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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손뼉을 쳤다.
“루카, 루카, 아, 루카! 역시 넌 전장에서 죽을 운명이야. 발버둥 쳐도 거부할 수 없기에 숙명인 거지. 난 멍청하고 어리석은 네가 참 좋아!”
바바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는 축제라도 참가한 듯이 고양된 어투와 행동으로 내 주변을 빙빙 돌았다.
기잉, 철컥.
난 전투용 의족과 의수를 장착하며 파리같은 바바라를 무시했다.
‘평온.’
나는 평온함에 정착하지 못했다. 내게 아직 남은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정말로 바바라의 말처럼…… 내가 평온을 견디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면?’
과거의 소년 루카는 크라치아 아카데미의 평온을 견디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자극과 폭력을 좇아 사건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는 소년 루카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폭력을 몸에 두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후, 후, 후, 루카.”
바바라는 내 결심에 초를 치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뒷짐을 진 그녀가 한 발로 몸을 기울이다가 넘어질 듯이 빙글 돌았다.
휘릭.
균형을 잡은 바바라가 내 앞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녀의 홀로그램에선 근위대원에 관한 그림과 글자가 쭈룩 나왔다.
“잊고 있나 본데, 넌 근위대 출신이야. 제국의 근위대원은 전성기가 지나고서도 군부나 다른 전투직에 종사하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해.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에 연루되지. 왜 그런지는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돼.”
“넌 타고난 폭력성을 더 강화하는 훈련을 받았고, 제국은 화학적 시술을 통해 네 신경계를 재배열하고 호르몬 분비 체계마저 건드렸어. 극단적으로 말해 폭력에 무감각하다 못해 쾌감을 느끼는 인간을 만들어낸 거지. 명예로운 군인이라 포장하면서 말이야.”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도 자각하고 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난 네가 어떤 방식으로든 지젤 곁을 떠날 거란 걸 알고 있어. 막상 지젤을 손에 넣으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지? 네게 평범한 성관계 따윈 살인에 비하면 따분한 자극일 테니까. 나만 기괴한 인간이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지.”
나는 방금 체결된 오른손으로 바바라의 목을 붙잡고 벽까지 밀고 싶었지만, 뭐, 어떻게든 참아냈다. 흠흠, 잘했다.
“날 쾌락 살인마로 몰고 가고 싶은 모양인데…… 네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지.”
“루카, 타고난 본성은 억누를 수 없어.”
“하지만 삶은 선택할 수 있지. 우린 본성대로만 살아가진 않아. 내 삶에 최선은 없을지라도, 차선과 차악 정돈 있겠지. 늘 그랬거든.”
“그럼 잘해봐. 지젤을 설득하는 것부터 고난일 테니까.”
바바라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나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이렇게 힘겹게 재회했는데, 난 다시 불구덩이로 들어가겠다고 지젤에게 선언해야 한다.
……참담한 심정이로군.
* * *
난 지젤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슥.
나는 문에 기댄 채로 지젤의 뒷모습을 보았다.
지젤은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채로 흥얼거렸고, 프라이팬의 고기는 자글자글 익고 있었다.
“아침부터 단련이라도 하고 온 거야? 요즘 생활이 너한텐 근질근질하긴 하…….”
지젤이 고기 접시를 들고선 빙글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날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다.
내 팔다리는 전투용으로 바뀌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지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루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습을 감출 순 없잖아.”
난 차분하게 말했다. 격앙 없이 대화가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역시 그건 나만의 바람이었다.
“나는 너를…… 그 빌어먹을 혼돈과 망할 제국에서 빼내려고 내 삶 전부를 바쳤어! 내 사람들을 배신하면서까지 그랬다고! 그런데 기껏 꺼내놨더니 제 발로 다시 기어가겠다고? 제정신이야?”
지젤의 목소리가 사납게 퍼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고기 접시를 내 얼굴에 던졌다.
철퍼덕!
고깃덩이가 내 얼굴에 명중하더니 턱을 따라 떨어졌다.
“……양념이 맛있네.”
난 손으로 입을 쓸어내리며 농을 던져봤다. 그러나 내 농은 지젤의 화만 돋울 뿐이다.
