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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318

318
쟈파 상사의 예전 사옥은 반파되어 재건축 중이었다.

현재의 임시 사옥은 원래 지부로 쓰던 건물인지라, 옛 사옥보단 훨씬 규모가 작았다. 7층인지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여기보다 높은 건물이 수두룩 빽빽하게 보였다.

터벅, 터벅.

난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쳐다봤다.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달이 새파랗게 빛났다. 얼음으로 조각한 듯이 시린 달이었다.

“하아.”

입을 여니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밤바람은 칼날을 머금은 듯이 시큰했다.

찬 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시자 폐가 따끔따끔했다. 날씨가 제법 찼다.

끼릭.

나는 충격권총 루이나를 꺼내서 예열했다. 충격탄의 화력이면 어설픈 우연으로라도 살아남진 못할 터다.

“좋아, 시작해볼까.”

나는 옥상의 난간에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밤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시커멓게 느껴진다. 보더시티의 야경이 반짝이는데도 세상이 어둡고 흐릿하게 보였다.

뭐, 그냥, 내가 더럽게 우울한 상태라는 거다.

난 화학 처리로 봉인이 해제된 데이터칩을 꺼냈다.

“후우.”

망설이던 나는 단말기에 데이터칩을 집어넣었다.

위이이잉.

단말기의 홀로그램 렌즈가 반짝였고, 이내 내 눈앞에서 홀로그램 화면이 빛났다.

심호흡한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젤이 무얼 남겼는지 모른다. 장문의 글일 수도 있고, 영상으로 남긴 편지일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유서일 수도 있지.

어쨌거나 내 궁금증이 풀리거나…… 혹은 견디기 힘든 절망이 날 짓누르든가 둘 중 하나는 곧 일어날 터다.

치직, 찌익, 찍.

홀로그램이 찢어지듯 흐릿했다. 글자가 하나씩 떠올랐다.

-처음, 그곳에서.

홀로그램 화면에 떠오른 글자는 이게 전부였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장난해? 이게 전부야?”

난 허탈한 심정을 입으로 내뱉었다. 예열해둔 루이나가 민망할 정도로 짧은 전언이었다.

물론, 지젤은 쥬페에게 넘긴 데이터칩이 타인에게 넘어갈 가능성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분석은 내 몫이다.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제국의 수도 아크바란이다.

‘첫 만남.’

나와 지젤이 처음 만난 건 근위대 양성소 비행장의 공중차량 안이었다. 그 이후로 우린 크라치아 아카데미에서 한동안 마주쳤었다.

‘당연히 처음 만난 장소는 아니야. 크라치아 아카데미도 아닐 거고.’

나와 지젤만이 아는 곳. 그리고 타인이 데이터칩을 가로채더라도 쉽게 장소를 알아낼 수 없어야 한다.

‘여기엔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어.’

나는 난간에 기댄 채로 달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잠자리를 가진 숙박업소?’

허름하다 못해 폐가와도 같던 숙박업소가 떠올랐다.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유력한 장소였다.

‘확실히 거긴 나와 지젤만 알 수 있는 장소야. 하지만…….’

지젤은 날 제국에서 빼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제국, 그것도 제도 아크바란에 다시 들어간다면 황제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아크바란에서도 황제를 피해 숨을 수 있었다면 힘들게 보더시티까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젤이 날 다시 아크바란으로 끌어들이려 했을까?’

사고가 가속한다. 지젤과의 기억을 하나씩 검토하며 그녀가 남긴 말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끼이익.

내 사고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옥상의 문이 열렸다.

“호욧, 호욧. 여기에 계셨군요. 보아하니 바로 떠나시진 않을 것 같아 이야기나 해보고 싶었습니다.”

쟈파가 느슨한 로브를 끌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걸음의 중심이 묘하게 한쪽으로 쏠렸고 행동은 굼떴다.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군.’

쟈파는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었다. 전신 재생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을 거다.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네, 쟈파.”

