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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라피스의 기계정비실을 들렀다.
“아, 루카? 잠시만요. 이것만 끝내고요.”
라피스는 홀로그램을 띄운 채로 설계도를 이리저리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동작을 따라 홀로그램 설계도의 부품이 바뀌면서 빙빙 돌았다.
난 라피스의 작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용건을 꺼냈다. 우린 화광예도 예열에 대해서 논의했다.
“화광의 열 증폭을 돕는 장치요? 흐음, 저는 추천하지 않는데요. 워낙 정교한 설계라서요.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라피스가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난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이쪽 수준의 전투에선 예열이 끝나기도 전에 결판이 나는 경우도 많아. 예전에 화광 시리즈를 두 자루 쓰는 녀석과 싸운 적이 있어. 화광 두 자루를 마찰해서 예열을 순식간에 끝내더군.”
“맞아요. 제일 좋은 건 동질금속인…… 이그니움을 숫돌 삼아서 마찰하는 거죠.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네요.”
“하지만 이그니움이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금속이 아니지?”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회전의자에 앉은 채로 빙글빙글 돌다가 멈췄다.
“고연소 물질을 휴대하고 있다가 뿌려서 불이라도 붙일까요?”
궁여지책으로 꺼낸 말 같았다.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는 방식은 안 돼. 예열과 다를 바가 없지. 어려워도 좋으니 절차가 간소하고 짧아야 해.”
“까다롭게 구시네요.”
“미안하게 됐어. 이건 타협할 영역이 아니라서.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면 괜찮아.”
“……다음에 준비해 둘게요. 당신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라고만 말하면 어지간해선 다 결재가 나거든요. 돈만 있으면 못 할 건 없죠.”
이어서 난 의체 점검을 받았다. 별다른 기능 이상은 없지만, 한동안 바빠서 점검을 받지 못했기에 해두는 것이다.
삑.
라피스가 내 의체의 단자를 열어서 선을 꽂았다. 의체의 내부 데이터가 모니터 화면에 떠올랐다.
“요즘 회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당신이 온 뒤로 뭔가…… 모든 게 빨라진 느낌이에요.”
“불안하면 퇴직해. 이 정도 실력이면 어디서든 받아줄걸.”
“하핫, 그 정도로 불안하진 않아요. 그리고 여기선 제가 만들고 싶은 걸 마음껏 만들 수 있어요. 이렇게 자율성을 주는 회사는 없을걸요. 쟈파 님은 특이한 사람이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특이한 타지룬이죠. 타지룬들은 배타적인 성향이 강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서 쟈파 님이 가장 편견이 없고 타종족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라피스는 쟈파의 인간성애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다.
“쟈파가……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
난 많은 의미를 담아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력이 뛰어나잖아요. 이번에도 불의의 습격을 받았지만, 여차여차 이겨낸 것 같더라고요. 회사도 더 커졌고요. 아, 잠시만요. 이 부근의 그래프는 정말 희한하네요.”
라피스가 복잡한 그래프와 수식, 숫자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녀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왜?”
“……루, 루카! 이걸 어떻게 했어요? 포스라도 쓸 수 있는 거예요? 물리적 시간이라도 멈춘 건가요? 의체에 내려온 신호가 말도 안 되게 밀도가 높아요. 고반응성 의체도 신호 입력을 따라가지 못해서 행동 지연이 나올 정도로요. 여기선 미리 행동을 입력하고 움직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싸구려 의체였으면 신호 정렬이 안 돼서 고장 났을 거예요. 손을 펼치는 것과 주먹 쥐는 걸 동시에 할 순 없으니까요.”
발렉이나 친위대장과 싸울 때를 말하는 모양이다. 내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얼추 알아먹을 수 있었다.
난 집중 상태로 들어가면 시간이 늘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고속 사고의 영향 탓이다. 그 감각이 극에 달하면 시간을 멈췄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신경계 화학 처리를 받아서 그래.”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둘러댔다.
“저도 그런 게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라줄리 21호는 걸작이에요. 고출력에 고반응성 의체죠. 고반응성 의체에서 행동 지연이 일어날 정도로 신호 밀도가 높은 건 말도 안 돼요.”
“이제 현실로 봤으니 말이 되겠네.”
