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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뛰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지젤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할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타고 왔던 우주여객선이 있는 정박장에 도착했다.
내 의식은 몽롱했다. 기억은 물이라도 탄 듯이 흐렸다. 기억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집중하면 전부 떠올랐다. 집중해야 떠오른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끼이이이이이!
궤도병원의 구조물이 급격하게 정지하면서 굉음이 일었다.
위이이잉!
복도 벽의 전등이 깜빡거리다가 꺼졌고, 신경질적인 경고음과 함께 새빨간 멍과 같은 적등이 벽을 따라 빛났다.
두우우웅!
궤도병원의 인공중력이 사라졌다. 인공중력을 만드는 회전이 멈춘 것이다.
‘바바라의 짓이겠지.’
궤도병원 전체의 중력이 사라졌으니 내부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활동하기엔 좋은 상황이다.
우우웅.
나는 무중력 공간을 부유하며 우주여객선의 화물칸으로 들어갔다.
난 화물칸에 지젤을 내려놓고선 숨을 돌렸다. 지젤은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퉁! 퉁!
객실 안쪽에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긴 객실은 승객들에게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돌아갈 때까진 인질 역할을 해줘야겠어.’
나는 객실 방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박장을 응시했다. 곧 바바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직, 칙.
바바라의 전신의체에서는 전류가 간헐적으로 일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관자놀이와 목덜미에는 과부하와 과열의 흔적이 시커먼 흉터처럼 남아있었고, 아직도 손상 부위에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네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지?”
나는 화물칸으로 부유하듯 날아오는 바바라를 보며 말했다.
바바라는 날 무시하더니 지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아, 지젤을 찾았구나. 정말로, 여기에 있었네.”
바바라의 손이 지젤의 얼굴에 닿았다.
주륵.
지젤의 유기물 가면은 반쯤 녹아내려서 손으로 쉽게 걷혔다. 냉동수면에 들어가기 전까진 생체 부위처럼 얼굴에 바짝 들러붙었을 것이다. 참 요령이 좋은 위장이었다.
스륵.
유기물 가면이 걷히면서 지젤의 옛 얼굴이 드러났다.
“히, 히, 잘했어, 루카.”
바바라가 웃으며 날 쳐다봤다. 그녀의 희번덕대는 눈빛과 미소는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바바라에겐 저게 진심 어린 미소일 것이다.
“출발해.”
내가 재촉했다. 사실, 난 당장이라도 눈이 감겨 기절할 것 같았다.
“이미 하고 있어. 우주선이 무슨 자동차처럼 시동만 걸자마자 움직이는 줄 알아?”
바바라의 동공 테두리가 여러 빛깔로 반짝였다.
이제 탈출은 바바라의 역량에 달려 있다. 나는 지켜만 볼 뿐이다.
그래, 구경만…….
퉁!
……나는 움찔했다. 바닥에서부터 진동이 일었다. 화물이 출렁일 정도였다.
‘뭐지?’
나는 우주여객선이 출발 전에 공격을 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우주여객선은 궤도병원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방금의 굉음은 우주여객선이 노바스 행성 상공으로 진입하는 충격이었다.
‘……내 기억이 아예 사라졌군.’
궤도병원을 빠져나오고 나서의 기억이 없었다. 완전한 소실이었다.
품에서 느껴지는 지젤의 온기가 없었다면 난 고함을 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너 맛이 제대로 갔네, 킥킥.”
바바라가 날 보며 웃었다. 그녀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형성해서 우주여객선을 조종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넌 방금 눈을 뜬 채로 기절했어. 멍하니 지젤만 바라보고 있더군.”
뇌가 강제로 내 의식을 끊은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막기 위한 뇌의 보호 본능이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의식이 꺼졌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잦아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젤을 손에 넣었는데도, 날 죽이지 않고 놔뒀군.”
나는 지상에 도착하기 전까지 긴장을 놓지 않으려 했다. 바바라를 완전히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바라는 위험한 인물이다. 지젤을 독점하기 위해선 날 서슴없이 죽일 거라 생각했다.
“네가 죽으면 지젤이 슬퍼할 테니까. 내가 널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죽일 수 있었어. 애초에 널 라자루스에 입원시키고 신원 조작을 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바바라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세밀하게 조작하며 말했다. 우주여객선은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
바바라는 아무래도 정말로…… 날 죽일 생각까진 없는 듯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화물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지젤이 여기에 있다.’
거짓말처럼 지젤이 내 품에 있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난 지젤의 몸을 덮고 있는 담요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눈물도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바바라는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다가 우주선 조작에 집중했다.
덜컹!
지상에 가까워지면서 우주선의 흔들림도 커졌다.
“바바라.”
“집중하고 있으니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
“정말……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지. 나와 지젤이 그간 네게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결과적으로, 바바라는 지젤에게 헌신적이었다. 지젤의 계획은 바바라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다.
“루카, 착각하지 마. 네 감사는 필요 없어. 내가 듣고 싶은 건 지젤의 감사야.”
난 피식 웃었다.
강제로라도 뇌가 휴식하니 머릿속이 한결 선명해졌다.
‘바바라는 지젤을 연인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로군.’
바바라가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도 아니고 연애의 경쟁자를 살려둘 리가 없다. 지젤에 대한 소유욕은 가지고 있으나 연애 감정과는 결이 다른 소유욕일 터다.
‘바바라에게 지젤은…….’
내가 아는 건 바바라와 지젤이 과거에 가까웠다는 것 정도다. 지젤도 바바라를 친구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바바라의 본성을 알기 전까진 친구라 생각했지.’
