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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짧지만, 사고는 길다.
나는 생각을 이어가면서 시간을 길게 늘어뜨렸다.
대부분의 생물은 ‘중심’으로 갈수록 뜨거워지는 법이다.
뭐, 내가 모든 외계생물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은 그러했다.
우리의 중심은 심장이다. 심장은 피를 머금고 내뱉으며 맥동한다.
그러나 제국은 다르다.
변두리에서 아크바란으로, 아크바란에서도 상층 구역으로, 그 중심인 황궁은 한없이 서늘하면 정적이다.
제국은 중심으로 갈수록 더 차가워진다. 그리고 이가 시릴 정도로 냉엄한 족속들이 제국의 심장에 살고 있다.
기계들이 노니는 황궁에선 늘 한기가 돈다. 피와 살로 이뤄진 가슴과 목구멍으로 호흡을 내뱉으면 입김이 너울거렸다.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참혹한 기계의 궁전이다.
프란세크를 떠올려 보자. 그는 황실에서도 온실에서 자란 화초다.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바르게 자랐기에 그는 바깥의 어둠과 시림을 견뎌내지 못했지.
내가 본 황족들은 달빛을 양식으로 삼고, 녹지 않는 서리를 맞으며, 푸르죽죽한 어둠을 걷는 자들이다.
‘황제, 이반 크라치아.’
나는 이반을 응시했다. 그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기울인 머리를 따라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이반의 의체는 미동이 없다. 그는 감정의 신호를 일체 차단한 채로 완벽한 기계가 되었다. 사소한 습관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반은 유일한 감정 표현 수단인 ‘말’조차 삼가고 있다.
여기서 침묵하는 이반을 관찰해 통찰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겐 타인의 사고를 읽어내는 초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단서와 흔적으로 추론할 뿐이다.
‘현재의 단서가 없으니…….’
과거와 경험으로부터 이반의 내면을 추측해야 한다. 나는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첫 대면에서 내가 본 이반은 불안정한 소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차가운 어둠을 모유처럼 삼키며 자라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혈육들을 믿지 못했고 아버지조차 의심했다.
‘의심이 많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지. 아버지인 선황 유리 크라치아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도 선대 황제 유리 크라치아는 이반의 뇌에 쐐기처럼 박혔다.
‘황실에서 이반이 느꼈을 감정과 사고를 따라가라, 루카.’
내 경험과 기억으로 이반의 삶을 재구성하자.
츠즈즈즈.
머리가 뜨겁다. 신경계가 타들어 갈 것만 같다.
‘선대 황제 유리 크라치아와 아키에스 도미니 키누안은 무척이나 절친한 사이처럼 보였지.’
이반이 유일하게 가까이서 본 신뢰 관계였을 것이다.
역대 아키에스 도미니가 전부 황제와 가까웠는지 알 순 없으나 키누안은 확실히 ‘황제의 친구’처럼 보였다.
아키에스 도미니는 황제의 또 다른 시야이자 사고방식이었다. 일종의 분신이기도 했다.
‘이반은 날 통해 가지지 못한 유대를 꿈꿨다.’
아마도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이반이 처음으로 가지는 온전한 ‘소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 존재를 알고선 그토록 기뻐하며 개인적으로 접근한 거다. 생일 선물이나 다름없었겠지.’
제국에선 고위층일수록 가족과 친구에게조차 내면을 터놓지 못한다. 제국이란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이뤄진 독재 국가니까 말이다. 여기서 인간성을 드러내면 곧 그게 약점이 된다.
하물며 제국의 정점에 선 황제가 자신의 내면과 약점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제국은 황제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바라지 않으며, 제국 신민은 황제가 신성하고도 무결한 초인이길 바란다.
‘나는 선대 황제 유리 크라치아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사내도 결국은 인간이며 종종 외로움을 느끼곤 했겠지.’
아키에스 도미니, 키누안은 타인의 유약한 마음을 잘 파고든다. 그는 황제의 하나뿐인 친구가 될 수 있었겠지.
다시 말하지만, 황제와 아키에스 도미니는 이반이 본 유일한 신뢰 관계일 것이다.
‘그 때문에 생긴 소유욕과 집착.’
그리고, 나는 내가 키누안과 다르다는 걸 폭풍기에서 증명했다. 루카는 키누안처럼 호의를 비수로 되돌려주지 않는다.
