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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36

336
외부에서 보는 나와 일레이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일레이 카르티카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나는 일레이의 공화국 건설이라는 목적에 희생양이 되었고, 과거의 인연 덕분에 운이 좋게 구조된 것이다.’

당연히 현실은 다르다. 일레이는 날 빼돌릴 방책을 생각해두고 키누안에게 넘겼다.

광역수사단장 미카엘의 도움이 없더라도 일레이는 다른 인맥과 수단을 동원해 날 구했을 터다.

‘어쨌든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 내가 배신당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

믿고 있던 일레이에게 배신당했다. 내가 복수귀가 될 연유는 충분하다.

‘난 일레이의 수급과 정신전이기를 들고 이반을 찾아간다.’

세부적인 계획은 지금부터 짜면 된다.

……내 제안을 들은 일레이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일레이, 이 정도 일을 저질렀으면 너도 본체로 돌아가지 못할 정도의 각오는 해야지.”

일레이는 괜히 서늘한지 목덜미를 주무르듯 매만졌다.

“과감한 결단이네. 내 목이 잘리는 건 괜찮아. 문제는 너다. 암살 실행자인 네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워.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 말이야.”

“그건 지금부터 준비하면 돼. 이미 생각해둔 건 있어. 이반이 죽는 건 황궁을 빠져나오고 나서다. 황제를 인질로 삼으면 날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

“정말로 할 생각이야? 이반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내 수급과 정신전이기를 가져가더라도 널 경계할 거라고.”

나는 아랫입술을 튕기듯 살짝 깨물었다. 세상 모든 일에 확신이 있을 순 없다.

“정신전이기와 그 사용법은 그 누구보다 이반이 간절히 원하고 있어. 더군다나 이반은…… 나에 대해선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져. 이반이 나에게 냉혹했다면 난 진작 죽었을 거야.”

“흐음, 확실히 사랑에 빠지면 현실을 부정하고 믿고 싶은 걸 믿는 법이지. 존엄하신 폐하께서도 한낱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건가?”

일레이가 주먹을 턱에 대며 키득키득 웃었다.

“사랑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소유욕이야.”

난 바보가 아니다. 이반이 순전히 장난만으로 가변형 의체를 쓰거나 여성의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는 건 아니겠지. 그 신호를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내가 순수한 사람은 아니다.

“비정상적인 소유욕? 그게 사랑과 뭐가 달라?”

일레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난 다르다는 걸 안다.

“소유욕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아. 끝내 가지지 못하면 부숴 버리려고 하지. 이반은 내 도주를 대비해 폭탄을 내 목에 설치했어.”

“한 가지 물을게, 루카. 네 손으로 이반을 죽일 수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해? 날 머저리로 보는 거냐?”

“넌 일면식도 없는 자들에겐 냉정하지만, 관계를 맺은 자들에겐 무른 면이 있어. 이반은 어쨌거나 네게 호감을 표한 인물이지. 그런 이반을 네 손으로 죽이기가 쉽지 않을 거야. 망설임이 느껴지면 그냥 내게 데려와. 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반을 죽일 수 있으니까.”

“쓸모없는 걱정을 하고 자빠졌군. 네 본체와 정신전이기를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이틀 정도.”

난 품을 뒤적여 명단이 적힌 메모를 꺼냈다.

일레이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기울였다. 난 메모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제국의 칼을 초기에 지원한 권력자와 귀족들이다. 접촉 방법도 적어놨어. 끌어들일 수 있는 세력은 최대한 끌어들여 봐.”

일레이의 시선이 메모에서 멈췄다. 그는 기억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지젤이 넘겨준 거군. 내조가 확실하네. 흐음, 내게도 문제가 있지만, 지젤도 폭풍기 이후로 편집증적 성향이 심해졌어. 아무도 믿지 않으려 했지.”

“지젤을 탓하지 마. 너도 지젤에게 신뢰를 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내게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어.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단지 아쉬운 거지. 지젤이 진작 나와 협력했다면, 네가 보더시티에서 시간 낭비하며 부유하는 일이 없었을 거야.”

