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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밤은 길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카릴만다의 감시하에 제국 밖으로 추방될 터다.
‘다시 아크바란으로 잠입할 계획을 짜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단독으로 아크바란에 들어간다는 계획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고개가 절로 저어질 뿐이었다.
평시라면 몰라도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하층 구역조차 검문을 꼼꼼하게 시행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장비로는 잠입이 어려워.’
고성능의 잠입용 장비를 몸에 둘둘 감고 있어야 그나마 해볼 만했다. 그리고 그런 장비는 당장 개인이 구하기 힘들다.
새삼스럽지만, 대국면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내가 발버둥 쳐도 할 수 있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려면 규모를 갖춘 집단과 세력이 있어야 한다.
‘아키에스 빅티마도 기본적으론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는 것뿐이다. 자신의 작은 힘으로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찰나를 한없이 기다리는 거지.’
자, 키누안은 내 스승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키누안이 폭풍기 때에 무얼 했는지 상기하자. 그는 개인의 역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서 작은 힘만을 사용해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우린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권력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
한낱 개인의 영향력으론 흐름을 바꾸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우리는 사람에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사람이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권력자면 된다.
‘직접 영향력을 갖추는 게 아니다.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거지. 대리인을 통해서 말이야.’
키누안은 힘을 가진 자에게 접근해 자신의 영향을 뿌렸다.
투기장의 관리자, 선대 황제 유리 크라치아, 쟈파, 교구장 디컨…….
키누안은 저들의 그림자에 숨어서 흐름을 조작했고, 도르래처럼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발휘했다.
“연대장님이 이번 사태에서 프란세크 폐하의 편을 드는 이유가 있습니까?”
난 다소 무례한 질문을 꺼냈다.
카릴만다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면 대꾸도 하지 않았을 터다.
카릴만다는 팔짱을 내리며 날 바라봤다.
“정당한 황권을 가진 자를 위해 싸우는 게 제 본분이죠.”
기계적 어조, 틀에 박힌 대답이었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연대장님도 저도 압니다. 당신의 가문이 프란세크 폐하의 편을 든 이유가 있겠죠. 결국은 이권이니까요.”
“곤란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루카우스.”
더 곤란한 질문을 할 생각이다.
나는 진중하고도 어려운 말을 꺼내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프란세크 폐하가 본인인 게 확실합니까?”
적막이 잠시 일었다. 카릴만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불경한 질문이군요. 일단 대답을 드리자면, 생체 인증 정보도 확인했습니다. 뇌까지 기계인 건 아니니까요.”
카릴만다가 검지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호흡을 갈무리했다. 내뱉은 숨이 스산하게 퍼졌다.
“카랄만다 로무스, 역시 저는 폐하와 대면해야겠습니다.”
카릴만다도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의 의체에서 출력이 올라가는 진동이 일었다.
“제 개인실이 난장판으로 변하겠군요”
카릴만다도 각오를 다진 듯이 말했다.
내겐 프란세크를 만날 방도가 한 가지 있다. 내키진 않지만 내 신상을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카릴만다를 제압하고 밖으로 나가…… 날 둘러싼 군인과 제국민들에게 정체를 드러낸다.’
이 정도로 소란을 피우면 날 무시하진 못할 터다. 내전은 여론이 중요하다.
대외적으로 프란세크와 나의 관계는 각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론 그 정돈 아니지만 말이다.
‘카릴만다가 무기를 뽑기도 전에 맨손으로 결판을 낸다.’
난 카릴만다와의 접전을 뇌내 시뮬레이션했다. 광전사 모듈인지 뭔지 몰라도 발동까진 시간이 필요할 거다.
‘가능하다.’
카릴만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그가 제국군 장교 중에서도 전투술이 최상위라는 전제를 해도, 난 그를 제압할 수 있다. 이건 오만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후우,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카릴만다가 중얼거렸다. 그가 움직일 기미가 있으면 난 바로 뛰쳐나갈 것이다.
우우우웅.
오히려 카릴만다는 출력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위로 들었다.
“……폐하께선 당신의 강행도 예상하셨습니다. 당신과 무력 충돌이 일 것 같으면 데려오라 말씀하셨죠. 알현은 허가되었습니다.”
카릴만다가 일어서더니 정중히 문을 열었다.