라피스는 눈을 반짝이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작업을 마친 그녀가 선을 빼내며 의체의 단자를 닫았다.
“……제국군이 왜 전신의체 군인을 쓰는지 알 것 같긴 해요. 루카는 전신의체를 쓰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거예요. 이미 뇌 신경계가 생체보다 사이버네틱 의체에 더 최적화되어 있어요.”
“그렇게 훈련을 받았으니까.”
난 덤덤하게 대답하며 벗어뒀던 코트를 걸쳤다.
“하지만 생물의 뇌는 총량이 무제한적이지 않아요. 다른 기능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기능이 떨어지게 되죠.”
“그것도 알고 있다. 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지.”
내 머릿속엔 무수히 많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루카는 남은 피와 살을 버리지 마세요. 종종 짐처럼 느껴지는 그 피와 살덩어리가 당신을 기계로부터 지켜주고 있을 테니까요.”
라피스는 나처럼 제국에서 몸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사이버네틱 의체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기계와 의체를 좋아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축소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라피스는 훌륭한 전문가다.’
하지만 난 그녀의 조언이 필요 없다. 이미 몸으로 다 겪은 일들이다. 난 뒤돌아선 채로 손만 흔들며 기계정비실을 나왔다.
* * *
난 라그나타를 사옥의 감금실에서 꺼냈다. 두 다리는 여전히 없었으나 치료가 끝난 양팔은 멀쩡했다.
양팔이 앞으로 묶인 그녀는 군말 없이 더플백에 들어갔다.
“저번보다 좋군. 푹신한 쿠션도 있고. 날 위해 특별 제작한 건가?”
쟈파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말이 더플백이지, 이동 침낭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부는 쾌적하고 아늑한 모양이다.
“협력해라, 라그나타.”
“이미 협력 중이지 않나?”
“불안정한 관계는 짜증 나니까 말하는 거다. 우리 쪽에서 아니마 이동학교를 지원해 주겠다. 쟈파에겐 장학 재단이 있어. 근래 자본이 많이 들어와서 돈도 넘쳐나지.”
“참 매력적 제안이네. 하지만 쟈파가 퇴물 암살자인 날 위해 그 정도 지출한다는 건 믿을 수가 없어. 그러니 반대로 생각해 보면. 널 위해 쟈파가 그 정도 지출을 기꺼이 하는 거겠지. 쟈파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할 정도로군.”
라그나타의 통찰력은 우수하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류의 통찰이다. 실전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이 많았다.
‘내가 잘난 척해봐야 반세기도 살지 못한 애송이지.’
라그나타는 불편한 존재지만 거침없이 내게 조언한다. 내 정신 상태가 비정상일 때마다 매섭게 꼬집어줄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라그나타와 마주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짜증이 치솟는 건…… 저 여자가 날 들여다보면서 약점과 단점을 짚어내기 때문이다. 내 잘못까지 서슴없이 지적하지.’
쓰다고 뱉을 생각이 없다. 필요하다면 삼켜야 한다.
라그나타는 내 판단에 반대하면서 감정적 폭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이다. 어쭙잖은 자가 그녀와 똑같은 말을 해 봐야 난 무시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험이 많은 강자를 존중하기에 라그나타의 의견을 곱씹어 듣는다.
‘라그나타는 내게 필요한 사람이다.’
거기다가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가 죽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내 아량으로 건진 목숨이고, 라그나타는 날 원망치 않을 것이다.
“너는 제국의 군인이었지, 그것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군인. 그 시절엔 네가 존경할 만한 상관이 고삐 역할을 했을 터. 그 고삐가 사라졌으니 불안정한 것도 당연해. 네 고용주인 쟈파는 어디까지나 고용주일 뿐이고.”
흠, 역시 짜증이 난다. 이대로 지하에 처박아 두고 싶어졌다.
나는 쟈파가 준 입마개를 꺼내다가 움찔했다. 포장지를 뜯으니 조금 낯 뜨거운 모양새의 입마개가 보였다. 공 모양의 입마개였다.
……그러니까 사창가에 굴러다니는 홀로그램 광고에서 자주 본 물건이다.
‘쟈파! 이 망할 뱀 대가리가!’
난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라그나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이런, 흠, 나 원, 난 밑으로는 열 살까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차이가 나면 힘들지.”
