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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47

347
탁.

일레이가 단말기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위잉.

단말기의 홀로그램 렌즈가 열리면서 빛이 격자형으로 떠올랐다.

격자형 빛이 촘촘하게 좁아지더니 이내 밀도가 높은 홀로그램 화면으로 변했다.

화면에는 사진 세 장이 나왔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세 장의 사진을 쳐다봤다.

세 장의 사진 중 하나는 익숙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려 했다.

‘과거를 빠르게 떠올리는 게 아직은 쉽지 않네.’

재생한 뇌는 예전과 묘하게 달랐다. 배치가 바뀐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내는 기분이었다.

내 뇌를 치료한 방식은 획기적이다.

망가진 뇌를 토대로 온전한 뇌를 추론 설계하고, 그 설계에 맞게 과증식한 뇌를 깎고 신경계를 연결해 조형한 것에 가깝다.

아무리 정교한 기술이 덧대어져도, 뇌의 구조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러나 자아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지.’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금의 나도 나다. 정신전이기의 정신 각인 덕분이다.

“……일레이, 너 프란세크의 뇌로 살아갈 수 있겠어?”

난 기억을 상기하다가 다른 질문을 했다.

나는 자신의 뇌를 재생했는데도 다소의 이질감이 있었다. 타인의 뇌는 더욱 이물감이 클 것이다.

‘일레이는 프란세크의 뇌에 완전히 적응해 이물감이 없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정신전이기를 사용해보니 알겠다. 아무리 비슷하게 꾸며놔도 다른 집으로 이사를 온 느낌이었다.

“루카, 난 너보다 인간적 감수성이 둔감해. 제국에 어울리는 인재이고, 흔히 말해서 전신의체든 레기온이든 잘 버티는 부류지. 무엇보다 네가 날 변함없이 일레이 카르티카라고 인식해준다면…… 자아의 붕괴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보다 원래 하던 이야기나 하자고.”

나는 홀로그램 사진 중 하나를 손으로 짚었다.

“이건 노엘 뮬리즈카의 기억에서 본 적이 있다. 기괴한 유기체 함대로군.”

노엘 뮬리즈카는 제국의 존속을 위협하는 외적 함대를 보고 나서야 황제와 협력했다.

난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여전히 살점으로 이뤄진 듯한 함선의 외형은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이 ‘외적’의 정체는 아직 아무도 몰라. 하지만 삼국은 이 외적을 피해 노바스 행성이 있는 나이거 행성계로 도망쳤지. 기록을 보면 그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았던 것 같아.”

“나머지 사진은?”

다른 사진도 우주를 떠도는 함선을 촬영한 것이다. 다만 생김새가 달랐다.

두 번째 사진의 함선 외향은 칼날을 형상화한 듯이 쭉 뻗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주변에는 시커먼 에너지가 너울너울 흘렀다. 마치 신이 벼려낸 우주의 칼날 같았다.

“이건 과거에 코라 측의 사제가 관측한 외적의 사진이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만들어낸 심판의 칼 같지. 경외심이 들 정도야. 웃긴 건 신앙심이 옅은 코라인이 관측한 외적은 피와 살점으로 이뤄진 함대였어. 대체로 인간이 관측한 외적의 모습은 인류의 문화적 기억과 보편적 상징에 따른 지옥의 군대를 연상케 하지.”

“관측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는 건가?”

“아마도 인지왜곡장막을 함선 단위로 펼친 걸 거야. 싸우기 전부터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이야. 외적을 직접 관측한 인간의 편도체는 비정상적으로 과활성화돼. 심약한 사람의 경우에는 미쳐버릴 정도로 말이야.”

“이건 물리적 사진이잖아. 그러면 인지왜곡이 생겨도 장비에는 똑바로 찍혀야 하지 않아?”

말하고도 나는 아차 싶었다. 일레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바보야? 인지왜곡 현상이 기계에도 영향을 주는 건 너도 경험했잖아. 재활을 더 해야겠네.”

포스 능력으로 인한 인지왜곡은 사이버네틱 의안이나 감시장비도 속였다.

나는 떨떠름하게 마지막 사진을 보았다. 이건 어떤 상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계금속으로 된 함선의 일부가 보였다. 표면에는 기계가 얽혔는데도 이음새가 흐릿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고도로 정제된 기술력의 결정체였다.

‘정체불명인 건 마찬가지지만, 두렵거나 불쾌감이 들진 않아.’

나는 사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외적의 모습인 건가?”

“아마 이게 가장 현실에 가까운 객관적인 모습일 거야. 이 사진의 관측자는 무쉬르 알 카슈라니까. 놈은 생물의 범주에서 벗어난 괴인이었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어떤 의미로는 무결한 정신을 가진 자였지.”

“이건 카슈라가 베른에서 관측한 사진인 건가?”

일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모델링한 기억의 도서관에서 책을 정확하게 꺼내 짚어냈다. 나와 무쉬르 알 카슈라는 나이거 행성계 외곽까지 간 적이 있었다.

11번째 행성 베른, 베른은 우리가 거주하는 나이거 행성계의 최외곽 행성이다.

‘카슈라는 즐겁다는 듯이 지적 호기심을 발휘하며 베른 행성을 관측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는 당연히 외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나아가 외적은 그의 주요 연구 대상 중 하나였겠지.

베른에서 외적의 일부가 관측됐다. 섬뜩한 사실이었다.

“……인류는 외적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군.”

