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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27

327
나와 지젤은 서로에게 기댄 채로 잠들었다. 우리에겐 휴식이 많이 필요했다. 흔들리는 차량에서도 반나절 이상 눈을 감을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우린 그만치 험난한 시간을 지나서 여기에 도달한 것이다.

우우웅.

차량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한참 전부터 가수면 상태였기에 눈을 슬그머니 떴다. 지평선 끄트머리에서 인공적인 빛이 보였다.

새벽의 야시장처럼 빛이 아른거리며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노마드 특유의 일관성 없는 차량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그중엔 거주용 대형차량도 다수였다.

‘도착했군.’

나는 심호흡하며 뇌를 각성 상태로 끌어냈다.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고, 인지가 차량 바깥까지 미치고 있었다.

운전석에 있는 바바라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그녀도 오랜 휴식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간 그녀는 정말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잠들었다.

치익.

바바라는 포도당이 주성분인 영양제를 목덜미에 투여하고 있었다.

“후우.”

바바라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상쾌한 숨을 내뱉었다.

“으음.”

지젤도 지친 눈꺼풀을 떨더니 들었다. 그녀는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올바른 절차를 거친 해동이 아니었기에 피로감과 후유증이 심할 것이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다.

나도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적이 있기에 지젤의 상태를 더 잘 알았다. 현실감이 붕 뜨고 세상이 아직 모호하게만 느껴질 터다.

“노마드는 구심점이 없는 떠돌이들이지만 미력하게나마 자기네들끼리의 정보망과 연결고리 정돈 있어. 비정기적인 노마드 시장이 이렇게 종종 열리지.”

바바라가 지젤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나와 지젤을 힐끗 바라보며 차량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루카, 넌 지젤을 지키고 있어. 난 필요한 물건을 사서 올 테니까.”

지젤이 합류한 이후로 바바라는 달라졌다.

나도 바바라의 언행을 들을 때마다 놀라곤 했다. 바바라는 지젤을 신뢰하고 있었다.

‘바바라는 지젤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고 믿는다.’

바바라가 자리를 비우면 나와 지젤은 둘이서 떠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바바라는 그런 가능성 따윈 생각지도 않는다는 듯이 홀로 노마드의 시장으로 향했다.

“……저 미치광이에게 뭘 제안한 거야?”

나는 찌뿌둥한 몸을 풀 겸 해서 차량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지젤도 뒷좌석에 앉은 채로 바깥바람을 쐬었다. 그녀의 갈색 단발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저 모습도 나쁘지 않지만, 난 그녀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조금 그리웠다.

“이해하면 간단해. 계속 함께 있어주는 거지. 바바라는 줄곧 나와 같이 있고 싶어 했어. 저 애가 기괴하게 보인 것은 우리와 종이 다른 수준의 사고방식 때문이고.”

지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무쉬르 알 카슈라가 떠올랐다.

‘우리와는 마음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무쉬르 알 카슈라나 바바라 같은 이들보다 이종족들의 희로애락이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바라가 무쉬르 알 카슈라와 닮았다면 그만치 위험하다는 뜻이야. 언젠가 네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애정을 증명하려 들겠지.”

난 바바라의 존재가 꺼림칙했다. 이건 내가 무쉬르 알 카슈라를 겪어봤기 때문일 터다.

“……루카, 넌 일레이 카르티카가 너와 비슷하기 때문에 믿는 거야?”

예상 밖의 질문이 지젤의 입에서 나왔다. 답변이 힘든 말이었다.

“그렇진 않지.”

“내가 왜 일레이 카르티카와 협력하지 않았는지 알아? 거북하기 때문이야. 일레이는 너에게만 친구인 거지. 그 누구도 카르티카의 여우를 믿지 않아.”

일레이와 지젤이 상호협력이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만약 지젤이 일레이에게 협력을 구했다면, 일레이는 지젤의 계획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도 꾀했겠지.’

바바라를 곁에 두는 지젤, 일레이를 가까이 두는 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었다.

머지않아 바바라가 여러 잡동사니를 상자 한가득 찰 정도로 구매하고선 차량으로 돌아왔다.

“우린 정착을 원하는 노마드로 위장해서 벨라토시티로 들어갈 거야. 조금 이르지만 모든 건 계획대로야. 그러니 안심해도 돼, 나의 지젤.”

바바라가 지젤에게 옷가지와 고글을 내밀며 말했다.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실용적인 복장이었다.