아, 요즘, 이런, 느낌의 농담은, 참기 힘들다. 난 또래 여자가 좋다. 그것도 인간 여자!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이 할망구야.”
내가 험하게 소리를 질렀다.
“할, 망구, 으음.”
방금은 라그나타도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할망구라는 말은 효과적이었다. 기억해 둬야겠군.
스륵.
난 라그나타가 들어간 더플백을 어깨에 짊어졌다. 더플백 위로는 덮개가 달려서 그걸 내리면 라그나타의 머리까지 가릴 수 있었다.
* * *
발렉은 현재 보더시티에 있진 않았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고, 하루면 도착할 거리에 놈의 은거지가 있었다.
덜컹, 덜컹.
난 화물차량의 짐칸에 타고 있었다. 승차감은 몹시 나빴지만, 나도 그렇고 라그나타도 사소한 불편에 불평불만을 내뱉는 사람은 아니었다.
삑.
내 단말기가 울렸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나는 팔짱을 풀며 일어섰다.
삐걱.
짐칸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나는 더플백부터 먼저 내던지곤 훌쩍 뛰어내렸다. 옅은 신음이 들린 듯한데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쿵!
쟈파 상사의 화물차량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갔다. 난 앙귀스 레지나가 그려진 화물차량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솔길조차 없는 원시림 지역이 보였다. 스산한 야생짐승의 그림자가 나무 사이로 오가고 있었다.
‘미개발 지역.’
노바스 행성엔 미개척지와 미개발 지역이 많았다. 심지어 자국 영토라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허다했다.
도시 내의 질서유지를 위한 치안력도 부족한데, 도시 바깥까지 치안 관리가 가능한 국가는 없다시피 했다.
쓱.
난 더플백의 덮개를 열며 짊어졌다.
“그리 멀리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저런 울창한 원시림이 있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군.”
라그나타도 원시림을 보며 말했다.
“위험한 장소라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 사냥감도 여기에 숨은 걸 거고.”
발렉은 이 원시림 안쪽에 머물고 있다. 왜 놈이 여기에 있는지는 나도 쟈파도 모른다. 잡아 족쳐서 캐내면 될 일이다.
“지금 내가 잡을 놈은 발렉이다. 아키에스 빅티마 숙련자이고, 화광자검이라는 두 자루의 쌍검을 사용해. 그래서 골치가 아파. 칼날을 맞부딪히면 둘 다 폭사거든.”
내가 상황을 라그나타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조언을 얻기 위해 데려왔으니 적당한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다.
“제압해야 하는 모양이지?”
“캐낼 정보가 있어. 너도 쌍검을 썼잖아. 괜찮은 공략법이 있으면 말해봐.”
난 원시림 쪽으로 걸어갔다. 바깥에선 몰랐는데 숲으로 들어가니 감각이 묘하게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낯선 환경에 반응한 내 뇌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쌍검 공략법? 바보냐? 소년. 잘 싸우는 것 말고 있겠어?”
라그나타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 내가 등신 같은 질문을 했네.”
나도 조금 멍청한 질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으득, 으득.
난 우거진 나무를 꺾으며 나아갔다. 땅이라도 질퍽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까득, 까득.
낯선 소리가 났다. 난 눈을 가늘게 뜨며 저 너머를 응시했다.
“역시 변이체가 나오는 곳이로군. 보더시티와 멀지 않은데도 개발이 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라그나타도 같은 곳을 보며 해설을 덧붙였다.
“변이체?”
“나는 그렇게 부른다. 노마드는 노바스 행성 전역을 떠돌다 보니 기괴한 괴물을 자주 마주치거든.”
난 수풀 너머의 짐승을 관찰했다. 형태는 팔다리가 굵은 유인원이었다. 그러나 외피에는 털이 없었고, 단단한 암석피부가 갑옷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둔탁한 손 아래로는 길쭉한 손톱이 갈고리처럼 드러났다.
까득, 까득.
별다른 명칭이 없으니 ‘암석 원숭이’라고 일단 부르자. 암석 원숭이는 사냥한 짐승의 배를 파헤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키기 싫으면 그냥 지나쳐. 내 경험상, 암석형 변질을 겪은 변이체는 공격적이지 않고 신중해. 네 존재를 알아도 덤비진 않을 거야.”
라그나타가 속삭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에둘러서 장소를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