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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41

341
나는 하층 구역의 무질서한 건축물 사이에 서 있다.

이리저리 얽힌 콘크리트와 철판 사이로 상층 구역의 편린이 보였다.

말끔하게 솟은 상층 구역의 건축물은 정갈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첨탑은 자로 잰 듯이 뾰족했다.

“후우.”

난 숨을 골랐다.

‘난 이반 크라치아와 마주해야 한다.’

이반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하물며 그의 머릿속에는 선대 황제의 의식조차 있었다.

‘이 내전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내려면 이반을 치는 수밖에 없어.’

사실 다른 방도가 있긴 하다. 내가 일레이를 제압하거나 죽이면 된다. 따지고 보면, 더 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레이는 누가 뭐래도 내 친구다. 나를 수없이 속여댄 망할 새끼지만…… 녀석은 날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걸었었다.

‘네 꿈이 공화국이라면…….’

난 일레이의 꿈을 도와주고 싶었다. 녀석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말이다.

벨라토시티의 안락한 침대에서 일레이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난 평생 후회하며 살 것이다.

‘일레이 카르티카, 너도 참으로 애증의 존재로구나.’

일레이는 나를 위해서 우주를 가로질렀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품고 있던 혁명까지 내던지면서까지 내 목숨을 우선했다.

내가 어찌 일레이를 진심으로 미워하고 증오하겠는가?

지젤이 나의 일부이듯, 날 구성하는 일부는 일레이에게서 온 것이다. 녀석의 영향으로 난 제국의 군인에서 탈선했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일부가 되기도 하지.’

릴리안 라모네스도 일레이의 일부였다.

릴리안이 없었다면, 일레이는 다른 제국의 귀족처럼 좁은 시야로 살아갔으리라.

우린 자신의 일부를 잃을 때 분노하고 슬퍼하며 좌절한다. 대개 가족, 친구, 연인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나’란 색은 외부와 내부의 물감이 뒤섞여 만들어진다. 오롯이 내부에서 형성된 자아의 색이란 없다. 타인에게 물들고, 타인을 물들이기도 한다.

츠즈즈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간담이 서늘하다.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이다.

‘키누안.’

키누안도 내 일부다.

나를 구성하는 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다. 부정적 면 또한 나의 일부다.

스륵.

난 뒤를 돌아봤다.

어쩐지 키누안이 나올 찰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언제나 허를 찌르듯 나타나곤 했다. 지금 같은 순간에 말이다.

‘없다.’

주변을 살펴봐도 키누안이나 미행의 흔적은 없었다.

‘쯧, 피해망상이구나, 루카.’

난 계속 키누안을 경계하고 있다.

놈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주변 상황과 모든 정황에 키누안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이것 또한 아케이스 빅티마로 인한 편집증이겠지.’

불안이 날 미치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키누안이 눈앞에 나타나면 이런 고문이 끝날 것이다.

망상은 증식하듯 커지고 있었다.

‘현실에 좀 집중해! 지금은 이반과 마주할 시간이다. 여기에 없는 존재의 허상에 사고를 낭비하지 마.’

난 눈을 질끈 감으며 의식을 바로잡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키누안이 환각으로 나타날 터다.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다.

짝!

난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 쳤다. 의수라서 뺨이 저릿했고, 입안이 터지는 통각이 날 현실로 잡아끌었다.

좋아, 정신이 번쩍 드는군.

나는 상층 구역으로 곧장 향했다.

* * *

난 상층 구역의 검문소에서 줄을 서며 기다렸다.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상층 구역답게 귀족과 장교들이 검문소를 오가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공중차량으로 벽을 넘었을 고위층도 지금은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이 빌어먹을 내전은 언제 끝나는 거지? 난 누가 이기든 상관…….”

“쉿, 쉿. 조용히 해. 불경한 말을 지껄였다가 붙잡히고 싶어?”

“어차피 양쪽 전부 건국의 혈통이잖아.”

“멍청한 소리 지껄이지 마.”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검문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조차 그들에겐 수치스러운 고역이다.

삑.

난 앞쪽을 쳐다봤다. 검문대 상단에 달린 등이 빛났다. 초록빛이 나오면 통과였다.

“으, 묘하게 불쾌하단 말이지. 속이 울렁거려.”

검문을 통과한 귀족이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먼저 통과해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다.