‘내 인간성의 증명 덕분에 난 아직 살아있는 거지.’
내가 키누안 같은 자였다면 진작 죽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반이 날 제거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검문대가 폭발하거나 내부에서 유독한 가스가 나왔을 터다.
‘나는 끝끝내 선을 넘지 않기에 이반은 날 죽이지 않았다.’
낯 뜨거운 말이지만, 대개 내가 선을 넘을 땐 타인을 위해서다. 그리고 지금도 일레이를 위해 나는 여기에 왔다.
‘황제 시해라는 선을 넘기 위해서.’
난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떨었다. 신경계가 과도하게 예민해진 탓인지 감정 신호를 전부 숨기기 힘들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경험과 과거로부터 이반의 내면을 추론하며 읽어냈다.
여기까지 상황이 이르러서도 이반은 내게 ‘호의’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내게 기회를 주고 있다.
이반의 호의가 나를 불안케 한다.
“……다들 물러나도 돼. 나의 아키에스 도미니가 돌아온 것 같으니까.”
이반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철컹.
그림자들은 자아가 없다. 그들은 마음이 없는 기계다.
‘사람’이라면 이반의 명령에 머뭇거렸을 터지만, 그림자들은 군더더기 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천천히 방에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날 압박하던 ‘폭력’이 사라졌다.
그러나 내 ‘폭력’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난 완전무장한 상태다. 여기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반을 제압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
‘……안 돼, 이러지 마.’
절규를 내지르고 싶었다.
“나는 널 알아, 루카.”
이반이 일어섰다.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취할 것 같은 단내가 가까워졌다.
우뚝.
이반은 앉아있는 내 앞에 섰다. 아무런 경계도 없었다.
사람의 복잡한 감정을 상징하듯, 다양한 빛이 뒤섞인 이채의 눈동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이반은 날 경계해야 한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증오의 말을 내뱉고, 시커멓게 변질된 감정으로 날 대해야 해. 끝끝내 자신에게 벗어나려는 나를 죽이려고…….’
그러나 이반은 날 믿고서는 모든 보호를 내려놓았다. 그는 무방비하게 내 앞에 섰다.
절망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일레이가 모든 걸 버리고 날 구하러 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난 일레이를 배신하지 못한다.
이번엔 이반이 자신의 모든 걸 내 선택에 맡겼다. 내 손아귀에 자신의 운명을 슬며시 건넨 것이다.
호의로 다가온 이의 심장을 어찌 내가 부순단 말인가?
두통 때문에 토할 것만 같다. 머릿속의 실타래가 꼬이다 못해 누가 잡아당겨 묶는 것 같다. 뇌의 주름이 빳빳하게 펴지다 못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다.
‘이반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하나다.
이반이 여전히 내게 호의를 품고 다가왔다는 것.
“네 선택이 나의 죽음이라면 기꺼이 따르마. 이건 나의 증명이다. 널 단순한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야.”
“……당신은 내 목에 폭탄을 걸었습니다.”
내가 안간힘을 쓰듯이 적의를 짜냈다.
“그래서?”
이반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 또한 당신의 계략이죠. 제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전 속지 않습니다, 이반.”
“네가 뭐라 하든 난 널 믿기로 선택했고 주사위를 던졌다. 남은 건 하늘에 맡길 따름이지. 이 우주가 내게 통치자의 숙명을 부여했다면, 내 수족이 될 친구도 주리라 믿어.”
참으로 위기로구나, 루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반이 차라리 날 짓눌러 죽이려고 하면 좋겠다. 집착과 소유욕을 드러내면 얼마나 좋을까?
최고는 적의와 살의다. 그건 대응이 편하다. 타고난 폭력에 내 자아의 일시적으로 의탁하면 되니까.
……그러나 이반은 내 약점을 파고들었다.
난 끝없이 생각해야 했다. 인과와 상황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 회유 너머의 의도와 음모를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이대로 이반을 죽이려면, 지금까지의 날 이끌어오고 버티게 해준 행동 원리를 파괴해야 한다.
……그러면 난 키누안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 내가 키누안과 다른 이유는 딱 하나다.
‘불순물.’
내 안의 알량한 불순물을 제거하면, 일레이와 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지금이라도 이반을 제압하고 놈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면 된다.
‘그리고?’
난 일레이 앞에 이반을 데려가서 처형할 것인가?
주르륵.
