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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24

324
난 바바라를 믿어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불안감이 새삼스레 커지고 있었다.

마녀 바바라는 불안정한 인간이다.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감정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무쉬르 알 카슈라만큼은 아니라도 궤가 다르긴 했다.

-계속 전진해. 그쪽으로 경비는 없을 거야.

바바라의 안내가 귓가의 통신으로 들렸다.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잘못된 길, 혹은 함정으로 날 몰아넣는 게 아닐까?

‘나 몰래 지젤을 가로채고 둘이서만 빠져나갈 수도 있지.’

불안감이 드문드문 들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바바라는 보편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젤을 구하기까진 날 배신하지 않을 거야. 내 도움 없이는 지젤을 빼내지 못해.’

지젤을 구할 때까진 바바라를 믿을 수 있다.

‘어차피 우린 서로를 믿어야 한다. 믿지 않고선 다른 방도가 없는 처지지.’

우리 사이의 믿음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다.

치이익, 철컹.

난 몇 겹이나 되는 금속문을 지나갔다. 보안이 철저한 구역이었다. 벽면의 두께도 다른 곳보다 두꺼워서 내부 공간이 좁았다.

-냉동수면은 전부 해제했어. 네가 도착할 즘엔 사람들이 알몸으로 쓰러져 있을 거야. 지젤을 찾아서 데려와.

바바라도 도발이나 농담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벅찬 느낌도 묘하게 있었다.

하기야, 대기업 산하의 시설을 해킹하는 중이다. 어마어마한 정보 부하가 그녀의 뇌에 실리고 있겠지.

전자전이 내 전문분야가 아니지만, 바바라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가늠된다.

키잉!

난 마지막 문을 지나서 냉동수면 시설로 들어섰다. 시설의 문이 열리자마자 끈적한 액체가 발밑에 드리웠다.

철퍽.

냉동수면 캡슐 내부에서 나온 밀도 높은 액체가 자작하게 바닥에 고여있었다. 온도는 사람의 체온 정도인 듯하다.

“몇 명이지?”

-242명.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냉동수면 시설 내부를 응시했다. 가슴이 철렁일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주르륵.

열린 냉동수면 캡슐 아래에선 액체가 거품 낀 가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한 유기 화합물 냄새 때문에 코가 아플 정도였다.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나신으로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그나마 회복이 빠른 사람들조차 겨우 신음하는 정도였다.

‘242명.’

시간이 부족하다. 하나하나 확인하다간 5분이 넘을 터다. 그땐 우주군의 포위에서 나와 바바라가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인간 여성, 팔다리는 의체.’

난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나신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냉동수면 전에는 의체를 보통 제거하는 편이다. 그러나 얼추 둘러봐도 사지가 전부 없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팔다리 한둘이 없는 게 고작이었다.

‘지젤의 팔다리는 의체였지.’

지젤은 제국 귀족답게 전신의체 이식을 위해 의수와 의족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인이 돼서도 전신의체 시술을 받지 않았다.

‘모습을 바꾸거나 팔다리를 재생했을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지젤은 여러 가지 위장을 했을 터다.

나는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빨리 찾아. 지젤이 그곳에 없다면 빠져나가야 해. 네 추측이 틀린 거니까.

바바라의 통신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철퍽.

그러나 내 발걸음과 시선의 움직임은 느릿하다. 한 명씩 응시했다.

지젤을 찾지 못한 채로 통로를 지나갈수록 어두운 생각만이 짙어졌다.

난 좌절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세상이 날 짓누르려고 해도 억척스럽게 일어서서 주먹을 쥐었다.

오히려 억압과 부조리가 강해질수록, 나는 더 큰 반발력을 가지고 튀어올랐다. 그게 나란 놈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라.’

다신 튀어오르지 못할 것 같다. 이대로 짓눌려 죽어버릴 것만 같다.

난 한계에 도달했고, 정신도 너덜너덜했다. 뇌 손상의 영향도 있겠지.

‘여기서 지젤을 찾지 못해도…… 다시 돌아가 재정비하고 조사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설사 내게 남은 의지가 있다고 한들, 내 육신이 버텨줄지도 의문이다.

기잉.

이명이 크게 울릴 때마다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내 시야는 변두리부터 어둑어둑해지더니 좁아졌다. 부정적 심리가 감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채도가 사라진 듯이 밋밋하다.

감정이 죽어가듯, 모든 게 흐리다. 설사 남은 희망이 있어도 보지 못할 것만 같다.

‘최악이군.’

우울감으로 인해 신경전달 물질이 감소한 탓인지, 아니면 신경계 피로 누적 때문인지 몰라도…… 의체의 출력도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사실, 아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나는 보더시티에서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었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절망과 불행을 견딜 수 있다.’

희망의 빛이 꺼질 때마다 죽음이란 어둠이 날 삼키려 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빛이 있을 것이다.

……나의 희망과 빛은 지젤이다.

나, 루카에겐 일레이 카르티카처럼 대국적인 목적이 없다. 키누안처럼 꿍꿍이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도 바람이 아니다. 황제와 위정자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저 나의 삶을 가지고 싶다. 그 시작을 위해선 지젤을 찾아야 한다.