“……그걸 보고 탓한다고 말하는 거다, 일레이.”

내가 서늘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일레이는 지젤을 탓할 자격이 없다.

그 누가 카르티카의 여우를 순순히 믿겠는가? 유일한 친구에게도 속내를 트지 않고 때론 속이는 놈인데 말이다.

일레이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턱이 미동할 정도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그저 지젤을 탓하고 싶은 거지. 나도 모르게 악감정이 크게 생겼나 보군.”

일레이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해서 되돌아보듯 공허한 눈동자로 잠시 서 있었다.

나는 일레이의 상념을 깨웠다.

“지젤의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계획이나 짜보자고.”

일레이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피식 웃더니 문을 쳐다봤다.

문밖에는 카릴만다가 경비를 서듯 있을 것이다.

흠칫.

내 안에서 불안감과 함께 과거의 사건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일레이는 입막음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측근도 서슴없이 죽인다.

“네 특기를 여기서 발휘할 필요는 없어, 일레이.”

내가 경고하듯 말했다. 참고로 내가 말한 일레이의 특기란 ‘부하 즉결처분’이다.

일레이는 내 경고가 무척 재밌었는지 한참이나 웃어댔다. 어깨와 옷자락이 떨릴 정도였다.

“하아, 젠장, 부정을 못 하겠군. 그래도 카릴만다는 입이 무겁고 충실하지. 널 봤다고 사방팔방 떠들어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일레이가 내 옆에 섰다. 그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뜸을 들인 그가 조각과도 같은 턱을 움직여 말을 이어갔다.

“……루카, 네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난 카릴만다를 죽였을 거야. 위험한 변수를 줄이는 게 내 방식이지. 널 더는 속이기 싫으니 솔직하게 말하는 거다.”

일레이의 솔직함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일레이의 등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마 내 동공도 살짝 커졌으리라.

일레이는 의자로 걸어가고 있다.

츠즈즈즈.

내 오감과 상상에서 뻗어 나온 인지의 촉수가 일레이를 휘감으며 들러붙는다. 일레이에게 흘러나오는 모든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거짓말을 탐지하듯이 말이다.

‘난 일레이를 믿기로 했지. 실제로도 녀석을 믿어.’

그러니까, 일레이 카르티카라는 인간의 본성을 믿는다.

끼릭.

일레이는 의자에 앉더니 멋스럽게 다리를 꼬며 턱을 괴었다. 내 감지도 귀신같이 멎었다.

“자, 어디 한번 제국의 역사에 이름을 남겨보자고, 루카.”

일레이가 웃었다. 나도 언제 녀석을 관찰했냐는 듯이 태연한 미소만 흘렸다.

‘나는 일레이 카르티카를 믿는다. 녀석이 항상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믿지…….’

일레이는 불행한 인간이다. 그는 유일한 친구에게조차 거짓말을 한다. 그러니 나만큼은 녀석을 불쌍하게 여기겠다.

* * *

나는 지금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와 있다.

아직 시뮬레이션 정보 합성이 끝나지 않아 주변은 캄캄했다.

난 디지털 세계를 선호하지 않는다. 여긴 나의 영역이 아니며, 디지털 세계의 강자는 바바라 같은 해커나 전자전 전문가들이다.

내 불호와는 무관하게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은 유용한 도구다. 근위대원 양성에서도 시뮬레이션 훈련은 중요한 커리큘럼이었다.

기이잉.

격자형 빛이 중심부터 내려오더니 공간을 합성하고 있었다. 정보로 구축한 가짜 현실이 물감처럼 번져갔다.

따각.

반짝이는 대리석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없던 공간에 일레이가 서 있었다.

‘일레이.’

일레이가 가상현실에 막 진입했다. 그는 머리가 뻐근한지 목과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시뮬레이션의 일레이 외형은 본체와 똑같았다.

“으음, 프란세크의 의체로 너무 오래 있었나? 슬슬 내 얼굴이 낯설단 말이지.”

