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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37

337
아케인 유물, 정신전이기. 원래 아크레시아 제국 소유의 유물이다.

이반의 말에 의하면, 제국은 정신전이기를 연구해 ‘브레인 백업’이라는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

‘제국 신민 전체가 브레인 백업을 통해 불로불사의 삶을 누린다는 계획.’

솔직히 현실감도 없고 정신 나간 계획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래에 브레인 백업 시스템이 완성된다면, 불로불사의 제국민은 행복할까? 내 생각에는 지금보다 더 뒤틀린 사회가 될 것이다.

나는 잡념을 걷어내며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속에서 헬멧 형태의 정신전이기를 보았다.

일레이가 시범을 보이듯 헬멧 뒷덜미에 손을 올렸다.

위이잉.

뇌 주름과도 같은 회로가 더 환하게 빛났다.

일레이는 푸른빛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국도 정신전이기 사용법을 완전히 알지 못했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정신전이기에는 저장소가 없었거든. ‘영혼’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근원적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저장소 말이지.”

일레이가 손바닥을 펼쳤다. 홀로그램 격자가 빛나더니 새로운 물체가 그의 손바닥에 떠올랐다.

‘또 다른 유물.’

새로운 유물은 일종의 칩이었다. 세모꼴 칩에선 푸른빛이 심장박동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그게 저장소인 건가?”

“키누안이 구한 거야. 정신전이기가 없으면 그저 빛나는 장신구처럼 보이지. 코라의 고위 사제 중 하나가 이걸 목걸이 장식으로 쓰고 있었어. 내가 그 정보를 습득할 즘엔…… 그 사제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었지.”

“그래? 내게 숨기고 있던 정보로군.”

내가 불만을 토해냈다. 일레이도 물러서지 않겠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네가 잠자는 왕자님이었던 시절에 일을 일일이 보고할 순 없잖아. 나와 키누안의 역사는 네 생각보다 길어.”

그렇긴 하다. 보고할 수도 없고, 보고할 필요도 없지.

“그럼 지금 우린 정신전이기와 저장소를 둘 다 가지고 있는 건가?”

“내가 추적한 키누안의 행적을 볼 때, 확보한 저장소는 세 개일 거야. 하나는 자기가 사용했고, 내가 받아낸 건 둘이지. 그중 하나는 프란세크에게 들어갈 때 사용했고, 남은 하나는 본체로 돌아갈 때 사용하려 했다. 참고로 저장소는 정신을 주입할 때 소모돼서 부서져.”

저장소는 일회용이었다.

이번 임무에서 저장소가 소모되거나 머리가 파괴되면, 일레이는 프란세크의 신분으로 영원히 살아야 한다.

‘정신전이기, 저장소, 에너지 캡슐.’

이렇게 셋이 있어야 정신전이기의 온전한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선대 황제는 정신전이기를 토대로 만든 불완전한 브레인 백업 시스템으로 이반의 뇌에 자신의 정신을 이식했겠지.’

일레이는 내 표정을 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키누안은 정신전이기 사용법을 연구했어. 근위대 교관일 때부터 계속 수소문했던 것 같아.”

“그 인간이 한량처럼 교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닐 테니까. 우리가 생도였을 시기에도 물밑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겠지. 하여간, 호수의 백조 같은 놈이야.”

키누안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속세에서 벗어난 신선처럼 굴었다. 지나고 보면 웃기기까지 했다.

어쨌든 키누안은 선대 황제의 아키에스 도미니다. 그것도 나처럼 불안정한 견습이 아니라, 완성된 아키에스 도미니로 선대 황제와 모든 음모와 계략을 공유했다.

‘키누안이 정신전이기와 관련된 정보 수집이나 유물 조사를 맡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사이에, 일레이가 시뮬레이션 속에서 정신전이기를 작동했다. 그는 에너지 캡슐로 정신전이기를 충전하고, 저장소를 정신전이기 뒷부분에 댔다.

탁.

저장소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삽입구도 없는 형식이라 사용법을 모른다면 저장소의 존재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사용법은 의외로 어렵지 않아. 아케인 문자가 나오긴 하는데, 문자를 배울 필요는 없고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외워.”

정신전이기 외부 회로가 빛났다. 꾸물꾸물 올라온 푸른빛이 실낱처럼 꺾이고 얽히더니 홀로그램 화면을 구성했다.

어떻게 읽고 발음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 꼬부랑글자가 보였다.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라 여기고…….’