한 가닥의 실낱만 붙잡고, 보더시티의 폭풍우를 헤쳐나왔다. 그 끝이 망망대해의 절망과 또 다른 태풍이라면 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쓰러질 뻔했다.

철퍽, 철퍽.

나아갈 때마다, 내 신발창에는 끈적한 액체가 들러붙었다.

난 캡슐에서 너저분하게 삐져나온 사람들 사이를 확인하며 헤쳐나갔다. 해동이 끝난 사람들은 내 눈엔 시체처럼 보였다.

내 세상의 채도가 낮아지다 못해, 색채마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물의 구분감이 옅어진다. 사람과 기계가 얽힌 것처럼 느껴졌다.

난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세상이 완전한 흑백으로 보인다.

멈추지 않는 이명이 날 괴롭히고, 눈은 따끔따끔했다. 콧잔등은 욱신거리고, 관자놀이의 두통은 뇌를 찌르는 바늘과 같았다.

비틀.

시야가 흔들린다. 넘어진다면 해동된 인간들과 엉킬 것만 같았다.

-루카!

귓가에서 들리는 바바라의 통신은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아니,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도 먼 것 같다. 과거의 기억처럼 바바라의 재촉은 현실감 없이 느껴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마음에 닿지 않았다.

대개,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운에 의존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종종 운과 기적을 바란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마저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한 다음에 기적을 바란 것이다.

‘무기력하게 기적을 바란 적은 없어.’

지금, 나는 기력을 짜낸다면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터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든가, 이대로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것이,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으로 이 세상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가끔은…….’

내 처지가 억울하기도 했다.

‘……노력하지 않아도 기쁨과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는 거잖아.’

지금까진 미친 듯이 달려봐야 최악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지나온 길은 시커멓고 붉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루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토록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말자. 적당히 타협하고, 때론 이기적으로, 나 정도면 열심히 했지라고 합리화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죽인 주제에…… 앞으론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내 총칼에 죽은 자와 유족들이 듣는다면 피눈물을 흘릴 소망이지. 할 말이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이게 나다.

이성의 가면이 깨지고, 도덕의 천칭은 부서졌고, 어린아이 같은 자기중심적인 바람만이 남았다.

세상이 내게 친절했으면 좋겠다. 날 그만 좀 죽이려 들었으면 좋겠다. 노력하지 않으며 무기력한 루카도 사람들이 사랑해 줬으면 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생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생판 남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듯이, 이 세상에 던져지듯 태어났더라도 한 번 정도는 천운과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루…….

바바라가 뭐라 계속 외치고 있다.

나는 냉동수면 시설의 끝에 도착했다. 사람들을 전부 훑었지만 지젤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놓친 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든, 일단은, 나는 지젤을 인지하지 못했다.

퉁.

난 벽에 등을 기댔다.

마음 같아선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목구멍과 가슴이 무척 아파서 거친 숨만 쌕쌕 나왔다.

텅!

난 머리를 뒤로 젖혔다. 헬멧과 벽이 부딪히면서 공허한 소리가 났다.

내 뇌를 지배하던 아키에스 빅티마도 작동하지 않는다. 뇌의 신경전달 물질이 메마르듯 사고가 느려진다.

‘좋아, 그래, 이제 끝내자고.’

세상은 내 어리광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빽빽 울면서 떼를 쓸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이 우주가 내게 개같이 군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내가 세상을 버리고 관두면 그만이다. 세상에게만 행복과 불행을 나눠줄 선택권이 있는 게 아니다. 내게도 세상을 그만둘 자유가 있다.

“루…….”

흠, 바바라의 부름은 무시하자.

“……카.”

난 느슨하게 머리를 들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신기에서 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루카.”

내 이름이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실타래를 따라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흑백이었던 세상의 색깔이 알록달록하게 드리웠고, 무에서 빛이 생겨나듯 채도가 돌아왔다.

난 목소리의 형태를 빌린 빛줄기를 따라 걸었다.

철퍼덕.

내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나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밤하늘을 닮은 파랑이 아니었다. 그녀의 단발은 밤색이다. 팔다리도 의체가 아니었고, 얼굴의 생김새도 낯설었다.

“루카.”

여인은 잠꼬대하듯 의식 없이도 내 이름을 불렀다.

스륵.

나는 여인을 안아서 내 무릎에 올려두었다.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도 내 이름을 부를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얼굴도 모르는 내 친모조차 나란 존재를 까먹었을 텐데 말이다.

여인의 팔다리는 재생의 흔적이 있었다. 팔다리의 접합부에 아주 미미한 흉터가 보였다.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난 시커먼 늪에 빠진 오랜 보물이라도 건져내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젤…….”

여인의 눈썹이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렸다.

끽.

내가 엄지로 여인의 이마를 살짝 눌렀다. 엄지를 따라 유기물 가면이 밀렸다. 해동이 끝나니 구조가 흐물흐물해진 것이다.

‘하하.’

난 흐릿하게 웃고 말았다. 소리조차 없는 웃음이었다.

기이이잉.

점차 세상의 소리와 빛이 선명해진다. 사방에서 퍼지는 기계의 진동과 울림도 현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삶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찾았어.”

난 바바라에게 보고하고선 밀려올 고함에 대비했다.

-그럼 달려! 등신아!

아마도 우린 제법 늦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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