일레이는 전신거울을 허공에서 불러내더니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 본체의 얼굴도 따지고 보면 전신의체이니 가짜잖아.”

내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당연하게도 일레이는 개의치 않아 했다.

“본체는 내 생체를 기반으로 성장과 노화를 추측해서 만든 얼굴이야. 그리고 본체라는 자각이 중요한 거지, 기계니 생체니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어. 전신의체가 되어보니 더욱 잘 알겠더라고. 왜 전신의체 귀족들이 외형과 의체를 자주 바꾸지 않는지 말이야. 정체성 유지가 어려워져.”

나는 합성과 출력이 끝난 시뮬레이션 공간을 보았다.

‘아크바란의 황궁.’

나와 일레이는 황궁 내부에 서 있었다. 여긴 나도 몇 번인가 왔던 황궁 입구의 홀이었다.

위를 보면 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층고가 높았다. 천장에 양각된 기하학적 문양은 단순하면서도 웅장했고, 미끄러지듯 시선을 내리면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를 우상화하는 벽화와 역대 황제의 초상화와 흉상이 군데군데 보였다.

대체로 흑백과 회색을 사용하는 무채색적인 건축 양식이지만, 간혹 보이는 금빛과 붉은색 장식이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키이이잉!

공간 구축이 끝나자 가상의 황궁 경비들도 하나둘씩 등장했다. 경비의 근위대 복장을 본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근위대원이 황궁의 경비를 맡는 건 당연하긴 해.’

저들은 그간의 풍파에서도 이반 황제를 향한 충성심을 견고히 유지했겠지. 어쩌면 진정한 근위대원이 바로 저들이다.

“황궁엔 적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쪽 첩자도 있어. 상황이 터지면 길을 열어줄 거야.”

일레이가 손짓하자 빛줄기가 복도와 계단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예상 탈출 경로였다.

우린 시뮬레이션 내의 황궁을 돌아다니며 변수를 대비해 계획을 중첩하듯 세웠다.

일레이는 임기응변보다는 미리 계획을 촘촘하게 세워서 변수에 대응하려 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상황을 대비할 자원과 힘이 있기 때문이다.

“루카, 혹여나 일이 잘못되면 네 목숨을 우선시해.”

“그럴 생각이다. 난 죽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다른 사람이 보기엔 너는 불나방이나 다를 바가 없어. 이 미친 혼돈의 한가운데에 몸을 던졌지.”

“네 말대로, 난 극한의 상황이 아니면 지루해서 견디지 못하는 인간말종인가 보지.”

내 말을 들은 일레이가 맑게 웃었다.

“아직도 그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사실 나도 알고 있어,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정하기 때문이지. 난 코라인 소년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못한 멍청이를 알아.”

“……시답잖은 옛이야기로군.”

“시답지 않아. 아마 그 사건 때문에 난 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걸 거야. 내 안의 반항심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넌 내 불온한 언행을 불쾌히 여기면서도 상부에 고발하지 않았지.”

“배경도 없는 하층민 출신 생도가 카르티카 가문을 적으로 삼을 순 없으니까.”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또또 쌀쌀맞게 군다. 지젤한테도 그런 식으로 말해?”

“남 연애사에 참견 마.”

“걱정돼서 그래. 지젤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잖아. 뭐, 됐어. 시간도 많이 없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일레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우우우웅!

우리가 있던 황궁이 흔들렸다. 곧 황궁은 상하로 갈라지더니 공간에서 사라졌다.

끼리릭, 끽.

이어서 책방 형식의 고요한 공간이 우릴 감싸듯 드러났다. 벽과 가구가 목재라서 따스한 분위기였다.

덜컹.

가운데 탁자에는 아케인 유물 ‘정신전이기’가 있었다. 헬멧 형식의 유물에는 푸른빛 회로가 뇌주름처럼 얽혀 있었다.

“……지금부터 정신전이기 사용법을 가르쳐줄게. 이게 이반이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는 선물이지.”

일레이가 정신전이기 뒤에 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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