음, 앞으로 연인과 대화할 때는 좀 더 고민해보자.
지젤이 내 앞까지 다가오더니 손을 높게 들었다. 그녀의 손이 의수가 아니라 생체인 게 다행이다.
짝!
지젤의 매운 손바닥이 내 뺨을 강타했고, 내 머리가 휙 하고 돌아갔다.
만져보지 않아도 손자국이 뺨에 남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뺨이 아주 얼얼했다.
“이대로 일레이를 그냥 둘 순 없어. 그리고 키누안에게 당하다가 끝내고 싶지도 않고.”
내가 고개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지젤은 이번엔 반대편 손을 높게 들었다.
짜- 악!
아까보다 더 아픈 것 같다.
“루카, 날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네 자존심도 버려. 난 널 위해 기꺼이 그렇게 했어. 그런데 왜 너는 못 한다는 거야?”
지젤이 내 옷깃을 잡았다.
“……너와 난 다른 사람이니까.”
지젤은 주먹을 쥐었다. 이번엔 많이 아플 것 같다. 어금니를 꽉 깨물자.
퍼억!
그녀는 그간 격투기라도 배웠는지 주먹질이 아주 제대로였다.
난 상체까지 휘청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대로 제국에 기어들어가서 네가 죽으면 내 인생은 뭐가 돼? 도대체 뭐가 되냐고! 지금껏 내가 저지른 짓에 무슨 의미가…….”
지젤이 쌓아올린 탑을 내가 무너뜨리고 있었다.
“의미가 있어. 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진작 죽었을 테니까. 네 행적을 추적할 단서가 끊어지면…… 난 언제든 죽으려고 했어. 매 순간마다 턱에 총구를 들이밀 준비를 했지.”
당장 기억나는 것만 서너 번이다. 난 죽으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곁에도 없는 지젤이 날 삶으로 잡아끌었다.
“그런데도, 내 곁을 떠난다고? 장난해?”
난 목덜미를 문지르며 지젤을 보았다. 다음 말을 꺼내려니 머쓱했다.
“그간 곰곰이 생각해봤어. 생각보다 난 욕심이 많은 놈이었더라고. 연인도 친구도, 주변 사람들도 잃고 싶지 않거든. 이번 혼란에서 내 역할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보고 싶어.”
난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음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안도했다.
“이런 널 볼 때마다, 네가 이기적인 건지 착한 건지 모르겠어…….”
지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녀의 모든 게 떨리고 있었다. 삶도 흔들리겠지.
“난 매듭을 짓고 싶은 거야. 바바라는 내가 폭력에 중독된 망나니라고 떠들겠지만, 맹세코 그게 내가 제국으로 가는 이유는 아니야. 난 내 삶을 통제하고 선택하는 법을 배웠어. 그리고 나는 네 곁에 있겠다고 선택했지.”
“무슨 말을 지껄여도 궤변이야. 네 선택은 날 배신하는 거야.”
지젤은 내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날 거머쥐려 했다.
그러나 난 끄떡하지 않았다. 지젤의 손아귀가 흐트러졌다.
사람은 사람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 우린 물건이나 소유물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게.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발을 뺄 거야.”
“……거짓말하고 있네. 어쨌든 네가 결정했다면 어쩔 수 없지.”
지젤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따라오는 건 안 돼.”
내가 미리 선수를 쳤다. 지젤은 다른 의미로 눈을 찡그렸다.
“내가 너처럼 바보인 줄 알아? 내가 널 따라가 봐야 짐밖에 더 돼?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젤은 쓴웃음을 짓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탁자를 뒤적여 수첩을 꺼냈다.
수첩을 꺼낸 지젤은 잠시 생각하더니 어떤 명단을 적어나갔다.
난 지젤의 뒤에 서서 숨을 돌렸다. 어떻게든 넘어가긴 한 모양이다.
‘나도 지젤도…… 달라지긴 했군.’
지젤은 울면서 매달리지도 않았다.
‘날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자마자 태도가 변했어.’
감정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사업가적 합리성이 뾰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냉정한 모습도 지젤의 일부다.’
그리고 밤마다 열기를 띤 채로 야릇하게 웃던 지젤도 그녀 본인이다.