내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눈에서도 피가 흐른다. 목구멍에도 비린 쇠 맛이 왈칵 올라오고 있었다.
뇌만이 아니라 생체 전체가 과부하에 걸렸다. 정신적 압박 때문에 신체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머리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면서 뇌로 피를 전달한다.
심장은 터지기 직전처럼 쾅쾅 뛰고 있다. 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이다.
뚝, 뚝.
내 얼굴에서 흐른 피가 턱에서 모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러니 내가 널 저버릴 수가 없지.”
이반이 낮게 웃었다. 그는 요염과 교태도 부리지 않고 내 선택을 기다렸다.
루카, 지금 넌 그 어떤 총칼보다 위험한 무기와 맞닥뜨렸다. 너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을 베어낼 무기지.
……이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이반을 적대할 수 있어야 한다. 놈을 적대하기 위해 모든 단서를 끌어모아라. 모순을 찾아내고 계략을 간파해.
‘이반은 친구를 얻고 싶다 말했다.’
과거를 되짚어보자. 이반 크라치아는 중성적, 아니, 사실은 여성의 모습으로 내게 자주 다가왔다. 때론 날 유혹하는 듯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의 이반은 묘하게 ‘남성’, ‘황제’, ‘친구’의 모습을 강조했다. 마치 연인의 지위를 노리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치직.
머리가 찢어질 것 같다. 뭔가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난다.
‘지젤 쿠스토리아.’
나는 눈을 감았다. 지젤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 내 안의 연인은 지젤밖에 없다. 생존 사실조차 알았으니 확고부동하다.
‘만일, 이반이 여자에 가까운 모습이거나 연인스러운 분위기로 내게 접근했다면…….’
……난 큰 거부감을 느꼈을 터다. 여기서 타협하더라도, 훗날 이반이 지젤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삼각관계스러운 상황에서는 난 지젤을 위해 이반을 기꺼이 적대했을 것이다.
‘이반은 그 미묘한 상황과 위험을 귀신처럼 피해나갔다. 지젤의 복귀를 알고 있다는 거지.’
힘겹게 첫 번째 조각을 짜냈구나, 루카. 자랑스럽다.
‘이반은 나와 지젤이 다시 만났다는 걸 알고 있어.’
……다음 질문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크레시아 제국의 첩보 자원은 예전 같지 않다. 하물며 이반이 지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진작 지젤을 인질로 잡아 날 회유했을 터다.
제국이 나와 지젤의 거처를 어떻게든 알아냈다면 우린 보름 남짓한 평온을 만끽하지도 못했겠지.
츠즈즈.
새로운 조각이 늪에서 떠올랐다. 연달아 단서가 이어진다.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 난 이걸 언제나 전제하고 있었지.
‘……일레이는 날 배신하고 속인다.’
일레이와 이반은 내통 관계다. 지젤과 내가 만났다는 정보는 일레이를 통해 이반에게 흘러갔다.
흠, 참으로 구역질 나는군.
그러나 일레이는 날 배신하더라도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없다.
이건 결국 내 생존을 위한 계략과 음모였다.
날 황궁에 던져놓더라도 이반이 날 놓아줄 거란 보장이 있었던 거다, 염병할.
“이반.”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솔직히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정했나 보군.”
“정신전이기로 당신에게 깃든 선대 폐하의 정신을 빼내겠습니다.”
이반은 가만히 날 보았다. 그는 감정을 드러나지 않았지만 ‘예상외’라는 듯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대답의 지연만이 지금의 이반에게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단서다.
‘정신전이기를 이반에게 사용하면 일레이는 영영 본체로 돌아가지 못한다. 일레이 때문이라도 내가 정신전이기 사용을 미루면서 망설일 거라 생각하겠지. 내 서슴없는 제안에 이반은 놀란 거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거짓말만…….’
최악이로군, 정말!
지금 이반의 머릿속에 선대 황제는 없을 터다. 이미 이반은 정신전이기를 사용해 선대 황제를 빼냈다. 일레이는 저장소 개수조차 거짓으로 말했다.
일레이는 오랜 대립 끝에 충심을 증명했다. 이반에게 난 필요 없는 존재다.
이반이 원하는 건 ‘루카’가 아니다. ‘아키에스 도미니’이지.
난 이반이 뭐라 말하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아키에스 도미니는 일레이 카르티카겠죠, 폐하.”
전형적인 제국의 수법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