“나만 모르는 계획? 이후 계획까진 난 듣지 못했어.”

차량에 어깨를 기댄 내가 팔짱을 끼며 반문했다.

“다 설명해줄 테니까 기다려. 성질 급한 거 티 내지 말고.”

바바라가 내게 쏘아붙였다.

차량에서 옷을 입던 지젤이 대신 설명했다.

“루카, 지앤지 사이버네틱스에서 빼돌린 금액 중 일부가 벨라토시티의 차명계좌에 있어. 바바라가 세운 유령회사 명의로 부동산도 몇 개 사뒀고. 보더시티를 거쳐 세탁한 돈이니 추적에서도 안전해. 아마 우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지젤은 엄청난 횡령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난 손바닥으로 이마를 밀 듯이 댔다.

“길다가 날뛰는 이유가 있었네.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비자금까지 빼돌렸다고? 생활할 돈이야 그때그때 벌면 되잖아!”

재회하고 처음으로 지젤에게 소리를 지른 것 같다.

“양심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길다한텐 미안한 마음뿐이고. 하지만 난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싶었어.”

옷을 갈아입은 지젤이 구형 단말기를 꺼냈다. 바바라와 지젤은 단말기로 정보를 공유했다.

삑, 삐빅.

지젤은 냉정한 사업가처럼 단말기 화면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그녀의 동공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녀는 단말기를 보면서 동시에 말을 이어갔다.

“……난 전쟁 직전에 널 깨우려고 했어. 전쟁이란 혼란이 시작되면 우릴 찾으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설사 있다고 한들, 여력까진 없을 거고.”

가까운 미래에 노바스 행성은 전쟁터가 될 것이다. 삼국 모두가 예상하고 준비 중인 전쟁이다.

지젤과 바바라가 예상한 전쟁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뒤였다.

지젤은 단말기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필요하다면 제국의 칼을 이용해 전쟁의 계기를 만들려 했어. 제국 내부의 분쟁이 길어지면 다른 국가가 움직일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사라질 도시가 보더시티지. 그러면 라자루스의 냉동수면 환자는 궤도병원이나 벨라토시티로 이송될 거고.”

지젤은 사적인 목적을 위해 수많은 생명이 사라질 전쟁조차 불사할 생각이었다. 물론, 지젤의 개입이 없더라도 전쟁은 예정된 미래이지만 감정적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내가 알던 지젤은 저런 악덕을 삼킬 비위가 없는 소녀였다.

‘세상이 불타든 말든…… 나와의 미래만을 위해 움직인다.’

지젤의 집념에는 바바라 못지않은 광기가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스륵.

난 지젤 대신에 바바라를 보았다. 바바라도 내 시선을 느끼고선 눈을 마주쳤다.

바바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한쪽 입가를 밀치며 들어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바바라 내면의 목소리가 텔레파시처럼 내게 닿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을 또렷이 읽을 수 있었다.

‘루카, 네가 지금의 지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바바라가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 * *

허니스페이스 피랍 사건 이후 3주가량이 지났다. 정확한 날짜로 따지면 20일이었다.

난 낯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밤거리를 배회하지 않고, 아침 해를 보며 일어났다.

뭐, 가끔은 푸른 새벽을 보면서 눈을 떴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눈을 뜬 내가 처음 마주하는 건 언제나 포근한 살 내음이었다.

“으음, 루카? 벌써 일어나?”

침대의 지젤이 뒤척이며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이불을 잡아 그녀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체력이 꽤 많이 회복됐거든. 잠이 줄었어.”

“그런 것 같긴 해. 나날이 강해지더라고. 덕분에 난 더 피곤하고 말이야.”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젤은 내 상처투성이 배를 더듬다가 졸린지 다시 눈을 감았다.

스륵.

난 지젤의 손을 조심스레 밀며 침대를 빠져나오고선 창가로 걸어갔다.

촤륵!

커튼을 젖히니 푸른 새벽이 드리운 창밖이 보였다.

‘……벨라토시티.’

우린 보름 전에 벨라토시티에 도착했고, 도시의 중심부가 아닌 외곽지대의 다세대 빌라에서 거주했다.

벨라토시티는 자연과 건축물이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빌라의 창밖에서도 녹지대와 공원이 드문드문 보였다.

길거리에는 아침부터 운동을 나온 시민들이 보였다.