“초창기의 ‘제국의 칼’은 내가 조직했어. 현 황제나 황실 자체에 반감을 가진 귀족과 권력자들이 익명으로 조직을 지원했지. 그 사람들의 암호명과 연락 수단을 적어놨어. 참고로 ‘레온’이라는 이름을 써. 내가 사용하던 이름이야.”
“레온? 노엘의 이름을 거꾸로 썼군.”
노엘의 철자를 반대로 쓰면 레온이 된다. 나는 실소했다.
“벌써 십 년 가까이 지났으니 이들이 아직도 황실에 적대적일지는 알 수 없어. 피아식별은 네가 알아서 해.”
지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수첩에 적어냈다. 디지털 방식으로는 그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은 귀한 정보였다.
극도로 디지털 정보화된 사회에서 우린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쓰고 있다. 디지털은 보안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보물과도 같은 귀한 정보는 사람의 입과 손으로 전달해야 했다.
“잠시 나가있어. 나도 기억을 떠올리려면 집중해야 하니까.”
지젤은 펜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키누안이 마음에 걸렸다. 지젤을 먼저 재운 밤이면 종종 불안감이 불쑥 솟구치곤 했다.
난 아직도 키누안의 진정한 목적을 모른다. 정신전이기는 아마도…… 그에게 어떤 목적을 위한 과정일터다.
어느 날, 내가 현관문을 열었더니 거기에 키누안이 서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그런 인물이다.
끼익.
지젤이 안방에서 나오더니 수첩을 내게 던졌다.
“출발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일.”
“그러면 오늘은 계속 안아줘.”
지젤이 날 잡아먹을 기세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 * *
‘저번 폭풍기는 황실에서 의도한 혼돈이다. 폭풍기의 혼란을 이용해 헤일라스처럼 황권을 위협하는 인물과 귀족을 제거하려 했지.’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아크레시아 제국은 황실이 원치 않는 혼란에 빠져있다.
나는 지난 한 달간 제국에 있었던 사건들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제국의 변방에서부터 크고 작은 소요가 일었다. ‘네메시스’나 ‘제국의 칼’ 같은 이들이 소규모 단위로 들고일어났다.
테러나 게릴라는 제국에서도 종종 있던 일이다. 일이 커지지만 않으면 지방군만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중앙군이 나설 필요까지도 없었다.
‘과거의 근위대원들이 제국 전역에 소수만 파견 나간 것도 지역 소요에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시다발적으로 각지에서 무력시위 및 테러가 일어났다.
‘그리고 예전에 소모된 근위대원의 숫자도 보충되지 않았어. 유동적으로 대처하기 힘들지.’
수도 아크바란에만 주둔하던 정예 군인들이 변방으로 출전을 나가야 했다. 필연적으로 황실의 통제력에 공백이 생긴다.
……그리하여 유폐되었던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 크라치아가 풀려났다.
‘아직 소문일 뿐이다. 제국에선 공식적으로 프란세크를 연금 중이라고 말하고 있어.’
프란세크가 이반에게 반기를 들며 정당한 황권을 주장한다면…… 일이 커진다. 중립이랍시고 방관하던 겁쟁이들조차 프란세크에게 힘을 실어주며 도박을 감행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누군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난 기척으로 피할 수 있지만 맞아줬다.
빡!
전투 반사를 간신히 억제했다. 뒤를 돌아보니 물류 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손바닥을 탁탁 털고 있었다.
“이봐, 신입. 멍 때리지 마. 남들은 쉬어도 너는 일해야지. 넌 팔다리가 기계니 일 잘할 것 같아서 데려온 거야.”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쭈, 이것 봐라? 안 웃어? 뒤통수 맞았다고 표정 한번 띠겁네. 이러다가 칼 들고 찾아오겠어? 어?”
사내가 더 때릴 기세로 손을 들었다.
“헤, 헤.”
난 억지로 웃었다. 장하다, 루카.
나는 저 사내의 팔을 부수고 목을 꺾어버리는 상상만 수백 번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상자를 들어서 차량에 싣고 있었다.
……지금 나는 보더시티에서 아크바란으로 가는 물류 노동자로 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