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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Born Blood Chapter 294

294
우주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인지조차 못 할 정도로 광활하고, 행성은 평생의 여정으로도 다 둘러보기 힘들 만큼 크다.

사실, 우주와 행성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국가는커녕 도시 하나의 흐름조차 나는 읽어내지 못한다.

내가 아키에스 빅티마로 심은 예견의 나무는 그 그늘이 협소했다. 내가 아는 지식과 사건을 통해서만 지엽적으로 상황을 추론할 뿐이다.

인지 바깥의 사건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키에스 빅티마는 만능의 열쇠가 아니다. 그저 약자의 기술이며,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다.

‘나는 앙귀스 레지나를 큰 흐름 바깥의 인물로 여겼다.’

앙귀스 레지나의 관여는 흐름을 바꾸지 못할 거고, 기껏해야 수동적으로만 영향을 미칠 존재라고 생각했다.

내 판단으로는 앙귀스 레지나보다 더 중요한 인물과 사건이 많았다. 그래서 앙귀스 레지나에서 눈을 뗐다.

‘내가 눈을 뗀 사이에 앙귀스 레지나는 빠르게 변모했다.’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앙귀스 레지나는 성장했다.

‘쟈파의 슬하에 있던 앙귀스 레지나는…… 어느새 자기가 쟈파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는 종족도 다르고 혈통도 아니지만 ‘모녀’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선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바뀌는 날이 언젠가 온다.

쟈파와 앙귀스 레지나에겐 지금이 그때였다.

‘쟈파는 쇠약해졌고, 지금 쟈파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앙귀스 레지나다.’

불안정했던 소녀는 한 명의 여자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어머니를 짊어지며 서려 했다. 아직은 어설프고 실수투성이겠지만 자립의 첫발이었다.

나는 수많은 사고를 찰나에 보내면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어붙은 듯이 차가운 현실이 보인다.

철컥!

라피스 라줄리가 앙귀스 레지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지금의 광경을 몇 달 전엔 상상이나 했겠는가?

도대체 세상의 일이 어떻게 풀려야 그 라피스가 앙귀스 레지나에게 표독스레 총을 겨눈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법이었고, 라피스는 앙귀스 레지나를 향해 원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동이 느릿하게 흐른다. 뭐라 외치는 목소리는 한없이 길다.

나는 아직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사고를 가속하며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앙귀스 레지나는…….’

사건의 조각을 모아보자.

난 키누안을 유인하려 보더시티 바깥으로 나갔다. 에퀘시안 용병대의 정예도 함께였다.

그 사이에 쟈파 상사는 취약해졌고, 경쟁 기업에게 공격을 받았다. 어느새 손수공업까지 가세했고, 손석재의 공작 때문에 분쟁은 기업 전쟁으로까지 규모가 커졌다.

‘앙귀스 레지나는 어떻게든 쟈파를 지키고자 했겠지.’

처음에는 앙귀스 레지나도 쟈파를 데리고 도망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쟈파는 중태였고,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든 간에 도주 생활을 하면서 의료지원을 받긴 힘들다.

‘쟈파는 죽어갔겠지.’

당시의 앙귀스 레지나가 겪었을 두려움과 혼란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쟈파는 유능한 리더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척하며 어떻게든 답을 찾아냈었다. 그런 쟈파라는 기둥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의지하던 부모가 갑작스레 무너지면, 자식은 변모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말이다.

그 방향성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세상의 풍파에 무너져 좌절하거나…….

‘……아니면 부모를 대신해서 자신의 몸으로 쓰러지는 기둥을 막아내며 밀어세우지, 세상의 무게를 느끼면서.’

앙귀스 레지나는 후자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사람을 바꾸는 건 시간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과 변화는 경험의 밀도에 달려 있다.

앙귀스 레지나는 인생관조차 바꿀 사건들을 짧은 시간 동안 경험했다. 경험의 응축이었다.

“엔은…….”

앙귀스 레지나가 붉은 입술을 인형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일어난 채로 라피스의 앞까지 걸어갔다.

“……쟈파를 지키지 못했으니 처벌을 받은 것이죠.”

앙귀스 레지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앙귀스 레지나의 동요를 절실히 보았다. 그녀가 아무리 갈무리하려 해도 전신의 감정 신호가 요동치고 있었다.

‘앙귀스 레지나는 일부러 엔을 사지로 몰아세운 게 아니다.’

라피스에겐 나와 같은 능력이 없다. 그녀는 앙귀스 레지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엔이 최선을 다했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잖아요! 엔은……!”

라피스의 눈동자가 촉촉하다. 그녀의 시야는 얼룩져서 흐릴 것이다.

‘라피스는 쏘지 못한다.’

그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라피스, 진정해. 앙귀스 레지나는 악녀가 되고 싶은 모양이니까. 엔의 죽음은…… 아마 실수일 거다.”

실수라는 말에, 앙귀스 레지나가 흠칫하더니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스륵.

나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서 라피스의 총신을 곱게 아래로 눌렀다.

키릭.

라피스도 순순히 총구를 내렸다.

“엔의 죽음에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절 미워해도 됩니다.”

앙귀스 레지나의 말에 라피스는 더 울상을 지었다.

“……똑바로 말해요, 앙귀스 레지나. 전 오해 때문에 당신을 미워하기 싫어요.”

앙귀스 레지나도 입술을 힘겹게 달싹거리다가 말을 내뱉었다.

“라그나타가 제 의뢰를 끝냈다는 연락이 방금 왔어요. 그 증거와 함께요. 엔과 루카가 마주하기 전에, 라그나타가 손석재를 암살했으면…… 엔이 살 수 있었겠죠.”