벨라토시티의 치안은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외곽에서도 부랑배나 무법자를 보기 힘들었다. 안정적인 평화가 도시 전역에 맴돌고 있었다.

‘한적하군.’

이런 평화와 자연은 내게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내 정신건강에도 말이다.

나는 멍하니 바깥을 보았다. 푸른 새벽이 걷힐 때까지 고요한 시간을 만끽했다.

‘지젤과 바바라가 안배한 평온.’

이제 날 추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 한들 찾기 힘들겠지.

‘시커먼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외줄을 타는 건 그만둬도 된다.’

허니스페이스 우주선 피랍과 뉴젠 궤도병원 습격은 대사건이었으나, 나와 바바라의 초상화나 사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바바라의 해킹이 있더라도 증언에 의한 몽타주 정도는 남을 만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생뚱맞게도 이상한 2인조 남녀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이 정도 테러의 범인을 잡지 못하면, 정부와 대기업의 체면이 무너지기 때문이지.’

벨라토시티의 이면도 어두침침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론 우리를 쫓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눈에 띌 만한 대외활동은 당분간 삼가는 게 좋았다.

창가에서 벗어난 나는 물잔을 잡으려다가 움찔했다.

난 벨라토시티에 머물면서 의수와 의족을 교체했다.

“흠.”

지금 쓰는 의체는 일상용 중에서도 출력이 상당히 낮은 녀석이었다. 한평생 고출력 의체만 사용하다 보니 아직도 종종 이물감이 들었다.

나는 인공피부 아래를 들여다보듯이 집중하고선 물잔을 잡았다.

꿀꺽.

난 탁자에 놓인 알약과 함께 물을 마셨다. 내가 매일 복용하는 알약은 고농도의 신경안정제였다. 보통 사람이 먹으면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강력한 안정제였다.

나는 약을 복용해 신경전달물질을 극도로 억제했고, 저출력 의체를 통해 뇌의 부담을 최소화했다. 임시방편으론 쓸만했다.

그러나 솔직히 요즘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 자신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해결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억제하더라도, 나는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안다.

일레이와 키누안이…….

지끈.

두통이 생겼다. 물이 넘치듯이 억제해둔 사고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사고의 초점을 복잡한 사안에 두면 신경안정제로도 억제가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제국에 대한 정보를 외면하려 했다.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자 평온이다. 루카, 정신 차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내 의수가 고출력이었다면 짚고 있던 탁자가 쪼개졌을 것이다.

덜컹.

난 현관으로 나가서 옆집으로 향했다. 옆집의 문은 강도라도 반기듯 활짝 열려 있었고, 걸어 들어간 나는 벽을 두드려 기척을 냈다.

똑, 똑.

옆집 거실에는 모니터와 홀로그램에 둘러싸인 소녀가 있었다. 주황머리의 그녀는 날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렇다, 우리 옆집엔 바바라가 살고 있다.

“웬일이야? 이웃사촌 아저씨.”

“일은 잘되고 있나 싶어서.”

“잠도 줄여가며 정보 통제 중이야. 안심해도 돼. 지젤이 널 좋아하는 한…… 넌 안전해.”

바바라는 여러 네트워크를 상시 감시하며 우리와 관련된 흔적을 지웠다. 우릴 찾을 만한 사소한 연결고리마저 철저하게 박멸했다.

“거, 고맙네.”

난 바바라의 모니터와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신경안정제 때문에 정보 흡수가 상당히 늦었다.

바바라가 그런 날 보더니 눈가와 입가를 길게 찢으며 웃었다. 그녀의 어깨와 가슴이 기계적으로 떨렸다.

“히, 히, 히. 그럴 줄 알았어, 루카. 넌 폭력의 사생아야. 평온을 손에 쥐여 주더라도 금방 내던지며 파멸을 향해 달려갈 놈이지.”

바바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삑.

모든 모니터와 홀로그램이 제국과 관련된 정보로 가득 찼다. 그간 있었던 일들이 멋지게 정리되어 있었다.

뚝.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어졌다. 막혔던 둑이 무너지듯 뇌 내의 전달물질이 폭주했다.

정보가 단숨에 정리되더니 도서관 장서처럼 뇌리에 차례대로 꽂히고 있다.

“……우읍, 퉤엣.”

난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반쯤 녹은 알약을 토해냈다.

“지금 너, 웃고 있어.”

“나도 알아, 망할 년아.”

나는 입가를 닦아냈다.

난 내 자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평온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뿐이다.

진정한 평온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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