“몸이 크게 한번 망가지고 나니 기력이 쇠한 게 느껴집니다. 후계자를 생각해본 적은 여태 없었는데 슬슬 준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도 생기더군요.”

“후계자라면? 앙귀스 레지나는 아니겠지? 사업가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야.”

“맞습니다. 그 아이는 기업을 운영하기엔 잔정이 많죠. 여러 사람한테 정을 주는 성격이니까요. 그런 면에선 당신과 닮았군요. 그 성격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것도요.”

쟈파가 두 갈래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난 눈을 찡그렸다.

“요즘 개나 소나 나에 대해 아는 척하는군.”

“호욧,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 쟈파는 조금 섭섭할지도요. 우린 서로에 대해 꽤 알만큼 교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개나 소가 아니라 뱀이고요.”

쟈파가 긴 손톱을 딱딱 마주치며 말했다.

쟈파와의 교류가 깊다는 게 부정하긴 힘들다. 보더시티에서 보낸 시간의 대다수는 쟈파와 관련된 일이었다.

“마음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지금 내 머릿속이 그렇게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서 말이야.”

쟈파의 세로 동공이 커졌다.

“곧바로 사과라니, 예전의 루카 씨라면 상상도 못 할 말이로군요. 많이 변하셨습니다.”

쟈파는 특유의 웃음을 내뱉다가 화제를 전환했다.

“하여튼 이번 혼란이 정리되면, 저도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앙귀스 레지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거든요. 키누안에 대한 집착이 절 불행하게 만들고 파멸시킬 거라 하더군요. 틀린 말이 아니죠. 그리고 엔은 고용인이자, 제 친구였습니다. 막상 전사했다고 하니 제 예상보다 감정적 타격이 크더군요.”

엔은 내 손에 죽었다.

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쟈파를 보았다. 쟈파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날 원망하진 않겠지만, 굳이 내 입으로 당당하게 언급할 사안은 아니다.

쟈파는 예전보다 늙어 보였다. 얼굴이나 생김새가 아니라 말투와 기세에서 노화가 느껴졌다. 사업가에겐 좋지 않은 변화였다.

‘쟈파도 본인의 기력이 떨어졌다는 걸 느꼈기에 물러날 생각인 거지.’

나와 쟈파는 보더시티의 분쟁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

“키누안에게 집착하느라 시야가 좁아진 탓에 전 손 사장에게 당했습니다. 라그나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쯤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죠.”

“아니면 손석재에게 인질로 잡혀서 앙귀스 레지나의 약점이 됐겠지.”

“자식의 발목을 잡을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낫죠, 호요옷.”

그리 말하는 쟈파의 목소리가 그나마 밝아졌다.

나는 눈을 옅게 뜨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앙귀스 레지나와의 관계 회복이 순조로운가 봐?”

“좋습니다. 종종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 애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했겠죠.”

“왜 그러지 않았지?”

쟈파가 혀만 내밀며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저는 앙귀스 레지나, 아니, 온전한 기억을 가진 엘리제가 절 사랑하는 게 아니라 경멸할까 봐 무서웠으니까요.”

쟈파가 앙귀스 레지나의 본명을 언급했다.

“딸을 믿지 못했군.”

“제가 나약한 탓이었죠. 정작 그 아이는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내면서까지 절 구했는데 말이죠. 웃기게도…… 우린 큰 사랑을 받을수록 오히려 불안해하곤 합니다. 그 사랑이 사라질까 봐요.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받지 않았다면 변심에 좌절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죠.”

말을 듣던 나는 가만히 쟈파를 쳐다봤다. 내 머릿속에서 종이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변심.’

마음은 우리의 이성에서 벗어나 있다. 마음의 움직임과 방향성은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변심은 두려운 것이다.

‘타인의 변심이든, 나의 변심이든.’

나는 면도를 하지 않아 거칠어진 턱에 손을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루카 씨?”

쟈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 불렀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의식과 사고가 내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환각은 내 두려움의 산물이다. 난 그간 지젤의 환각을 종종 보았다.