나는 단번에 이해했다. 집단과 조직에선 흔하게 일어나는 작전의 혼선이었다.

실전 임무에는 변수가 많다. 사전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다. 사소한 오차만으로도 대업의 성패가 갈리곤 한다.

‘앙귀스 레지나의 계획에서 나는 갑자기 개입한 변수다. 엔이 죽는다는 건 당연히 앙귀스 레지나의 계획에 없던 일이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안다. 앙귀스 레지나는 엔을 죽일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명탐정이 나설 차례로군. 이 칙칙한 분위기를 살려보자.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중 임무와 명령체계의 문제로군. 엔과 에퀘시안 용병대가 손석재 휘하로 들어간 건 네 입김이 있었을 거야. 에퀘시안 용병들도 은연중 네게 어떤 계획이 있다는 걸 알았을 거고, 간접적으로나마 쟈파를 돕기 위해 손석재와 기꺼이 계약했겠지.”

난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앙귀스 레지나를 빤히 쳐다봤다.

앙귀스 레지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에퀘시안 용병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수 없었어요. 특히, 라그나타를 고용해 손석재를 암살한다고 말할 순 없었죠.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에퀘시안 용병들은 손석재의 위험을 인지하고 있다면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미리 계획을 말했다면, 필사적으로 고용주인 손석재를 지켰겠죠. 에퀘시안 용병이란 그런 존재들이니까요.”

나는 눈을 찡그렸다.

“고용주가 손석재이니, 명령계통도 손석재가 최우선이었겠지. 그간 에퀘시안 용병들이 너와 직접적으로 소통할 방법은 없었을 거야.”

엔은 손석재가 조만간 암살을 당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한정된 정보만으로 판단해야 했고, 운신의 폭도 용병이란 위치 때문에 협소했다.

‘나와 마주한 엔도 많은 생각을 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로 날 보내줄 순 없었겠지.’

헤일라스가 생각났다. 그는 엔과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더 나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건 욕심이다. 엔에게 헤일라스 수준의 판단력과 통찰력을 요구할 순 없어.’

앙귀스 레지나는 자신의 단말기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단말기에선 바쁘게 메시지가 지나다니고 있었다. 손석재의 죽음 탓일 터다.

스륵.

앙귀스 레지나가 고개를 들었다.

“의도는 상관이 없어요. 엔의 죽음은 제 책임이죠. 누군가 그 책임을 제게 묻겠다면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피스는 주저앉았다.

“이건…… 끔찍해요. 일이 조금만 더 잘 풀렸어도, 엔이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엔은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렇진 않다.

나는 차갑게 대꾸하려다가 참았다. 상대가 라피스만 아니었어도, 세상에 통달한 척하면서 냉혹하게 말했을 것이다.

‘용병이란 덧없이 죽는 존재지. 용병만이 아니라 군인과 전사라는 게 그래.’

전장에선 허무한 죽음이 넘쳐난다. 그 사람들은 세상의 단역이 아니다.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삶에선 주인공이다. 자신만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싸구려 총알 한 발로 사라지는 생명은 수없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두룩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납득할 만한 결말을 맞이할 순 없다. 전사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언제든 허망하게 죽을 수 있다. 엔도 그런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전장은 사람을 염세적으로 만든다.

‘손석재도 마찬가지지.’

난 손석재의 포부를 안다. 그는 악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거악을 꿈꾸었다. 때론 자신을 필요의 악이라 말하기도 했고, 이종족에게 차별받는 인간의 대변자라 자청했다. 그러면서도 차별주의자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가족은 외계종족과 어울리게 했다.

‘그 집념으로 무언가를 이뤄낼 것 같았던 손석재도 라그나타의 손에 죽었다.’

모두가 꿈을 꾼다. 그게 선하든 악하든 말이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보더시티의 혼돈이 사람을 삼키고 있었다. 엔도 손석재도 혼돈이란 급류에 휘말려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여기엔 옳고 그름은 없다. 그저 현상이다.

“이제 무얼 할 거지?”

난 다소 맥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손석재에겐 자식과 부인이 있지만…… 자식들은 어리고, 부인은 세상 물정을 모르니 상대하기 어렵지 않겠죠.”

“그리고?”

“루카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이유가 없죠. 당신이 제 남자친구도 아니고요.”

음, 묘한 뒤끝이 느껴진다.

“뭐, 그렇긴 하지.”

“그리고 저는 키누안에게 손을 뗄 거예요. 키누안에게 집착할수록 저와 쟈파의 삶은 불행해질 뿐이죠. 키누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린 나아가지 못했어요.”

“……현명하네. 나보다 낫군.”

내가 자조하며 말했다. 난 앙귀스 레지나처럼 키누안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못했다.

“루카, 당신은 키누안에게 계속 집착하세요. 저와 쟈파는 증오에 미쳐 자신의 꼬리를 파먹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테니까요.”

난 과거의 선택지를 떠올렸다.

‘내가 앙귀스 레지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과 다른 현실이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앙귀스 레지나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 결과, 앙귀스 레지나는 키누안에게 벗어났다. 이게 그녀에게 더 나은 인생일 것이다. 내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뭐, 합리화든 뭐든 상관없지.

“그럼…… 딱 한 가지만 묻겠다, 앙귀스 레지나.”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엔을 제외한 다른 에퀘시안 용병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에퀘시안 용병들은 죽은 손석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손석재가 죽었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터다.

앙귀스 레지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남은 용병의 행방을 알고 있다.

“……이스마엘 라 차관을 공격하고 있겠죠. 손석재가 보더시티의 혼란을 틈타 제거하고 싶어한 사람이니까요.”

그게 손석재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는 쟈파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외계종족을 증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을 싫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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