통제 아래에 있는 자다. 제국에 떠들어 댈 사람은 아니야.”

“루카, 넌 정이 많아서 종종 결단을 망설이는 게 흠이야. 네 그런 면을 좋아하지만…… 그 성격 때문에 넌 파멸했어. 그런 악몽은 한 번이면 충분해.”

일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더 험악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두 번 말하기 싫어. 방아쇠에서 손가락 치워라.”

“난 널 위해 부하를 죽였어. 충성스러운 녀석이었지.”

난 웃음을 터트리며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하하, 방금 기억이 났어. 수틀리면 부하를 죽이는 게 네 특기였지?”

일레이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말에도 감정이 실렸다.

“지금 날 적대하는 게 현명한 판단은 아니지 않아? 나 없이 제국의 내부 상황을 알 방법은 없을 텐데? 난 널 도와주고 싶어. 그러니 예전처럼 날 믿어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면 너도 납득할 거야.”

“일레이, 난 분명히 안 된다고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고집쟁이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이건 양보할 문제가 아니야, 루카. 무려 12년이다, 12년 동안 내가 뭘 했는지 넌 몰라. 그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내가 품을 위험은 너 하나면 충분해. 다른 사람은 내 알 바가 아니지.”

나는 일레이 앞에 서며 사선을 봉쇄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12년 동안 뭘 했는지 내 알 바 아니야. 프란세크도 보호하지 못하고, 지젤도 지키지 못한 머저리가 눈앞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애새끼처럼 굴지 마. 기껏 들뜬 기분이 더러워지니까. 널 보자마자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나도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일레이 카르티카. 하지만 내 목적을 위해선 저 여자가 필요하다. 양보할 문제가 아니야.”

일레이는 아랫입술을 튕기듯 깨물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한숨만 내뱉으며 총을 집어넣었다.

“네가 순순히 날 믿기 어렵다는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 고집에 져줄게. 이건 신뢰의 증표다. 그러니…… 다음부턴 날 믿어. 그 누구도 아닌 네 친구를 믿어봐.”

일레이가 주먹을 내 앞으로 뻗었다.

“뭐, 장담은 못 하지만 노력해 볼게.”

나도 칼을 거두곤 주먹을 뻗어서 맞부딪쳤다.

“진짜 그 더러운 성질머리는 여전하네. 어쨌든 아까 말한 대로 시간이 없어. 내 팀원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 현장은 내가 조작해 둘 테니까.”

난 라그나타와 발렉의 머리 상자를 챙겼다. 라그나타는 말없이 나와 일레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일레이, 난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믿어. 이것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않아. 정말로 이 상황이 네겐 최선이었겠지.”

내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휙!

일레이가 뭔가를 내게 던졌다. 난 팔만 뻗어서 물건을 받아냈다. 이상할 정도로 손바닥에 착 감겼다.

난 일레이가 던진 물건을 보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그라켄 부트.’

녀석이 내게 선물로 줬던 백색 단검이었다. 실사용이 아니라 부적처럼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성능만 따지면 그라켄 부트보다 좋은 물건이 많다.

“이걸 여태 들고 다니고 있었어? 근데 내 소지품이었지 않아?”

내가 묻자, 일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빼놔서 챙겨뒀지. 그냥 뒀으면 쿠스토리아 가문에 귀속될 테니까. 용케 저승에서 돌아왔으니 다시 가져가. 참고로 크루시스는 네 의붓형, 어, 이름이, 그래, 쥬페가 들고 다니고 있어.”

“흠, 그건 좀 기분이 나쁘네.”

쥬페에게…… 크루시스는 분에 넘치는 여인이지. 제대로 다루지도 못할 터다.

나는 일레이를 놔두고 지하동굴을 되짚어 나갔다. 한창이나 침묵하던 라그나타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소년들은 언제 봐도 풋풋하군.”

“얼추 세어봐도 우리 나이가 서른이야. 소년이라고 부르기엔 많지 않아?”

“서른 밖에 안 됐으니 내겐 소년이지. 어쨌든 친구와 척질 각오를 하고 날 살릴 줄은 몰랐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반했을 텐데 말이야.”

“10년? 30년을 잘못 말한 게 아니고? 그리고 딱히 댁을 위해 부딪친 건 아니야. 녀석이 얼마나 나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시험해 본 거다. 옛날부터 음험한 녀석이었거든. 순순히 믿긴 힘들어.”

내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음험한 친구가 널 위해선 뭐든 했겠지.”

난 대답하지 않았다.

* * *

나는 발렉의 머리를 쟈파에게 맡겼다. 내가 바이오 해커를 수소문하는 것보다 쟈파가 훨씬 일 처리가 빠를 것이다. 분명히 단골도 있을 터다.

당연히도 일레이와 마주한 일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이었다.

‘일레이 카르티카.’

난 약속 장소를 떠올렸다. 우린 보더시티의 흔해 빠진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편이 자연스러운 접선이다.