난 일레이의 손을 보며 조작 순서를 외웠다. 중간에는 뇌와 저장소를 나타내는 그림 기호도 나왔다.

뇌 모양의 그림 기호에서는 사람의 ‘영혼’이라 부를 만한 빛이 반짝였다. 마치 혼불 같았다.

일레이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루카, 만약 우리의 정신이 단순히 전기화학 신호로 이뤄진 현상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근원이 있다면, 사후세계도 있는 걸까?”

제국에선 우주의 원리를 유물론에 입각해 가르친다.

정신은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며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관심 없어. 난 학자가 아니야.”

일레이가 내 반응에 웃었다.

“뭐, 고차원의 과학기술인 거겠지. 정신과 자아를 구성하는 고유한 구조와 신호 패턴을 다른 뇌에 적용하는 걸지도…….”

일레이가 씁쓸한 얼굴로 자문자답했다. 나는 걸리는 게 있어 움찔했다.

‘사후세계.’

일레이가 내뱉은 낱말 하나가 내 머릿속에 걸렸다. 내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일레이, 너는 사후세계가 실제로 존재하길 바라는 거로군.’

제국 출신인 데다가 냉소적이기까지 한 일레이가 사후세계를 믿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확고부동한 증거가 있어야만 일레이는 사후세계를 인정할 수 있다.

‘사후세계라는 게 존재한다면, 릴리안 라모네스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일레이는 불쌍한 녀석이다. 영원히 풀지 못할 저주에 얽매여 있다.

“루카, 네 얼굴에서 생각이 다 보여. 여긴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이라고. 더 노골적으로 감정이 드러나지. 난 사후세계를 믿지 않지만, 사후세계가 있더라도…… 난 릴리안 라모네스를 만나지 못할 거야. 지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 처박힐 테니까. 영겁을 속죄해도 한 층조차 올라가지 못하겠지.”

“……음.”

차마 빈말로도 아니라고 말 못 하겠다.

사후세계와 지옥이 있다면, 사후 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지옥 밑바닥을 일레이의 자리로 점지해뒀을 터다.

난 정신전이기 헬멧과 홀로그램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생각보다 방식은 단순하네. 이게 끝인 건가?”

“바보라도 몇 번 해보면 알 수 있을 정도지. 너라면 한 번이면 충분하고.”

그림 기호로 된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혼불’을 저장소와 뇌로 옮기면 된다.

‘왜 많은 사람이 아케인 문명에 열광하는지 알겠어.’

이렇게 간단하게 사람의 정신을 옮길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초과학 기술을 갖춘 문명이 어떻게 살아갔고, 또 왜 멸망했는지는 궁금한 게 당연하다.

“이반의 뇌에 있는 선대 황제의 정신을 빼낼 수 있는 건가? 만약 얽혀있어서 하나로 보이면 어떡하지?”

만일을 대비해 내가 물었다.

‘내가 이반에게 가져갈 선물은 두 개다. 하나는 일레이의 머리, 다른 하나는 정신전이기와 그 사용법.’

이반은 자신의 머리에서 선대 황제의 정신을 빼내고 싶어 한다. 일레이의 수급보단 정신전이기를 훨씬 반길 것이다.

“……구분돼. 영혼의 빛이 둘로 보일 거야. 아마 더 작은 빛이 선대 황제겠지”

난 그 말을 들으며 정신전이기 가까이 접근했다.

“추방하고 싶은 정신을 저장소에 넣고 부수면 되는 건가?”

수다쟁이였던 일레이가 고개만 끄덕였다. 또 내 머리가 멋대로 추론을 시작했다.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에선 내면을 숨기기 더 힘들다. 육체란 껍데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반영되는 공간이다.

난 정신전이기 헬멧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방금 일레이가 내뱉은 정보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입맛이 쓰다.

‘프란세크의 정신을 직접 추방했구나, 일레이…….’

프란세크는 재기불능 상태일지라도 자아가 아예 없진 않았던 것 같다. 대화 정돈 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레이는 이반의 불안정한 상태를 보았다. 프란세크의 미약한 자아라도 남겨두는 우를 범할 녀석이 아니야.’

일레이는 프란세크의 정신을 빼내고 교대하듯 그 뇌에 들어갔다. 덮어쓰기를 한 게 아니다.

일레이의 정신 주입이 끝나자마자 프란세크의 정신이 있던 저장소는 기능을 다하고 부서졌겠지. 정신을 교대했지만, 프란세크가 도착한 저장소는 곧 무너지는 안식처였다.

