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Bad Born Blood Chapter 348

348
나는 머리에 전극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진가우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가 특정한 움직임을 지시하기도 했다.

내가 질문에 답하고 움직일 때마다, 3차원 홀로그램으로 된 뇌 지도가 반짝거렸다.

“세상은 참 재밌어. 이토록 오래 살아도 놀랄 일이 번번이 일어난단 말이지.”

진가우가 내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소장님은 이번 혼란에서도 살아남으셨군요.”

“제국은 유용한 인재를 쉽게 처분하지 않아. 나란 존재의 위험성이 유용성보다 커지지만 않으면 안전하지. 그런 나를 내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 정도까지 이르면 머지않아 제국은 망하겠지.”

진가우는 제국의 정치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생존이라는 생물 본연의 목적성을 보자면, 진가우만큼 강한 사람도 드물었다.

‘특출나게 강하고 우수하다는 게 언제나 생존에 유리하진 않아.’

진가우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내였다. 급변하는 제국의 모략 속에서도 교묘하게 살아남았다. 조금만 처세가 나빴어도 숙청 대상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마르티나 디바조차 지켜냈지.’

난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안다.

“전 소장님의 흉내를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존경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난 솔직하게 말했다.

진가우는 안경이 흘러내릴 정도로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흐음, 환자의 인격에 변화가 있다. 유의할 것.”

진가우는 음성 기록을 남기는 척하며 날 놀렸다.

“……진심입니다. 제가 소장님이었다면 마르티나를 지키지 못했을 겁니다. 항상 곁에 두고 싶었을 테니까요.”

“그야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해. 젊은이는 연인의 사랑을 직접 받아야만 갈망을 채울 수 있지. 하지만 수십 년, 백 년을 넘게 한 여자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네. 자넨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지. 끝이 없는 갈망은 사라지고, 헌신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어.”

나도 사랑의 일부가 헌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난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지젤을 향한 나의 갈망을 해소하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이다.

진가우의 사랑은 숙성을 거쳐 승화되었다. 질투, 소유욕, 집착을 내던지고 헌신이라는 결정체만 남긴 것이다. 참으로 드높은 감정이었다.

‘진가우는 자신의 능력으로 마르티나를 세상에 더 머물게 할 수 있는데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사랑을 해본 자라면 다 알겠지.

진가우의 정신은 고차원적인 영역에 있었다. 남들은 여전히 그를 괴짜라 생각할 거고, 나도 예전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진가우라는 사내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보았다.

“전 소장님처럼 연인을 멀리 두고 바라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게 이롭고 안전하다는 걸 알더라도요.”

진가우가 배를 잡으며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젊어서 그래. 자네 나이에 그게 될 리가 있나! 건방진 소리 하지 말게. 여전히 자넨 젊다 못해 아직 어려.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지. 내가 찾은 정답이 자네의 정답이 아닐 수도 있어. 아, 아아, 말이 너무 많았군. 이래선 안 돼. 정이 든단 말이지.”

진가우는 내려온 안경을 올리고 나선 손뼉을 크게 쳤다. 분위기를 환기한 그가 사무적인 어투로 내 상태를 설명했다.

“자네의 뇌 신경계 활성도는 지나치게 높아. 뻔한 처방이지만, 각성이 될 만한 자극을 줄이고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지 말게. 대도시보단 한적한 동네에서 사는 게 좋을 거야. 의체도 고출력은 삼가고 단순한 기능의 의체를 사용해. 제일 좋은 건 생체 팔다리지.”

“뻔하지만, 지키기 힘든 지침들이군요.”

“하지만 지킨다면 오래 살 순 있을 거야. 물론, 가끔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 한둘 쥐어패는 걸로 스트레스 해소를 해줘도 되네. 폭풍처럼만 살지 말라는 뜻이야.”

예컨대, ‘키누안’ 같은 인물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삑, 삐삐삑!

나의 뇌 지도에 급격한 변화가 일었다. 뇌의 온갖 부위가 빨갛게 변했고, 불꽃축제라도 일어난 듯이 번쩍번쩍 빛났다.

난 눈을 질끈 감으며 필사적으로 키누안에 대한 생각을 밀어냈다. 몇 분은 지나서야 각종 경고음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하면 오래 못 산다는 이야기죠?”