‘일레이와 만나기 전에 발렉의 머리에서 기억과 정보를 빼놔야 한다.’

사실 한 달이면 일 처리하기에 빠듯한 시간이었다. 내가 직접 발품을 팔았다면 기한을 맞추기 힘들다.

‘하지만 이 정도도 처리하지 못하면 키누안을 쫓을 자격이 없지.’

일레이도 그런 의미로 한 달이란 기간을 정한 걸 터다.

키누안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괴물이다. 조금만 눈을 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위치에 있다.

어쨌든 한 달이란 시간이 비어있다. 지금은 키누안을 더 조사하기보다 ‘일레이’에 대한 대응을 생각해야 한다.

‘최악을 가정해라.’

난 일레이를 믿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믿음에 보답하지 않는다. 머저리들이나 현실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일레이의 배신도 염두에 둬야 한다. 녀석도 똑같을 것이다. 내 돌발 행동을 가정하고 오겠지.

‘일레이는 내 공백기 동안 경험을 쌓았다. 제국의 최정예 군인으로 위험한 임무는 수없이 해냈겠지.’

일레이는 흔히 말하는 ‘천재’에 속하는 인간이다. 녀석이 재능과 노력으로 쌓아 올린 12년은 어마할 것이다.

위이잉.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서 환풍기만 돌고 있었다.

지금 나는 사옥에 마련된 훈련실에 있었다. 개인 훈련실이지만 상당히 크고 넓었다. 무엇보다 시설이 훌륭했다. 내가 최대 출력으로 움직여도 바닥과 벽이 깨지지 않을 정도다.

끼이이이.

나는 의체의 출력을 높인 채로 천천히 주먹을 뻗고 발을 휘둘렀다. 한 가지 동작에도 수 분을 들여가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안쪽으로 갇혀 내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뚝, 뚝.

생체 부위에선 땀방울이 비 오듯 흘렀다.

“이게 효과가 있어? 넌 의체 사용자가 아니잖아. 사이버네틱 전투법에 대한 이해도도 없고.”

내가 구시렁거렸다.

“훈련을 도와달라고 한 건 너다, 소년.”

라그나타가 휠체어에 탄 채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난 그녀를 자유롭게 놔뒀지만, 의족을 달아줄 생각은 없었다.

‘아직 라그나타를 신뢰할 순 없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존재야.’

라그나타를 곁에 두는 건 내 직감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목적을 위해선 그녀의 존재가 내게 필요할 것 같았다. 괜히 일레이와 대립하면서까지 그녀를 살린 게 아니다.

‘라그나타의 말이 맞아. 날 통제할 수 있는 상관이 필요해.’

그래, 이건 인정하고 넘어가자. 난 불안정한 인간이고, 내겐 현명한 조언자가 필요하다. 생도 시절을 되돌아봐도 그러했다.

쟈파는 후원자이지 조언자가 아니다. 내게 필요한 조언자의 조건은 단순하지만 어렵다.

날 뛰어넘거나 적어도 대등한 전투력을 가진 강자일 것. 그리고 내게 없는 경험을 갖춘 자일 것. 마지막으로 죽음 앞에서도 의지와 신념을 관철하는 정신력이 있을 것.

이 조건을 갖춘 자는 드물다. 난 뒤틀린 인간이라 내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설사 옳더라도 듣지 않는다.

“생체든 의체이든, 외골격이든……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전사를 배신하지 않는 건 딱 한 가지다. 날마다 반복해서 몸에 밴 기본기지. 오히려 어느 수준에 이르면 간과하고 말거든. 자주 쓰는 동작만 반복하고, 쓰지 않는 기본기는 잊어.”

“다르게 말해서 최적화지. 가장 몸에 맞는 동작만 남기고 제거하는 거다.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순간에 몸에 맞지 않는 움직임을 하려다간 죽어.”

내가 반박했다. 라그나타는 느긋하게 날 보았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 특히 일반적인 하위 전투에선 그러하지. 하지만 우리 수준의 상위 전투에선 창의성이 중요하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히고 있으니까 너도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창의성은 영감이 아니라 반복 숙달의 연장선이야. 발차기의 달인이 돼야만 발끝을 사용한 베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정리하자면, 뭐든 할 수 있게 단련해라. 전신을 흉기로 만들어.”

라그나타가 티백의 실을 끊더니 입안에 넣었다.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그녀는 리본형으로 곱게 묶인 실을 손바닥으로 뱉었다.

“……무슨 의미야?”

내가 뜸을 들이곤 말했다. 묘하게 껄끄러웠다.

“전성기 시절의 나는 혀로 사람을 여럿 죽였지. 혀를 손가락처럼 쓸 수 있다면 많은 걸 할 수 있거든.”

“그건 암살자의 기술이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인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약자를 위한 기술이지. 좋게 말해선 요령이자 지름길이고, 나쁘게 말해선 꼼수에 불과해. 아키에스 빅티마만으론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없다, 꼬마야.”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며 혓바닥을 잡아서 비틀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그나타가 말했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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