나는 괜히 허탈해져서 목덜미를 매만졌다.
‘모략과 계략, 최선의 불발을 대비한 차선과 차악.’
제국의 중심에 왔다는 게 절실하게 느껴졌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어딜 가도 시커먼 거미줄이 내 팔다리에 엉켜 붙었다.
* * *
카릴만다는 날 프란세크에게 은밀히 안내했다.
지금은 바람이 잠잠한 새벽이었다. 공장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매연이 안개처럼 골목과 거리마다 드리웠다. 두어 달만 여기서 살면 폐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감시나 미행은 없다. 정말로 카릴만다와 나만 있어.’
프란세크의 위치는 최고 기밀일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최측근만 프란세크와 접촉 가능하겠지.
‘암살만 성공하면 내전이 손쉽게 끝난다.’
프란세크가 죽으면 와해될 군대다. 제국은 프란세크를 암살하려고 온갖 방책을 짜내고 있을 것이다.
끼익.
카릴만다는 지하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우린 지하 시설로 들어갔다.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통로가 보였다. 내겐 고욕이지만, 전신의체에겐 상관이 없을 터다.
통로 끝에는 방이 하나 있었다.
끼이이익.
카릴만다가 문을 열었다. 안에는 말끔하게 정리된 알현실이 있었다.
제국 황궁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필요한 가구와 전자장비는 모두 있었다. 실용적인 알현실이었다.
방 안쪽에는 한 사내가 진홍빛 외투를 걸친 채로 앉아있었다. 그는 모니터에 비친 전황과 움직임을 보다가 일어섰다.
“폐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카릴만다가 한 발자국 앞서가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
프란세크 크라치아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보았다.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 크라치아.’
거짓말처럼 과거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생김새와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이목을 끄는 사내였다. 목소리는 정갈하면서도 울림이 있었고, 환한 미소와 눈동자에선 재기와 총기가 흘렀다.
프란세크는 제왕이라는 관념을 현현한 듯한 군주였다.
스륵.
나는 카릴만다와 함께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우리 사이에 과한 예는 필요가 없지. 일어서게나, 루카우스.”
프란세크가 달가운 어투로 말했다. 내 알현을 거절한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온화한 태도였다.
“나가보게, 카릴만다. 오랜 친구와 독대하고 싶으니까.”
프란세크는 내 무구조차 거두지 않고 카릴만다를 밖으로 내보냈다. 충실한 카릴만다조차 머뭇거리다가 공손히 물러났다.
“알현을 거절하셨으면서도, 제 강행 또한 대비하셨더군요.”
“자네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야 했으니까. 루카우스 쿠스토리아가 얼마나 끈질긴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일단 앉게나.”
프란세크가 손바닥을 내밀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드륵.
나와 프란세크는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가 그를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1초도 걸리지 않을 상황이었다.
“폐하께서도 바쁘실 테니,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일레이 카르티카는 어디에 있습니까?”
프란세크가 옅게 웃었다.
“자네가 일레이를 친구라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뒤돌아서 돌아가게. 제국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으로 말이야.”
프란세크가 턱을 괴며 다리를 꼬았다.
“저도 구속에서 벗어난다면, 전부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에 걸린 가시가 절로 넘어가지 않으면 직접 뽑아야 하는 법이죠. 제겐 뽑지 못한 가시가 둘이나 있더군요.”
하나는 일레이, 다른 하나는 키누안이다.
그리고 두 개의 가시는 별도가 아니라 뒤엉켜 있었다.
“자네는 날 돕기 위해 온 게 아니지. 하물며 이건 우리의 싸움이네. 자네의 싸움이 아니야. 황제가 누구이든, 공화국이든 제국이든…… 자넨 관심이 없지 않은가?”
묘한 기시감. 나는 무표정하게 프란세크를 응시했다.
“폐하께서 절 이토록 아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에겐 큰 빚이 있으니까.”
나는 눈을 치켜떴다.
“대의를 품은 위정자라면 악덕을 삼키셔야 합니다. 절친한 친우조차 소모품으로 여기며…… 대의를 위해 소모할 줄 알아야죠. 그런 악덕을 삼킬 비위가 없다면 폐하는 이번 전쟁에서 패할 겁니다. 이반에겐 그럴 비위가 있으니까요.”