내가 멋쩍게 말했다. 진가우는 능청스레 웃었다.

“퇴원할 때 안정제 처방해줄 테니, 잊지 말고 가져가.”

“오늘 퇴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퇴원했다는 걸 사나흘만 숨겨주실 수 있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요.”

진가우는 내 머리에 덕지덕지 달린 전극을 하나씩 떼어냈다. 전극을 갈무리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해결할 일이 있나 보군. 아, 무슨 일인지는 내게 말하지 말게. 알고 싶지 않으니까. 이젠 자네도 내 방식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 * *

기잉, 깅.

나는 침대 밑에서 전투용 의체를 꺼내 몸에 달았다. 오른팔과 두 다리는 제국이 정비한 라줄리 21호. 왼팔은 근위대 사양의 의수였다.

철컥.

다른 장비 상자도 꺼내서 열었다. 그 안에는 반가운 무기들이 있었다.

크루시스와 루이나가 내 허리와 외투 안쪽에 걸리는 묵직한 감각이 참으로 좋았다.

‘정말 마지막이다, 루카.’

이제 약물 중독자들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전투 같은 극한의 자극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지루함을 느낀다.

원래 타고난 성향도 그러했고, 근위대는 내 공격성과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동기 생도 중에서도 내 공격성은 유별나게 강했다.

제국의 어둠과 음모, 키누안, 일레이, 무쉬르 알 카슈라, 보더시티…….

이런 사건들에 휘말리고 나면, 어지간한 일로는 흥분과 자극을 느끼기 힘들다.

전성기가 끝난 근위대원이 퇴역 후에 평생 폭력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도 똑같은 연유였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고자극에서 익숙해진 사람은 평범하게 살기 힘들다.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삶은 채도가 낮다 못해 색이 없는 흑백 사진처럼 밋밋하다.

‘나는 내 천성과 평생 싸워야겠지.’

난 바바라의 희생을 보았다. 바바라는 태생적으로 감정을 느끼는 사고 구조가 남들과 달랐다.

‘바바라가 날 구한 건 마음에서 우러나온 희생은 아니겠지. 아마 머리로만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긴 희생일 터.’

그만큼 바바라는 자신의 감정을 지젤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이 희생을 사랑의 숭고한 형태라 떠받드니, 본인은 와닿지 않더라도 지젤에게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을 택한 것이다.

‘태어나길 남들과 다를지라도…….’

바바라의 사고와 생각은 이제 와서 자세히 알 순 없다.

황제의 그림자를 해킹했던 바바라는 ‘재기불능’에 빠졌다. 뇌의 손상과 단백질 변성 때문에 유아 수준으로 퇴행했다고 한다.

‘……앞으로 지젤은 바바라를 평생 보살피겠지. 자신의 딸처럼 말이야.’

난 일레이와 진가우에게 부탁해 지젤의 면회를 거부했다. 지젤은 아직도 내가 혼수상태인 줄 알며 걱정하고 있다.

나도 당장 지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나는 진가우의 현명한 판단을 떠올렸다. 진가우처럼 수십 년은 그러기 힘들어도, 몇 달 정도는 지젤의 안전을 위해서 만나지 않을 수 있다.

‘키누안.’

저번 사태에서 키누안은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터벅, 터벅.

나는 하층 구역 거리를 걸었다.

아크바란은 지난 사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길거리에는 학살자 프란세크를 욕하는 그림과 글자가 빼곡했다.

프란세크의 탈을 쓴 일레이의 학살 명령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이 아크바란엔 수두룩했다.

“음모다! 이건 전부 음모라고! 프란세크 폐하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누군가가 검은 스프레이로 벽의 그림을 덧칠하며 소리를 질렀다.

“지랄 마! 새끼야! 그놈이 군대에 명령을 내리는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거리에서 드잡이질이 일었다.

아크바란의 분열은 수습되지 않았다. 누구나 납득할 만한 새로운 황제가 선출되어야 뭔가 중심이 잡힐 것이다.

‘황제 선출에는 일레이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겠지.’

일레이는 제국을 원하는 대로 꾸려갈 기초공사를 끝냈다. 그 기반으로 일레이는 제국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할 것이다.

‘이게 너의 선택이구나, 일레이.’

일레이의 삶도 이제부터다. 그는 비열한 위정자로 살아가길 택했다.