“저역투시가 뇌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과학적으로 밝혀졌어. 전부 플라시보라고.”

“내가 과민반응이라는 거야? 진짜로 울렁거린다고.”

“됐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전신의체가 일상인 제국의 귀족들은 생김새만으론 확실한 신원 확인이 어렵다.

평소에는 단말기 정보나 등록된 의체의 외형을 확인하는 걸로도 충분하지만, 지금은 생체 인증 정보까지 검문대에서 열람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치익.

난 헬멧을 벗으며 검문대에 섰다. 검문대 근처에 있던 군인 중 하나가 날 보더니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위이이잉.

격자형 레이저가 사방에서 나오면서 날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삐이이이이이!

불쾌한 경고음이 울렸고, 검문대 하부의 금속판이 네 방향에서 빠르게 올라왔다.

철컹! 쾅!

올라온 금속판은 순식간에 날 가두었고, 검문대는 감금실이 되었다.

방음 처리도 잘 됐는지 외부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떴다.

적색 간접 조명이 보였다. 꽉 닫힌 검문대 내부는 붉은빛으로 적적하게 젖어있었다.

위잉.

홀로그램 화면이 앞쪽에 떠올랐다. 얼굴 없는 목소리의 파형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다가 곧 출렁였다.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루카.

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일레이의 수급을 가져왔습니다. 저역투시로 저와 일레이의 생체 정보를 확인하셨겠죠.”

나는 가방에 든 일레이 본체의 머리를 꺼내며 말했다.

-넌 이미 날 한번 배신했어. 멋대로 내 구속을 해제했지.

“아키에스 도미니의 가치는 목줄을 차지 않고 자의로 활동하기에 의미가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당신과 똑같은 시선과 생각으로 움직인다면 아키에스 도미니가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죠. 의지가 없는 그림자만으로도 당신을 보필하기에 충분할 테니까요.”

솔직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다. 이반이 이딴 궤변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었다면, 그는 진작 꼭두각시 황제가 되었을 터다.

-하하, 말은 잘하는군. 내가 여기서 널 죽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5초, 아니, 3초 안에 말해봐.

나는 이반이 숫자를 세기도 전에 말을 내뱉었다.

“임무를 마쳤습니다. 정신전이기를 회수했고 사용법도 알아냈죠.”

-훌륭해, 루카. 아키에스 도미니로서의 마지막 임무를 잘 수행했군. 네 선물은 유산으로 생각하고 받아두지.

“정신전이기 조작에 실패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간에요.”

내가 덤덤히 말했다.

통신 너머로 침묵이 일었다. 목소리의 파형은 찔끔찔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3초가 지났군요.”

파형이 길게 출렁거렸다.

-제국의 품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하해와 같은 은혜로군요. 감사합니다, 이반.”

난 목, 허리, 무릎을 차례대로 가벼이 숙여 예를 갖췄다.

* * *

난 검문대에 갇힌 채로 어디론가 이송됐다.

쿠웅, 쿵.

외부에서 검문대를 통째로 들어서 옮기는 중인지 간혹 덜컹거리거나 균형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나는 벽에 기댄 채로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진 계획대로다.’

난 정신전이기 사용을 명분으로 이반과 마주할 것이다.

‘이제 내 목숨은 일레이에게 달렸다.’

일레이의 첩자는 상층 구역 전반을 넘어서 황궁까지 침투해 있다.

일레이는 십 년간 꾸준히 심어둔 첩보 자원을 이번에 싸그리 꺼낼 계획이었다.

‘내가 이반을 제압해 확보하면, 탈출 경로와 조력자는 일레이가 만들어줄 거야.’

계획을 정리하던 나는 키누안이 개입하는 상황을 자꾸만 전제했다.

‘키누안은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혼란을 만들겠지. 늘 그러했듯, 흐름이 얽히는 지점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생각하는 사이에 검문대의 이동이 멈췄다.

치이이익.

잠금이 풀리면서 벽 역할을 하던 금속판이 차례대로 눕듯이 내려앉았다.

처억, 척.

날 둘러싼 ‘황제의 그림자’들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 숫자는 넷이었다.

네 명의 그림자는 시커먼 망토와 외투로 몸 전체를 가린 채로 두건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두건 아래로는 안드로이드와 같은 얼굴 형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난 동공만 움직여 주변을 관찰했다.