‘나의 두려움.’

무의식을 들여다보자.

‘지젤이 날 껴안듯 속박했지.’

간혹 지젤의 사슬이 내 몸을 감는 느낌마저 받곤 했다.

‘나는, 왜, 지젤을 속박의 상징으로 여긴 거지?’

나에게 묻는다. 이성을 버리고, 솔직한 감정의 대답이 나와야 한다.

‘내 마음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젤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

지젤이 없어도 난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앙귀스 레지나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여자도 내 삶에 나타났다.

타인과의 교류, 경험,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나도 내 마음이 지젤에게 멀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그녀를 찾아다니는 건 그저 공허한 집착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엄습했다.

‘여전히 지젤이 날 깊이 사랑하는데, 내 마음만 변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보더시티에서 깨어난 지 2년도 되지 않았다. 2년 만에 나는 ‘나의 변심’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은 부정형의 물질과 흡사하다. 외부의 영향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바뀐다. 의지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지젤이 곁에 없는데 그녀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을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나는 지젤의 존재를 거북하게 여길 터다. 의무감과 희미한 집착만으로 그녀를 찾아다니겠지.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은 이토록 흔들린다.’

지젤과 나를 바꿔서 생각해보자.

……지젤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홀로 버텼다. 난 지젤이 겪었을 두려움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 머저리 같은 루카. 늘 자기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지.’

난 내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지젤도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루카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꼈겠지. 그토록 필사적으로 날 위해 일을 꾸몄는데, 뒤늦게 감정이 식어버린다면? 더는 루카라는 사내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지젤은 자신의 변심이 두려웠을 거야.’

냉동수면에 빠진 나는 깨어나자마자 지젤에 대한 사랑을 엊그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지젤 입장에선 식어버린 마음으로는 나와 도저히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날 거울로 삼아 지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모든 게 연결된다.

‘지젤…….’

지젤은 내가 예정보다 일찍 깨어났을 상황에 대비해 쥬페에게 데이터칩을 맡겼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

설사 우리의 감정에 변화가 있더라도, 그걸 옆에서 바라보며 마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처음, 그곳에서.

지금의 내겐 쉬운 수수께끼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흩어진 사고를 정리했다.

“쟈파, 이만 가봐야겠다.”

생각을 마친 내가 눈을 뜨며 쟈파의 이름을 불렀다.

“뭔가 떠올리셨군요.”

내 머릿속에서 새하얀 빛이 반짝거리며 춤을 추는 것 같다. 쉽게 말해, 도파민이 솟구치고 있다.

나는 옥상 난간을 잡으며 뛰어내릴 듯이 올라갔다. 쟈파가 당황하며 내 앞까지 다가왔다.

“네 덕분이다. 방금의 대화가 없었다면 깨닫는 데 시간이 더 걸렸을 거야. 젠장, 왜 이걸 여태 생각 못 했지!”

흥분한 나는 쟈파의 머리를 잡고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줄 수 있다. 그만큼 기분이 좋으니까!

“호, 호오욧!”

나는 당황한 쟈파의 목소리를 뒤로하고선 난간에서 넘어지듯 몸을 아래로 던졌다.

후우웅!

풍경이 빠르게 흘러간다. 나는 적당한 높이에서 벽을 차며 빙글 돌았다.

투- 웅!

난 포탄이라도 떨어지듯 무릎을 굽히며 착지했다. 주변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훌륭해, 라피스. 넌 언제나 최고야.’

짧은 시간인데도 의체의 수리가 말끔하게 끝나 있었다. 반파된 왼팔은 기성품 의수로 대체해서 성능이 좀 떨어져도 쓸 만은 했다.

목적지를 정한 나는 곧장 움직였다.

목적지는 극한치료 전문병원 라자루스, 내가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장소다.

“하하…….”

지젤은 납치되거나 죽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의 엇갈림에서 도망가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멈췄다. 즉, 냉동수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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