프란세크와 나 사이에는 미묘한 우정이 있다. 폭풍기를 헤쳐나오면서 쌓아온 유대다.
‘그러나 서로를 희생할 정도의 강렬한 유대는 아니야. 큰 이득을 포기할 정도도 아니지.’
프란세크 크라치아는 제왕학을 배운 사내다. 심지어 과거의 내게 ‘귀족 사냥꾼’ 같은 별명까지 붙여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덕분에 난 곤경에 빠지기도 했었다.
“폐하께서 절 거절하는 건 일레이의 부탁 때문이겠죠. 하지만 일레이도 알 겁니다. 제가 고집을 부리면 말릴 수 없다는 걸요. 그러니 절 사용하셔도 됩니다.”
난 지레짐작하듯 말했다.
“자넨 날 곤란하게 만드는군. 이를 어쩐다.”
프란세크가 능청스레 이마를 짚었다.
“제가 폐하를 곤란케 한들 ‘라일리’만큼은 아니겠죠.”
라일리는 이반의 옛 이름이다. 황족 중 일부나 아는 이름이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 중에서 이반의 옛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익숙하진 않을 터다. 이미 사라진 이름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
프란세크의 반응이 묘하게 이상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사내다. 이반의 배신과 악담에 상처를 받을 정도였다. 라일리라는 이름을 잊을 리가 없다.
‘지금 이렇게 보면 프란세크는 과거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더 이상해.’
프란세크는 이반에게 유폐를 당했다. 아무리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졌어도 독해지기 마련이다.
‘모든 상황이 부자연스럽게 어긋나 있다.’
이 어긋남을 끼워 맞출 딱 하나의 전제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기이잉.
내 머릿속에서 잡음이 심했다. 난 눈을 살짝 찌푸렸다. 코피가 나올 것 같은 걸 겨우 참았다.
우우웅.
사고가 가속한다. 프란세크의 모든 행동이 느리게만 보였다.
프란세크는 혼자서 과거에서 온 듯이 변화가 없었다. 누군가가 과거의 프란세크를 복사해서 고스란히 붙여둔 것 같았다.
프란세크는 달라져야 정상이다. 오랜 유폐 생활 때문이든, 복수심이든, 아니면 이반의 괴롭힘이든 간에 말이다.
그리고 내 경험상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더 현실적으로 변하며 냉혹해지는 법이었다. 내가 재회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세월의 풍파란 인간성을 깎아내는 경향이 있으니까.
‘프란세크가 나를 쓰지 않을 까닭이 없어. 하물며 거사를 코앞에 두고서?’
내 강행에 대비해 알현을 받아들인 것도 그러했다. 마치 루카라는 존재의 안전을 우선하는 것만 같다.
슥.
난 손으로 입을 감쌌다. 내 사고의 폭주는 대범한 결과로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경악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일레이는 이반에게서 날 빼돌리려고 키누안과 거래했다. 일부러 날 키누안에게 당하게 한 뒤에 다른 수단을 통해 나를 빼돌리려 했었다.
그 거래 내용에는 단순히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나만 넘기는 건 일방적으로 키누안에게 유리한 거래다.
‘키누안과 나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유리한 상황을 의심하며 피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편리하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자신의 인력으로 끌어온 행운만 믿는다.’
키누안도 일방적으로 유리한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거래 내용이 유리했다면, 오히려 더 의심하면서 날 ‘확실하게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일레이는 날 넘길 정도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키누안에게 요구했을 터다.
‘키누안은 이미 정신전이기를 사용했다. 놈에게 정신전이기가 그저 일회성으로 필요했던 거라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을 쫓는 제국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넘길 수도 있지.’
일레이는 키누안으로부터 정신전이기를 회수했다.
표면적으론 날 배신하고 키누안과 거래해 정신전이기를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정신전이는 생체 인증조차 속일 수 있다.’
나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지 않았다면 입술이 일그러지는 게 드러났을 것이다.
일레이는 내 예상보다 더 많은 걸 준비하고 있었다. 제국의 어둠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사내였다.
“……일레이, 너구나.”
나는 입에서 손을 떼며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루카, 이래서 너와 직접 마주하기 싫었어. 넌 너무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단 말이지.”
프란세크의 형태를 빌린 일레이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