일이백 명은 족히 들어설 수 있는 넓은 방은 가구 하나 없이 공허했다.

천장과 벽 경계의 테두리는 황금색이었고, 아크레시아의 상징이 그려진 붉은 휘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내려와 있었다.

‘여긴 아마도 황궁 어딘가겠지.’

창문조차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려웠다. 부디 일레이의 첩자들이 날 찾아내길 바란다.

따각, 따각.

대리석을 울리는 발소리가 그림자들 뒤에서 들렸다.

“사실은 널 다시 보게 된다면 바로 죽이려 했어. 직접 보면 마음이 약해지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지.”

이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여기저기 부딪히며 울렸다.

‘황제의 그림자는 넷. 저들을 강제로 뚫는 건 불가능하다.’

그림자들은 근위대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병기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넷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앉아, 루카. 네 제안을 들어볼 생각이니까.”

이반이 손가락을 튕겼다.

기이잉.

내 등 뒤의 바닥이 열리면서 의자가 떠올랐다.

철컹, 철컹.

네 명의 그림자도 움직였다. 둘은 내 뒤에 섰고, 나머지 둘은 이반의 뒤에 섰다.

‘거리도 꽤 멀군.’

이반과 나 사이에는 삼십여 미터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이반의 모습이 드디어 눈으로 보였다. 그는 대외용 청년 의체가 아니라 중성적인 외모의 가변의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몸의 굴곡을 보니 아직은 남성형인 듯했다. 하지만 그 외모는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우웅.

이반의 뒤에서도 바닥이 열리며 고풍스러운 의자가 올라왔다.

나와 이반은 각자의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푹신했다. 가방 때문에 등을 기대지 못하더라도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법이야. 내가 홀릴 정도로 그윽한 향을 품은 독을 여기서 내밀 줄은 몰랐어. 독인 걸 알면서도 들이킬 수밖에 없네.”

난 호흡을 살짝 내뱉으며 기계적인 어조로 말했다.

“전 정신전이기와 그 사용법을 대가로 자유를 얻고 싶습니다. 당신도 제게 약속하셨죠. 유물을 회수하는 게 제 마지막 임무라고요.”

“약속을 깬 건 너야. 만일, 내 구속을 네가 아직 받고 있다면 그 말을 믿었겠지.”

“임무 중에 일어난 불상사입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죠.”

이반은 키득키득 웃었다. 이채를 띤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며 빛났다.

“너는 내가 품고 있는 호의를 잘 알고 있지. 그걸 믿고 여기까지 왔을 거야. 하지만 루카, 너는 날 우습게 보고 있어. 내 유약한 태도가 널 건방지게 만든 거긴 해.”

이반이 곱디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프란세크도 그렇고 이반도 마찬가지인데, 황족의 의체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 표현조차 경건하고 신성스럽게 느껴진다.

이반이 달콤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든 채로 눈만 게슴츠레하게 뜨고선 날 내려다보듯 응시했다.

퉁.

이반이 의자의 손받침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기이이잉, 깅, 철컹.

기계음이 커졌다. 우리 왼편의 바닥이 크게 열리더니 복잡한 기계장치가 올라왔다.

기계장치 중간에는 정신전이기가 딱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저장소 없이 정신전이기를 사용하려고 만든 기계장치.’

정신전이기를 해킹하듯 강제로 사용하는 것이다. 저 불완전한 사용 때문에 이반의 정신은 선대 황제와 뒤섞인 상태였다.

“제국의 과학자들이 그간 놀고 있었던 것 같아? 아버지가 사용했을 때보다 더 업그레이드됐어. 정신전이기만 있으면 돼. 다른 사용법 따윈 필요가 없지.”

나는 가만히 기계장치를 응시했다. 웃을 것도 없고 찡그릴 것도 없다.

내 마음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급박한 상황이지만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동요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제 목을 베시면 됩니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죠.”

내가 무심히 말했다.

지금 내게 있는 감정이라곤 지젤에 대한 마음뿐이었다. 혹여나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녀에게만 미안할 따름이다.

……적막이다.

그림자에겐 미동이 없었기에 티끌만 한 소음도 없었다. 저기 앉아있는 이반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기계처럼 날 보고 있다.

이 자리에서 움직이는 거라곤 내 심장 하나뿐이고, 흐르는 건 내 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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