‘숨겨둔 저장소가 더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저장소가 셋이라면 프란세크는 이미 완전히 죽고 없다. 일레이가 죽인 거지.’

남은 저장소는 하나다. 이건 일레이가 본체로 돌아갈 때 써야 한다.

일레이에겐 프란세크의 정신을 보존해줄 여유도…… 양심도 없지.

‘거짓말쟁이.’

솔직히 프란세크의 사정보다 끝없이 거짓말을 하는 일레이에 대한 씁쓸함이 더 컸다.

난 굳이 프란세크에 대해 묻지 않았다.

뭐, 어디까지나 정황상 추론이다. 이런 추론은 내 경험상 대개 맞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삑.

일레이가 귓가에 손을 댔다. 시뮬레이션 바깥의 현실에서 통신이 온 것이다.

“내 본체가 왔어, 루카. 직접 자를래? 내가 잘라서 가져올까?”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직접 하지.”

지금 나는 서늘하게 웃고 있을 거다.

* * *

난 고이 잠든 일레이의 본체를 보았다. 녀석의 금발은 자체 발광하듯 환했다. 눈꺼풀 아래에는 얼음과 보석을 반반 섞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있겠지.

키릭.

나는 크루시스를 뽑았다.

휘릭!

손목과 함께 칼날을 돌리던 내가 양손을 높게 들었다. 반대편 손으로도 칼자루를 잡았다.

처형인처럼 간결하게.

까앙! 콰드득!

일격에 일레이 본체의 목이 부서지듯 잘려나갔다. 찌그러진 쇠와 부품이 이리저리 튀었다.

“음, 내 목이 잘리는 광경이 아무래도 불편하긴 하네.”

프란세크의 의체를 한 일레이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담배를 연신 피워댔다.

“비흡연자 앞에서 담배 좀 그만 피워. 니코틴이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면서?”

“니코틴 말고도 연기를 마시는 흡연 행위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니까. 이래서 비흡연자란, 쯧.”

“퍽이나 자랑이다.”

난 습관적으로 크루시스를 세차게 돌려서 칼날의 이물질을 털어냈다.

철컥.

크루시스가 말끔하게 칼집으로 들어갔다.

고압축 중량병기인데도 내 의체 출력이 원체 좋은지라 일반 무기처럼 칼날의 움직임이 산뜻하고 가벼웠다. 사실 조금 자랑하자면, 내 의체 통제력과 출력 유지력이 우수한 덕분이기도 하다.

드륵.

난 준비해둔 가방에 일레이의 머리를 넣었다.

일레이의 유일한 생체인 뇌가 여기에 있다. 생체 인증을 해보면 일레이라는 게 드러날 터다.

‘이반은 쉽게 속진 않을 거야. 하지만 정신전이기 사용법이라는 미끼는 무조건 물 수밖에 없어.’

나는 시간을 질질 끌 생각이 없다. 필요한 장비와 물건을 챙기자마자 아크바란 중심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루카.”

일레이가 나를 붙잡듯 말을 걸었다.

“할 말 있으면 바로 해.”

“민감한 질문이라서 그래. 우린 최악을 가정하는 부류의 사람이잖아. 일이 잘못됐을 경우…… 누군가는 지젤에게 네 소식을 전해야겠지. 더 나쁜 가정을 하자면, 이반이 지젤을 공격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난 등을 돌린 채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의 온도가 내려갔다.

“지젤의 위치를 알려주면 내가 조치하고 대비해둘게.”

내 손동작이 멈췄다.

‘지젤의 위치를 일레이에게 알린다고?’

일레이는 거짓말쟁이다. 또 어떤 모략을 꾸릴지 모른다.

난 일레이가 내게도 거짓말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녀석이 날 위해 움직일 거라는 것도 믿는다.

“일레이, 내게 지젤은 릴리안 같은 존재야. 아니, 그보다 더할 수도 있지.”

“알아. 그러니까 말해달라는 거야.”

심장에 땀이 맺힐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송골송골 맺혔을 터다.

목구멍에서 가시가 돋친 구슬이 역류해 올라오는 것만 같다. 한없이 불쾌하고 괴롭다.

……타인을 믿기란 이토록 힘든 법이다.

‘당신도 이랬군요, 아버지.’

나는 힘겹게 입을 떼고선 말을 내뱉었다. 웅얼거리듯 작은 목소리였다.

“고마워, 루카.”

일레이가 고요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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