“하지만 놈들은 나이거 행성계 내부로 진입하진 못하고 있어. 아니,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는 알 순 없지만…… 당장은 안전해. 하지만 이 안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라. 놈들의 접근이 우리 살아생전이 아니라 수 세기 이후일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 대비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 놈들이 움직이고 나면 늦어.”

노엘 뮬리즈카 시대에서 시작된 인류의 도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네. 다른 국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이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고?”

“그게 인류의 속성이니까. 우린 어리석고 추악해.”

일레이가 탁한 눈동자로 단언했다. 일레이의 인간성은 쉬이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일레이가 생각하는 인간의 기준은 한없이 낮으니까.’

기대하지 않기에 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기준도 낮다.

일레이는 비인간적인 짓을 보고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는 통곡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 자조하겠지.

하지만 정말 웃긴 일이다.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제국의 안녕과 신민의 안전을 가장 챙기고 지키는 사람이 일레이 카르티카다. 자신까지 희생하면서 말이다.

‘일레이는 제국의 미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일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업이다.

나는 희로애락을 강렬히 느끼고 감정적 형벌에도 취약하다. 나 같은 놈은 견뎌내지 못할 책임과 임무를 일레이는 수행하고 있다.

일레이는 노엘 뮬리즈카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제국은 강해져야 한다. 사소한 비극과 불만을 무시하면서 국력을 키우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판단이었다.

“네가 그렇게 제국을 사랑하는 줄이야. 엄청난 애국자를 내가 몰라봤네.”

일레이가 피식 웃었다. 딱딱한 분위기가 단번에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애국자? 농담 마. 그런 게 아니야. 루카, 이 우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이한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더라고.”

일레이는 양손을 펼치더니 천칭처럼 높낮이를 맞췄다.

“기이한 존재?”

“흔히 ‘신’이라 부르는 초월적 존재 말이야. 아, 이건 반제국적인 발언이긴 하네.”

“네가 불온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일레이의 불온함에 물든 사람이다.

“그래서 생각하며 공부했어.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거든. ‘파스칼의 내기’를 알아? 아, 대답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네가 모를 걸 알고 묻는 거야.”

일레이가 히쭉히쭉 웃었다.

음,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이 새끼는 생도 시절부터 짜증 나는 놈이었지.

일레이는 설명을 이어갔다.

“쉽게 말해, 사후세계와 신을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거지. 믿어야 본전이니까. 사후세계가 없으면 그만인 거고,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생전에 믿고 대비한 만큼 이득을 보는 거니까.”

내가 머리를 갸웃했다.

“그게 지금의 너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의문이 생겨 여러 종교에 대해 찾아봤어. 코라의 디셈교도 포함해서 말이야. 이를 종합해서 내가 죽었을 때 갈 확률이 높은 보편적인 사후세계를 전제해봤지. 일단 중요한 건 선행과 악행의 균형이자 ‘업’이었어.”

난 눈을 크게 떴다. 일레이의 접근 방식이 괴악했다.

일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선악의 보편성은 지역과 시대마다 달라져. 그러나 대체로 생명을 구하는 걸 숭고한 절대선으로 여기지. 루카, 난 죽인 사람보다 살린 사람이 더 많아.”

일레이가 천칭을 기울이듯 오른손을 아래로 내렸다.

“……미친 거냐?”

내가 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릴리안 라모네스는 지옥에 떨어지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난 지옥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떨어질 만한 일을 수없이 했지. 이 악행을 상쇄하려면 제국 신민 전체 정돈 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일레이의 미소가 서늘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서 릴리안 라모네스가 있는 사후세계로 가고 싶다는 거로군.”

“사후세계가 있다면 말이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난 릴리안 비슷한 정도의 선한 사람으로 죽을 거야. 너무 숭고해서도 안 돼. 릴리안이…… 그렇게 성녀는 아니었잖아.”

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 감정의 색깔은 또렷하다. 질척이는 푸른색 물감이 벽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다. 우린 이 감정을 슬픔이라고 부른다.

“그럼 왜 날 구하기 위해 카슈라와 마주한 거지? 그건 제국을 구하는 게 아니잖아.”

“널 구하는 건, 내게 있어서 지옥으로 떨어져도 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감동보다는 일레이의 집착이 느껴졌다. 녀석은 이반 이상으로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

단순한 우정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 한 여인이 떠오른다.

‘릴리안 라모네스.’

그녀의 최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난 토할 것 같았다. 그 장면이 잔인해서가 아니다.

내 표정을 본 일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입으로 미소를 지었으나 눈썹은 안쓰럽게 휘었다.

“난 릴리안을 쏘면서까지 널 구했어. 넌 릴리안만큼이나 가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그러지 않으면 안 돼. 이해했어?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루카.”

어긋난 논리의 종착지로군.

난 일레이가 역겹고도 불쌍했다. 녀석이 그간 내게 보여준 커다란 우정과 헌신은 강박의 일종이었다.

일레이가 릴리안을 쏜 판단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루카는 ‘릴리안만큼 소중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전부 죽는 게 일레이에겐 더 나았을 테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일레이는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건 릴리안이 남긴 저주다. 그리고 일레이가 여전히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적어도 릴리안의 저주가 남아있는 이상, 일레이는 기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든 제국이든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넌 그냥 행복하게 살아. 그러면 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일레이가 손을 뻗어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일레이의 우정이 강박일지라도, 나의 우정은 강박이 아니다.

“뭐, 노력해보지.”

나는 일레이의 악수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위해 행복하게 사는 척이라도 해보자. 지젤도 그 편을 바랄 거고.

그러나 딱 한 가지, 마지막 일은 끝내야 한다.

……스승을 넘어서는 건 제자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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