나는 바바라를 쳐다봤다. 헌신적이라는 표현이 무척 잘 어울렸다.
설사 연인일지라도 바바라처럼 헌신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연인이기에 오랜 헌신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사랑이란 감정은 쉽게 변질하며 휘발한다. 지젤도 그걸 알기에 자신의 시간을 멈춘 것이다.
“바바라, 지젤은 네게 어떤 존재인 거지?”
물음이 자연스레 내 입 밖으로 나왔다.
바바라는 홀로그램 조작을 끝내고 나서야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목이 휠 듯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삐걱.
바바라가 고개를 몇 번이나 좌우로 갸웃거렸다. 그녀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다가 나중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바바라도 모르겠어. 지젤은…… 나에게 뭘까? 히히.”
……나는 바바라가 안쓰러웠다.
* * *
남은 계획은 조용히 진행됐다.
우리가 탈취한 허니스페이스의 우주여객선은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황무지에 추락했다. 승객을 위한 구출대는 나중에 올 터다.
바바라는 미리 준비해둔 차량을 호출했고, 우린 차량을 타고 빠르게 착륙지점에서 이탈했다.
우리가 탄 개조 차량은 노마드들이 흔히 사용하는 부류였다. 고철로 엮어 만든 듯, 투박한 차량은 덜컹거리면서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우우우웅.
차량은 자동 주행 상태로 나아갔다.
철인 같던 바바라도 버티기엔 한계였는지 운전석에 기대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지젤을 옆에 둔 채로 뒷좌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뜰 때마다 난 지젤의 존재를 확인했다.
‘……진짜로 끝났군.’
난 지젤을 찾아냈다.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있었다. 쌕쌕거리는 호흡을 들을 때마다 난 안정감을 느꼈다.
말랑말랑한 고양감이 내 마음을 주무르고 있었다. 간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만큼은 세상만사를 전부 잊고, 따스한 감정에 취하고 싶었다.
꿈틀.
지젤의 몸이 움직였다. 나도 반쯤 졸다가 눈을 떴다.
사실 난 꽤 중상인지라 휴식과 치료가 필요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즉 죽었을 것이다.
“루, 카?”
지젤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동공은 고장 난 카메라처럼 초점을 단번에 잡지 못했다.
“일어나, 아가씨.”
지젤도 몽롱한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서히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지젤은 내 존재 자체가 믿기 힘들다는 듯이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하하핫, 진짜네. 정말로 너구나, 루카. 웃겨.”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따라 웃었다.
“찾는다고 고생했어.”
“미안해. 꽤 난해했지?”
지젤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매만지다가 때론 세게 꼬집었다.
“아프잖아.”
“여러모로 엉망이구나. 꼴을 보니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았겠지. 그리고…….”
지젤은 운전석을 응시했다. 바바라는 어지간히도 지쳤는지 소란에도 깨지 않았다.
슥.
지젤이 앞좌석을 잡으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바바라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지젤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바라를 보고 있었다.
“바바라, 고생했어.”
나는 흠칫 놀랐다. 바바라를 두려워하던 소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과거조차 포용하는 듯한 성숙한 여인이 내 앞에 있었다.
‘지젤은 달라졌다. 내가 알던 소녀가 아니야.’
잘 알고 있지만 직접 보니 기분이 묘했다.
지젤도 날 보며 이런 감정을 느끼겠지. 나도 예전과 달라졌을 테니까.
“아, 지젤? 흐으음.”
바바라도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지젤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뺨에 대었다.
“간지러워, 바바라. 재생한 팔다리라서 감각이 민감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바바라와 지젤은 유대를 형성했다. 그들의 관계는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두 사람은 상당히 가까워진 모양이다.
두 사람을 보니 내 마음속에선 질투라는 감정이 슬며시 나올 정도였다. 젠장, 한심한 남자구나, 루카.
‘내가 모르는 일들이 저 둘 사이에 있었다.’
지젤이 바바라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바바라는 지젤의 손길을 만끽하며 하품했다.
“지젤, 난 더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 그리고…… 남자는 다 짐승이니까 조심하고.”
바바라는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더니 다시 잠들었다.
지젤도 엉덩이를 내 옆에 붙이며 흘러내린 담요를 추슬렀다.
“알고 보면 불쌍한 애야.”
지젤이 그리 말하며 숨을 골랐다. 나는 물통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부터 말할까, 너부터 말할래?”
내가 운을 뗐다. 지젤은 목을 축이고선 입가를 닦아냈다.
지금 우린 다정하게 껴안은 채로 좋은 이야기만 할 순 없었다. 많은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공유가 급한 건 나만이었나 보다.
꾹.
지젤은 내 손을 잡으며 깍지를 꼈다. 그녀는 노래하듯 휘파람을 불더니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야기하기 전에 키스부터 해줘, 루카.”
말끝에서도 불안이 묻어나왔다.
“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연애 기술은 참으로 시원찮다. 하지만 의문과 위화감이 든 건 사실이다.
“이러기야?”
“궁금한 건 못 참는 게 직업병이라서.”
“직업병?”
“요즘 탐정으로 꽤 유명해졌거든. 명탐정 루카라고…….”
지젤이 맑게 웃다가 콜록거렸다. 그녀는 사레들린 기침을 내뱉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넌 날 미워하거나 경멸할지도 몰라. 그러니 그 전에 키스해달라는 거야.”
지젤은 자신의 변화를 밝히길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도 두렵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