일레이와 내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보이는 것만 같다.

일레이와 나의 삶은 이리저리 얽히고 교차하다가 때론 같은 방향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히 갈라질 때가 왔다.

‘일레이를 더 가까이하면, 난 녀석을 증오하고 경멸하게 될 거야.’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일레이는 프란세크의 얼굴로 학살을 지시했다. 그 때문에, 난 의도적으로 학살 영상이나 소식을 피했다.

‘내가 옆에 있을 때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난 어떻게든 녀석의 학살을 저지했을 거다.’

일레이가 날 이반에게 보낸 이유 중 하나일 터다. 내가 곁에 있다면, 자신의 악성을 드러낼 때마다 거센 방해를 받았을 테니까.

난 친구이기에 일레이와 멀어질 생각이다.

‘아끼는 사람일수록 때론 거리를 둬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우린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제국의 황제도 전지전능하지 않았고, 괴인 무쉬르 알 카슈라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 위대한 헤일라스도 고작 주변을 지켜내는 것이 고작이었지.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적이 많을수록…… 소중한 존재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지키고자 했던 존재가 자신 때문에 더 위험해지는 상황에 빠진다.

지금까지 나는 키누안에게 거시적인 목표가 있을 거라 막연히 추측했다. 하지만 의외로 개인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의 키누안은 승천이니 뭐니 떠들어댔고, 한때 그는 황제의 친구이자 아키에스 도미니이기도 했다. 나아가 그의 행동 때문에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그 행적에는 원대한 목적이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키누안에게 거대한 목적이 있었다면, 이번 사태에 개입하지 않을 리가 없어. 특히 정신전이기로 회복했을 테니까, 머리가 예전보다 더 잘 돌았겠지.’

서서히 머리가 달아오르는군. 하지만 새것이라 그런지 사고가 깨끗하다. 잘 닦인 도로가 직진으로 쭉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저벅, 저벅.

나는 하루 종일 하층 구역을 거닐었다. 추억을 되새김질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키누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 수준이 엄청나게 차이 나진 않아. 보더시티에서는 간발의 차였지.’

난 키누안과 함께 방문했던 거리와 장소를 전부 찾아갔다.

‘분명히 키누안도 내 앞에서 실수한 게 있어. 없을 리가 없다. 우린 완벽한 존재가 아니야.’

지금까지 키누안의 행적에 무의미한 건 없었다. 전부 이유가 있다.

찾아내라, 루카. 과거의 조각을 끌어모아서 이리저리 배치해봐. 이상한 점이 있을 거다. 사소한 거 하나라도 좋아.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추억 찾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멋대로 움직이는 법이지.’

나는 암시장의 투기장을 방문했다. 지금은 아크바란의 혼란 때문인지 암시장의 활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투기장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키에스 빅티마 입문, 가브리엘과의 만남, 투기장 갱단과의 접촉.

키누안은 내게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쳐줬다. 약자는 교류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가브리엘은 내가 경멸하는 부류의 하층민이었어.’

그러나 그 인연으로 난 큰 도움을 받았다.

가브리엘은 전형적인 하층민 사내로 자기통제력이 약해 걸핏하면 약물에 손대고 제 성질을 못 이겨 번번이 사고도 치는 그런 놈이었으나…… 나에게만큼은 헌신적인 친구였다.

생각해보면, 소년기의 루카는 가브리엘에겐 정말 못되게 굴긴 했다. 그러나 사과할 생각은 없다. 자존심이 상하니까 말이다.

가브리엘과 그 일당을 만나면서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객관적으론 못난 놈들이지만, 이야기해보면 각자의 사정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길거리에서 적으로 만났다면 머리통을 터트렸겠지만 녀석들은…… 내 울타리로 들어왔다.

난 내 울타리에 있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본능이지만, 그전까진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내겐 약자를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굿보이.’

키누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스산한 추론이 뇌리에 맴돈다. 잠깐 눈을 감고 정리해보자.

빠득.

난 눈을 뜨며 이를 갈았다.

“염병.”

……난 양치기 개였다.

Join our Discord for the latest updates and novel requests - Click here!

Comment

0 0 votes
Article Rating
Subscribe
Notify of
guest
0 Comments
Oldest
Newest Most Voted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